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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눈 맞춤

영화 <베일리와 버드> 리뷰

by 선이정

DIRECTOR. 안드레아 아놀드

CAST. 니키야 애덤스, 배리 키오건, 프란츠 로고프스키 외

SYNOPSIS.

“정말 아름답지 않니?” “뭐가요?” “오늘.”

어른이 되기엔 너무 이르고, 아이로 남기엔 세상이 벅찬 열두 살 '베일리'

철없는 아빠 '버그'와 방황하는 오빠 '헌터' 사이에 끼여 지내던 어느 날,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이하고 자유로운 '버드'가 나타난다

그렇게 베일리와 버드는 찰나이지만 영원할 비행을 시작한다


POINT.

✔️ 며칠 째 "정말 너무 아름다운 영화였어..." 하고 있어요. 특히 다면적으로 아름다워 좋았습니다. 복잡한 감정과 관계가 고운 질감과 색감 안에 녹아 있어요.

✔️ 미국 영화비평위원회에서 2024년 최고의 독립 영화 10편에 꼽은 작품

✔️ 누구라도 믿고 볼 수 있는 소지섭 PICK! 뮤지션(?)이 고른 영화 아니랄까봐 음악도 다 좋아요.

✔️ 배우들의 힘이 어마어마해요. 베일리 역할을 맡은 니키야 애덤스는 이 작품이 데뷔작이에요. 캐스팅 이후 배우에 맞춰 대본 작업을 다시 했다네요. 그만큼 살아있는 베일리 캐릭터가 완성되었습니다.

✔️ 배리 키오건도 (늘 그렇듯)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주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버드를 연기한 프란츠 로고프스키가 너무나 압도적이었어요. 아무리 무용을 전공했다지만, 눈빛과 몸짓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쓸 수 있는지. 등장과 동시에 사랑 비슷한 것을 하게 만듭니다. 영국 독립 영화상에서 최우수 조연상을 수상했다네요.

✔️ 보고 나서 마음에 뭉클한 감정이 오래 남아 가시지 않습니다. 베일리와 버드의 눈빛을 아주 오래 생각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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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고 등장인물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그것도 일종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만난 베일리와 버드는 오래 잊지 못할 인물들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당신이 가장 먼저 만날 인물은 베일리이다. 마치 철창 속 같은 길에서, 반쯤 깨진 스마트폰으로도 새들을 촬영하고 있는 베일리. 그가 다소 혼란스럽고 헝클어진 세계에 살고 있음은 금세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배리 키오건이 또 영 속을 모르겠는 얼굴로 연기하는 아빠 '버그'가 곧 본인의 결혼식이라고 딸에게 통보하는 장면에서. 아니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결혼식을 직전에 통보해요... 그리고 대체 누가 스팽글 핑크 호피 점프수트를 입으라고 하나요... 베일리의 반항이 납득 가는 가운데, 베일리가 꾸며 놓은 본인의 공간을 보면 더욱 납득하게 된다. 작은 스티커와 이파리 그림, 새 그림. 그래피티와 외설적인 낙서가 가득한 벽면 한쪽에서 베일리는 본인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영상들을 벽에 비추어 보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을 담고, 다시 돌려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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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영화다. 베일리가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기본적으로 영화다. 직접 찍고 재생하며, 철장과 기차 소리로 제한된 세상에서 전혀 다른 색감과 질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비록 나비를 바라보다가도 몸을 침낭 속에 누에고치처럼 말아 넣어야 하는 현실에 있어도.


유년기에 이미 확고한 취향을 가져버린 존재는 행복하고도 불행하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눈을 가졌기에 행복하지만, 동시에 그토록 취향이 확고해질 만큼 단단한 자아가 무력감 안에 놓이기 쉽기에 불행하다. 영화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이지만, 현실에서는 어른들이 빚어 놓은 '깨진 유리창' 같은 세계에서 비좁은 운신의 폭을 조금씩 넓혀가는 존재. 베일리의 세상에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탐폰 혹은 희망처럼 베일리에게 필요한 것들도, 엘리베이터 벽에나 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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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세상에 버드가 나타난다. 아침 햇살과 함께 나타나서 하루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존재가. 이상하고 아름다운 몸짓과 눈빛으로 다가온 존재가. 베일리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오늘 안에서, 자기에게 허락된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아름다운 장면을 찾아 수집하는 아이니까 버드에게 순식간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가끔은 무력감이 처절하리만큼 깊어지는 유년기를 가졌다는 점에서, 베일리와 버드는 모두 고아들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뿌연 바다 속의 물고기와 뿌연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는 새들처럼 표표히 함께 있다. 둘의 시간을 보고 있노라면 제약 많은 세계에서 스스로의 방법으로 비상하는 법을 배우는 모습처럼 보인다. 누군가의 시각을 상상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 하나로 의기투합한, 여리면서도 강하고 이상하면서도 아름다운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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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베일리와 버드의 관계는 마치 영화와 관객이 함께 추는 부드러운 춤처럼 보였다. 어떤 영화들에게 구조를 받았다고 느꼈던 날들이 있었다. 이상하고 아름답게 다가와서는, 은근하게 곁을 지키고 나를 품어주다 끝내 나를 구하는... 꼭 새 같은 것. 어둠 속에서 한참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그러다 보면 부드럽게 내 안의 무언가를 바꾸어 놓는 것.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심장 소리를 맞추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 적혀 있었겠지만 내 삶에 닿지 않던 문장이 기어코 몸을 입고 나를 찾아와 끌어안는 것. 나와 눈 맞추는 것. 그리고 그 빛을 내 눈에 심어 놓고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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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내겐 영화였다. 그래서 늘 기꺼이 어둠 속에 앉는다. 결국 영화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 눈에 빛이 고일 것을 알기에. 그렇게 눈 맞춘 영화들은 소중하게 담아 두었다가 꺼내 볼 때마다 또 새롭게 나를 위로한다. 베일리에게 버드가 그랬듯이, 이 영화 또한 내게 오래 그렇게 남을 것 같다. 유난히 다정한 눈빛을 가진 영화로, 유난히 다정한 깃털로 나를 품어준 새 한 마리의 기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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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는 10월 29일 개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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