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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Dec 03. 2015

눈에 묻혀 있는 첫사랑

영화: 러브레터(1995, 이와이 슌지 감독)

* 스포일러가 나노 단위로 들어있습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읽지 않으시기를 권합니다.


A winter story, LOVE LETTER.


   찬바람이 불고, 앙상하게 빈 나뭇가지가 유난히 쓸쓸해 보이고, 외투 깃을 여미며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계절. 많은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같은 영화를, 같은 음악을, 같은 코드를 떠올린다. 이터널 선샤인, 러브 스토리, 러브 액츄얼리... 그리고 러브 레터.


   더 이상은 아니겠지만 나 어릴 때까지도 국민 일본어라 하면  '오겡끼데스까~'였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패러디도 곧잘 할 만큼 러브레터의 영향은 가까이에 있었다. 오겡끼데스까~ 를 따라 할 줄도 알았고 무슨 뜻인지도 알았지만 정작 영화를 본 적 없던, 이제 막 열일곱이 되었던 나는, 관심 가는 영화 목록을 쭉쭉 써 놓고는 하나씩 보고 제목에 금을 그으며 방학을 빼곡하게 보내고 있었다.


   사실 이 아릿한 첫사랑 영화를 보고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히로코의 입장에서 보면 꼭 사기당한 기분이어서. 그러나 그렇게만 끝내 버리기엔 뭔가 아쉬운 느낌이었다. 두 번, 다시 보니 여자 이츠키가 느꼈을 애틋한 파도가  밀려왔다. 세 번, 다시 보았을 때는 사춘기 감성에 너무 슬퍼 울면서 보기까지 했다. 남자 이츠키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싶어서.


   그리고 그 후로도 이런 계절이 오면 귤 바구니 들고 담요 속으로 주섬주섬 들어가 이 영화를 본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하는 그 감정 선들, 그리고 그 느낌을 깊이 담아 주는 음악.  찾아보니 감독인 이와이 슌지가 소설로도 쓴 것이 있기에 냉큼 구해 읽으며 배경 하나, 연출 하나까지 세심하게 뜯어보기를 (다시 말해 덕질을) 시작했다.



  영화는 히로코(나카야마 미호)가 눈밭에 드러누워 숨을 끝까지 참았다가 몰아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속눈썹이 예쁘다는 생각을 하다가, 몇 번 돌려 보고 나니 이 장면은 참 가슴 아프게 와 닿았다. 설산에서 조난 당해 죽어간 옛 연인의 기분을 그렇게라도, 간접적으로라도 느껴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오프닝의 히로코는 2년 전 죽은 연인 이츠키의 추도식에 가는 길이었다. 영락없이 술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추도식 분위기가 싫었던 이츠키의 어머니가 두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이츠키의 어머니를 태우고 그 집까지 운전해 가게 된다.



   이츠키의 아버지가 떠밀듯 이츠키의 어머니를 차에 밀어 넣고 나면, 히로코의 운전석 옆으로 웬 취객이 갑작스레 등장한다. 표정만 봐도 고주망태라는 걸 알 수 있지만, 얼마나 마셨는지 혀가 벌써 잔뜩 꼬였다. 사실 보는 사람 입장에선 좀 당황스러운 인물 등장이다. 몸 따끈하게 덥히라며 이츠키의 아버지가 정종을 돌리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이츠키 어머니와의 대화를 봐도 취객은 밤에나 생길 것 같은 분위기인데... 그러나 이 취객의 등장은 의외의 복선을 위함이었다. "히로코라고 했지?" 혀 꼬인 소리로 히로코를 확인한 취객은, 이츠키의 아버지와 다른 손님들의 뜯어말리는 손에 끌려가면서도 고래고래 노래를 부른다.


"娘さん、よく聞け~よ、山男にゃ惚~れ~るなよ~"
"아가씨, 잘 들어요! 산(山)의 남자에게는 반하지 마요~"


   영화에서는 멀어지면서 부르는 노래라 잘 들리지 않고, 자막에도 없기 때문에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소설에서  문장을 보고 깜짝 놀라 영화로 확인해 보았다. 대놓고 들렸다면 재미없었을, 감독이 설치해 둔 작은 장치. 이런 걸 발견하는 게 덕질의 묘미 아니겠는가.



  히로코는 그렇게 이츠키의 집으로 가서 이츠키의 중학교 졸업 앨범을 보게 된다. 앨범 맨 뒤에 있는 주소록에서 그의 옛 주소를 몰래 팔목에 적어 둔다. 오타루에 있는 그 집은 이미 국도를 만드느라 헐었다는 어머니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공상에 가까운 생각이라 해도, 조금이라도 제 사랑에 가까이 닿고 싶은 히로코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잘 지내십니까. 저는 잘 지냅니다."라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한 마디를 담아 오타루로 날아간다. 반송되어야 마땅한 편지가 어쩐지 잘 도착하고, 여전히 오타루에 살고 있는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의 "여자"가 그 편지를 받는다. 고베라는 동네에 가본 적도 히로코라는 이름의 친구도 없는 이츠키는 당황하지만, 장난처럼 답장을 보냈다. 잘 지내지만 조금 감기 기운이 있다고. 이런 바보 같은 장난을 친다고 스스로도 웃으면서도.



   그리고 히로코는 첫사랑 하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문제의 편지를 들고 아키바를 찾아간다. 말이 되진 않지맘 그러니까 천국에서 온 편지라고 치자고 배시시 웃으며. 연인을 잊지 못한 히로코 마음을 아는 아키바는 불만스럽다. 남자 이츠키 무척 친하기도 했고, 이츠키가 조난당한 그때 등산을 리드한 것도 그였기에 그간 침묵을 지켜 지만, 이츠키가 죽은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말을 하는 히로코가 원망스럽다.


  소설판으로 보면 유리 공예를 하던 대학 시절 그는 이미 히로코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이츠키는 여자 앞에선  목석같았고, 아키바는 아직 친하지 않아 일 대 일은 부담스러워할 히로코를 만날 핑계로 이츠키를 데리고 나간 거였다. 히로코를 보고서도 처음에는  말이 없었는데 이내 불쑥, 코앞에서 이츠키가 히로코에게 고백할 줄은 몰랐다. 오래 기다린 끝에 이제 좀 가까워진 것 같았는데, 여전히 고인이 되어버린 이츠키만 생각하는 히로코에게 부아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키바는 그 편지의 정체를, 그 미스터리를 어떻게든 추리해내고자 한다. 히로코의 환상을 깨 놓기 위해서라도. 결국 아키바는 히로코 몰래 편지를 보낸다. "당신이 후지이 이츠키임을 증명해라"라고.


   그러는 동안 여자 이츠키 쪽도 이야기할 상대를 찾는다. 도서관 사서로 같이 일하는 친구. (소설에서 이 친구를 묘사해 놓은 부분도 기가 막힌데 영화에서는 시간상 스킵된다.) 아무튼 두 사람은 소싯적 언어 영 공부하면서 시를 탐구하듯이 시어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거기서 느껴지는 죽음을 이야기한다. 자기들도 자기들의 말이 맞았다는 건 몰랐지만. "당신이 후지이 이츠키임을 증명하라"는 말에 어이를 상실한 이츠키는 이제 그만 무시하자고 돌아서려는데, 대단한 친구가 한 마디를 던진다. "가짜 취급을 참겠다는 소리야?"


   그 도발에 이츠키는 결국 민증 사본을 보내며 단호한 한 마디를 손글씨로 덧붙인다. 이것이 증거니, 이제 편지 그만 보내시라고.


   진짜 이츠키에게서 온 편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기묘한 펜팔에 마음을 많이 쏟고 있던 히로코의 마음은 산산조각 난다. 감기는 나았을까, 내가 보낸  감기약은 먹었을까, 글썽거리는 히로코를 보는 아키바의 마음도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 이렇게 해도 깨지지 않는 그 뿌리 깊은 마음에, 아키바는 유리  공예하는 친구의 초청에 응할 겸 기분 전환도 할 겸, 오타루 여행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히로코는 이츠키가 동명이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츠키의 집 앞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여태까지 폐를 끼쳐 죄송하다고, 내가 찾던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동명이인이었다고, 그 사람은 남자인데 2년 전... 히로코는 잠시 고민하다가 2년 전이라는 말에 슥슥 두 줄을 긋고는 미묘한 어조로 그의 죽음을 살짝  덮어놓는다. 그는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조심스러운 편지를 남기고 돌아가는 길.



  히로코는 이츠키를 보았다. 누구도 그 사람이 이츠키라고 말해준 적은 없지만 히로코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연신 자신을 힐끗거리며 닮았다고 말하는 택시 운전수의 말에서,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츠키에게 수작을 거는 그) 우체부가 자신을 이츠키로 착각하고 말을 걸어오는 것에서, 직감에 더해진 복잡한 감정이 히로코의 입에서 흘러나와 이츠키를 불러 세웠다. "후지이 씨...?" 하고.


  열차가 도착한 때에  맞기라도  것인지, 때마침 몰려나온 인파로 인해 이츠키는 히로코를 보지 못했지만 히로코는 모든  보았다. 자신과 너무나 똑같이 닮은 이츠키, 어쩌면 남자 이츠키가 사랑한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뒤편에서 아른거리는 여자 이츠키의 그림자였을지 모르겠다는 사실까지.



   영화 도입에서부터 지속된 감기 기운이 떨어지질 않던 이츠키는 병원 복도에서 깜빡 졸다가 과거가 꼬인 꿈을 꾼다. 아버지가 실려가는 장면이, 그리고 그 이전의... 중학교 시절이. 후지이 이츠키! 하는 간호사의 부름은 비몽사몽 간에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 소리로 오버랩되고, 그 아래 동시에 손을 들어 대답하는 남녀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히로코가 남겨 놓은 편지를 읽고 이츠키는 때마침 떠오른 그 녀석이 아닌지, 편지를 띄운다. 이미 직감한 바가 있는 히로코도 질문을 하나씩 던진다. 그렇게 특이한 펜팔이 시작되었다. 한 남자의 첫사랑과 마지막 연인 사이, 사랑받았지만 몰랐던 사람과 사랑했지만 사랑받았는지 의문이 드는 사람 사이에서.


  같은 반에 성도 이름도 같은 이성 친구가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당황스럽겠지만 동성동명이 우리나라보다 더 흔치 않다는 일본에서, 갓 초딩 딱지 뗀 중1들 사이에서 얼마나 놀림감이 되기 쉬웠겠는가. 출석 번호도 비슷하고 그러다 보니 당번도 같이 해서, 고작 하루 하는 당번 '후지이 이츠키' 이름 두 개가 쓰여 있으면 아이들이 하트와 우산 모양을 그려 놀리는 일도 비일비재. 그러다 보니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하고 대화도 좀처럼 잘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고, 여자 이츠키는 회상한다.


  그러나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엮이지 않는다면 주인공일  없다. 히로코는 넌지시 묻는다. "같은 이름에서 어떤 운명 같은  느낀  아닐까요?",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저런 편지를 쓰는 히로코의 기분은 땠을지. 그런  모르는 여자 이츠키는 찬찬히  기억을 떠올려 본다. 놀림 받고 울던  책상을 걷어차 다른 아이들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나가던 이츠키, 그러나 기어코 친구들의 부정 투표(?)로 같이 도서 위원이 되어 일하게 된 것도. 하얀 커튼 뒤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면서 책을 읽고 있는 남자 이츠키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실제로 여자 이츠키가 얼핏 사라진 것처럼 잘못 보기도 했다. 아마  눈에 위태로워 보이는  그저, 이츠키의 결말을 알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 장면은 그 애틋함과 상관없이 꽤 많은 곳에 풋풋한 소년 클리셰로 심심찮게 등장하게 되었다더라.


  아무튼 기억 속의 남자 이츠키는 아무도 빌려 보지 않을 법한 책의 도서 카드에 자기 이름을 남겨 놓는 장난을 즐긴다. 카드가 꽉 차면 새 카드로 교체하고 이름도 없어지기 때문에, 아무도 빌리지 않는 그런 책의 도서 카드는 좀처럼 바뀌지 않아 이름이 오래 남아 있는 걸 노린 것. 다섯 장을 내밀며 스트레이트 플래시, 를 외치는 은근 장난기도 있는 귀여운 모습이지만 소녀 이츠키에게는 별 대수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열여섯 소녀 눈에는 안 보여도 성인 여성의 노련한 눈에는 보였으니, 히로코는 또 슬쩍 묻는다. "추신. 그가 카드에 남긴 이름이 정말로 그의 이름이었을까요?" 추신이었지만 문득 생각나 적은 말 같다기보다는, 말을 고르고 고르다 추신으로 넘어간 느낌이 드는 질문이다. 그러나 여자 이츠키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 그건 당신의 달콤한 상상일 뿐 현실은 살벌했다고. 아우슈비츠의 아담과 이브라고나 할까.


  이름 때문에 시험지가 뒤바뀌기도 하고, 귀엽지만 위험한 장난을 치기도 하고, 육상부 사건 하며... 이츠키의 기억은 차곡차곡 히로코에게 전달된다. 히로코는 그가 달렸던 운동장을 보고 싶다며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보내고, 여자 이츠키는 덕분에 모처럼 모교를 방문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쓰인 카메라는 SX-70으로 폴라로이드 사에서 나온 모델인데 지금은 단종되어 필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  때뿐 아니라 요즘까지 꾸준히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다른 영화의 소품으로도 심심찮게 쓰이고 있다. 나였어 감성을 클래식하게 그리는 장면에 후지 인스탁스를 소품으로 쓰고 싶진 않을  같다.


  아무튼 모교에서 이츠키는 옛 은사를 만난다. 영화가 나온 1995년 즈음은 도서 카드에서 바코드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던 것 같다. 같은 해 나온 <귀를 기울이면>에도 도서 카드를 바코드로 전환하는 장면과, 도서 카드에서 이름을 보고 설레 하는 주인공이 나오니까. 그리고 도서부원 아이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후지이 이츠키' 카드를 몇십 장이나 찾아내 그 카드 찾기 게임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그건 내가 쓴 게 아니야, 말하다가 아이에게 한 마디 말을 듣는다. "그 카드 쓴 사람이 선배님을 무척 좋아했나 보다"라는. 그건 내 이름이 아니라고 말해보지만 전후상황 모르는 아이들이 이해할 리 없다. 꽃다운 나이 소녀들은 이미 자기들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키득거릴 뿐.


  아무도 읽지 않은 책에 오래오래 남아 있는 너와 나의 이름, 말도 없고 행동도 무심해 보이는 소년의 작은 행동에 잠시 당황하지만 그것도 잠시. 영화 시작부터 영화의 흐름을 따라 계속되어 온 이츠키의 감기 증세는 기어이 심해져서 결국 기절에 이른다. 감기에서 시작된 폐렴으로 이츠키의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엄마도 할아버지도 잔뜩 긴장하지만, 구급차는 올 수 없다는 연락뿐... 결국 이러쿵저러쿵하다가 할아버지는 이츠키를 업고 달린다. 엄마도 뒤따라, 달린다.



   히로코와 아키바는 '불 할아범'의 집으로 간다. 마찬가지로 조난 당시 등산 팀에 있었던 아저씨는 그 죄책감을 잊지 못하고 등산객들에게 길을 일러 주고 돕는 길손잡이로서 오두막에 살고 있다. 저녁을 거나하게 먹고 기분이 좋은 아저씨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는, 아키바가 콧노래로 흥얼거리던 것과 같은 곡. 의아하게 여긴 히로코의 질문에 두 사람은 대답해 준다. 이츠키가 마지막 순간 부르고 있던 노래라고, 더 이상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그 소리만큼은 계속해서 다가왔다고. 그 노래는 이츠키의 마지막 모습이자 유언 같은 노래였다. 요새로 치면 걸그룹이 부를 법한 발랄한 노래라서 조금 의외다. 무뚝뚝해 보이던 소년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듯하여. 영화 속에서도 마츠다 세이코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며 의아해하는 아키바의 대사가 있다. 그러나 가사를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 私の戀は南の風に乘って走るわ!       
-  사랑은 남풍을 타고 움직여요!


 고베와 오타루.


   히로코가 있고 아키바가 있던, 성인이 된 남자 이츠키가 있던 고베에서 남풍을 타고 가면-

   소녀 이츠키가 쭉 살아온 곳, 소년 이츠키가 있던 오타루가 나오기 때문이다.

   즉 남자 이츠키가 마지막까지 부르던 노래는, 여자 이츠키가 사는 그곳을 향한 사랑의 노래였다.


  그래서 영화 도입부 자막에 Northern city, Southern city라는 자막이 깔린 거였다. 지리를 모르는 ( 같은..) 사람이 이츠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음날 히로코는 아키바를 따라 산에 오른다. 이츠키가 어디쯤엔가 묻혀 있을 산을 보기 위해서. 그 유명한 '오겡끼데스까'는 바로 이 장면. 후련해지길 바라며 히로코를 바라보는 아키바의 담백한 미소까지, 소중한 마음이 넘치는 장면이다. 여자 이츠키에게 보냈던 첫 편지에서 이미 드러났지만, 히로코가 남자 이츠키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말은 '잘 지내? 나는 잘 지내'라는 짤막한 안부 인사였다.


  생각해 보면 조금 서글프다. '사랑한다는 흔한 말'이 아닌 안부 인사라는 게. 히로코가 얼마나 이츠키를 사랑했는지 사랑한다는 말보다 오히려 더 잘 담아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 한 마디가 너무나 절절하다. 사랑한다는 내 감정을 외쳐 전하기 급급하기보다는, 그가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고 덧붙여 그가 자기 걱정을 하느라 속을 끓이지도 않기를 바라 안심시켜 주고 싶은 마음. 나의 감정도 상대방의 평안함을 위해 내려놓은, 오롯이 상대를 우선시하는 사랑. 물론 이츠키는 이미 죽었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그런 마음을 전해 보내고 싶은 히로코의 순수하고 올곧은 사랑이 짠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수많은 패러디로 희화화되었지만 그래도 클래스는 영원하다.


  같은 시간, 할아버지와 엄마의 헌신으로 무사히 병원에 도착해 겨우 고비를 넘긴 이츠키도 깨어나서 조용히 그 말을 입내 내듯 되새겨 본다. 잘 지냅니까... 나는, 잘 지냅니다. 같은 얼굴을 한 두 여자의 똑같은 대사가 오버랩되며, 두 가지 세 가지 가닥의 감정 선이 어우러지고 뒤섞이는 이 장면이 내겐 영화의 절정이었다.


  펜팔과 상관없이 회상은 이어진다. 부친상을 당하고 눈속에서 잠자리를 보던 여자 이츠키. 그리고 그런 이츠키를 찾아와 전학을 가게 됐으니 대신 반납해 달라고 남자 이츠키가 건넨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심지어 그 많은 시리즈 중 이 책은 '되찾은 시간' 편. 꼭 이츠키의 상황 같은 책 제목이다.


   괜스레 로맨틱해 보이는 책 제목. 고등학교 때 나는 이 책이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4월 이야기)에도 소품으로 등장하는 걸 보고 한 번 꼭 읽어봐야지 했다가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전공으로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이 책과 찝찝한 재회를 해야 했다. 번역으로 읽는 것보다 모자란 실력으로나마 원어로 더듬더듬 읽는 게 차라리 더 좋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곱 권에 달하는 이 소설을 완독할 일이 없겠구나 생각했다.


  문학 번역의 특성 상 문장을 임의로 뭉턱뭉턱 잘라 문장 수가 바뀌거나 변형하는 게 금기시되어 있는데, 한 문장을 3장씩 치렁치렁 이어가기도 한 프루스트 덕분에, 아무리 번역을 잘 하는 분들이 하셔도 우리말에 담기기엔 너무 정신 사나워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 책을 번역하신 분께 수업을 들었는데, 읽을 때보다도 그분 입에서 말로 들을 때 '이게 이렇게 풍성한 내용이라니' 하고 놀랐다.


  뭐 아무튼 프루스트를 있는 대로 욕하면서 읽다 말다 한 책이지만 <러브레터>에서 소품으로 사용한 게 제목 외에도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 유명한 마들렌 에피소드.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먹는 순간, 마치 종이 공예품이 물 속에서 사르르 풀어지는 것처럼 과거의 기억이 감각을 타고 훅 들어오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며 길이 회자된 장면이다. 러브레터도 과거의 기억이 편지를 매개체로 훅 들어온다는 점에서 엮여드는 느낌이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는 건, 얼마나 애틋한 일인지.


  도서부 소녀들이 들고 온 그 책에 꽂혀 있던 이츠키의 이름, 그리고 뒷면에 그려진 소녀 이츠키의 얼굴. 결국 그 애틋함까지 되살아나고 만 이츠키가 "역시 마음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하지만 사실 이 장면은 역대급 오역이다. 마음이 아프다기보다는 겸연쩍어서, 멋쩍어서 보내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래전 반납해 달라고 책을 전달 받았던 그 날처럼 책을 품에 꼭 끌어안고 코를 훌쩍거리는 이츠키와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보내지 못하겠다”는 대사가 참 여러 사람 심금을 울린 장면이기도 하다. 이런 오역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적어도 <400번의 구타> 같은 어처구니 없는 경우보단 의미있는 오역이라고 생각한다.



  섬세한 장치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재미가 있다. 일례로- 나중에 찾아보다 안 사실이지만 부친 상을 당한 소녀가 본 잠자리는 일종의 상징이라고 한다. 실제로 잠자리는 겨울이 오면 가장 먼저 날개가 바스라지는 곤충이다. 온도 변화에 취약한 날개는 (사람이 잡기만 해도 화상을 입을 정도이기 때문에 잠자리  잡으면  된다고 한다.) 눈밭에서 그렇게 온전한 모양으로 유지될 수 없다. 진작에 파스스 조각이 되어 없어지고 말았을 일이다. 시간이 지나도록 전해지지 못하고 고스란히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첫사랑의 상징이라고 감독이 밝힌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감독에게 꽤나 중요한 상징인지 원작 소설 표지에는 잠자리가 그려져 있다.


   인물들의 감정 선은 따라가기 어렵지 않고 서로의 입장이 달라 하나씩 짚어보는 재미도 있다. 그러다 보면 잔잔하고 은은하게, 그러나 폭풍 같이 몰아치는 감성이 있는 영화다.


   그래서 나는 소녀 이츠키 역을 맡은 사카이 미키의 말간 얼굴을, 그리고 거기에 무심한 듯하면서도 줄곧 꽂혀 있는 소년 이츠키 역 카시와바라 타카시의 시선을 참 좋아했다. 어떻게든 둘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디즈니와 한국 드라마를 먹고 자라 해피엔딩 병이 있던 고등학생 시절) 욕심에 <하쿠센 나가시>라는 96년 드라마도 다운을 받았더랬다. 그 드라마에서도 둘이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대화는 하더라고... 러브레터의 두 이츠키가 마침내 만난 것만 같은, 드라마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감격으로 보았다. (그리고 둘이 헤어지기 전에 재빨리 하차했다.)


  러브레터는 늘 내게 할 말이 많은 영화다. 같은 영화를 본 사람과 영화를 본 후 이런 수다를 떠는 걸 좋아하는 나의, 단순한 내용의 요약본일 뿐 리뷰조차 되지 못하는 글이지만 아무튼 나는 이 영화가 좋으니 그걸로 됐다. 좋아서 좋다고 외치는 걸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사랑한다는 달콤한 고백도, 스킨십도 하나 없는데 감정의 맥이 살아서 뛰고 있다는 게 명백히 느껴지는 영화다. 남주인공은 회상 장면에서만 나올 뿐 등장도 하지 않으며, 두 여주인공 그 누구도 남주인공과 함께 있는 장면이 없는 로맨스 영화라니. 심지어 히로코는 회상 장면에서도 같이 나오지 않고 남자 이츠키를 회상하는 대사만 있다. 그런데 그래서 좋다.


  과연 남자 이츠키가 히로코를 사랑하긴 했을까? 그건 사람마다 답이 다르겠지. 나는 아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서로 다른, 달라서 더 좋은 답이야말로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가 아닐까. 올 겨울에도 귤 바구니를 끼고 러브레터 앞에 앉는다. 나무 사이로 겨울 햇살이 비칠 때 언젠가 내 볼에 스친 햇살의 온도를 그리고, 눈발 속에서 등장인물이 숨을 참거나 기침을 하면 나도 그 눈발의 차가운 기운을 떠올려 보면서... 작은 음악과 소리와 지나가는 행인까지도 마음에 안아 보면서, 등장 인물들의 아릿한 감정선을 따라 또 그 안으로 들어가 본다. 10년째 변치 않는 이 겨울 습관은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래 이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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