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계의 주인> 리뷰
DIRECTOR. 윤가은
CAST. 서수빈, 장혜진, 김정식, 강채윤, 이재희, 김예창 외
SYNOPSIS.
반장, 모범생, 학교 인싸인 동시에 연애가 가장 큰 관심사인 열여덟 ‘이주인’.
어느 날, 반 친구 ‘수호’가 제안한 서명운동에 전교생이 동참하던 중 오직 ‘주인’만이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며 나 홀로 서명을 거부한다. 어떻게든 설득하려는 ‘수호’와 단호한 ‘주인’의 실랑이가 결국 말싸움으로 번지고, 화가 난 ‘주인’이 아무렇게나 질러버린 한마디가 주변을 혼란에 빠뜨린다.
설상가상, ‘주인’을 추궁하는 익명의 쪽지가 배달되기 시작하는데…….
인싸? 관종? 허언증? 거짓말쟁이? “이주인, 뭐가 진짜 너야?”
POINT.
✔️ 다시 찾아온 윤가은 감독의 마법! 윤가은 감독 신작이라서 아무 정보 없이도 얼른 보고 싶었어요.
✔️ 그냥 아무 정보 없이 보러 가시기를 추천드려요. 대단한 반전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냥 정보 없이 영화를 접하고 천천히 알아가는 시간이 좋아서요. 여기서도 두 말 하지 않으려 합니다.
**포스터 이하의 글에는 영화 내용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꼭 영화를 보신 후에 읽어주세요.
이 영화의 주인공 '주인'은 얼핏 평범한 여고생처럼 보인다. 선생님들께 적당한 애교와 장난으로 무마하며 넘어갈 줄도 알고, 친구들과 장난도 잘 치고 까르르 웃기도 잘하고 남자친구와의 관계에도 적극적인, 한 마디로 밝고 적극적인 성향의 학생. 학교 다닐 때 반에 한 명쯤 있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목소리 크고 웃기고 동작 큰 애.
윤가은 감독의 마법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펼쳐진다. 윤가은 감독 본인도 십대 시절을 한참 전에 지나왔음에도, 어떻게 저렇게 어른들에게 종속되지 않는 아이들만의 세계를 분명히 인지하고 그려낼 수 있는 것일까? 별거 아닌 일로도 웃음을 터뜨리는 친구 간의 농담이나, 어른들이 추측하는 이상으로 대담한 수위까지 올라가지만 어른의 대담함과는 분명히 결이 다른 성적 대화, 무엇 하나도 작위적이지 않다.
윤가은 감독이 그리는 아동/청소년의 세계는 어른들의 존재에 종속되어 있지 않아서 좋다. 십대 여자아이가 갖는 욕망, 에너지, 주변인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사회성 등이 너무나 생동감 있게 펼쳐져 있다. (반례를 생각해 보면 이 지점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십대들의 세계를 그려내겠다는 마음은 있으나 세밀한 관찰력과 충분한 애정을 동반하지 않을 때 나오는 가장 흔하고 게으른 방식, '어설픈 유행어 넣기'를 반례로 들고 싶다.)
그러나 윤가은 감독의 마법은 단지 아동/청소년의 삶 표면만을 잘 구현했다는 뜻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이라는 말 뒤에는 얼마나 많은 슬픔과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는가. 청소년의 삶에도, 더 나아가 유치원 다니는 어린아이의 삶에도 그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사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사회에서 어른들이 너무 쉽게 잊는 사실을 윤가은 감독은 조심스럽게 펼쳐 보인다.
영화는 주인과 주변 인물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처음부터 명확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대략적으로 어떤 계열의 사건이었겠거니, 하는 정도만 느낄 수 있다가 차츰 정보가 취합되면서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느낀다. 누구의 삶에나 비밀한 영역이 있고 그 영역에는 폭력도 사랑도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안에서 우리는 큰 상처를 입기도 하고, 상처를 온전히 해결하지는 못한 채로도 일상을 멋지게 살아갈 수 있으며, 그러다가도 상처가 욱 하고 올라와 괴로워하는 날들도 있다는 걸.
상처 앞에서 인생은 완전히 망가지지도 않고, 그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 하나로 완전히 떠오르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문장은 언제나 단언적인 형태가 되지만 ("큰 상처를 겪으면 뇌가 완전히 변한대" 혹은 "오히려 그런 쪽으로 더 집착하게 되는 경우도 있대" 같은 말들) 그 말들은 온전한 진실을 품을 수 없다. 악의 또는 적의 없는 문장이더라도, 일말의 진실을 품고 있는 말일 때도 마찬가지다.
배운 적 없는 거미줄 모양을 잡아가는 거미처럼, 우리도 상처 없을 수 없는 인생을 어떻게 다루어가는지 각자의 방법을 잡아간다. 더 큰 물 안에 눈물을 비집어 넣는 것이 주인의 방식이었을까. 감정과 함께 고조되는 물 소리를 들으며 영화의 연출력에 감탄하고 함께 울었다. 쉽게 낫는 상처는 없고, 또 가끔은 그래서 어긋나고 삐대다 새로운 상처가 남는다. 모든 마술이 다 성공해도 세상 걱정근심이 사라지는 마술만큼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래도 아무튼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잘.
한동안 '피해자'라는 말 대신 '생존자'라는 말을 쓰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나는 그 말도 영 개운한 느낌은 아니었는데, 물론 피해자라는 단어가 (이 영화의 법정 장면에서 잘 드러나듯) 그 삶의 모든 다채로운 감정들과 사건들까지 피해 하나로 거칠게 묶어 해석하는 느낌이라는 점은 문제이나... 생존자라는 단어에서 오는 비장함 또한 삶의 결들을 잘 포착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서였다. 피해자도 생존자도 아닌 그냥 인간, 이면 안되는 걸까. 피해를 보상 받아야 할 때는 피해자라는 단어를 쓰고, 나의 생존기를 투쟁하듯 말하고 싶을 때는 생존자라는 단어를 쓰고, 그러나 평시에는 그냥 평소의 나를 드러내는 단어들을 그대로 쓰면 안되는 걸까. 막연하게 품고 있던 그런 생각들을, 이 영화는 가장 사려 깊은 마음으로 잘 보여준다.
작은 어린이 누리까지도 각자 모두의 삶에 고민과 비밀이 있다. 서로의 삶에서 미스터리로 보이는 부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 그래서 견디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다. 그 안에는 폭력의 기억도 있지만, 거기에 맞서 나 자신을 또 서로를 지킨 사랑의 기억도 있다.
상처의 측면에서 생각하면 생은 고달프다. 상처는 계속 날 수밖에 없고 그 중에는 영영 낫지 않는 상처도 있음을, 그것이 생의 속성임을 알게 되기까지 유년기는 얼마나 고달프고 지난한 시간을 또 겪어야만 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만이 삶은 아니다. 해인이 주인을 남몰래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켜주고 있던 것처럼. 엄마의 수술실 밖에서 할머니가 괜찮다, 말해주는 그 여상한 말이 사실 아이들에게는 가장 필요했던 것처럼. 또 주인의 친구들처럼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관계는 단절되거나 깊어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
폭력은 집요하다. 폭력이 스키드 마크처럼 쭉 그을려 남긴 상처는 더욱 집요하게 생을 따라온다. 그러나 사랑은 더욱 집요하다. 그래서 방 정리도 못하는 초등학생이 편지를 숨기는 법을 배우고, 술에 의지해 일상을 버티는 사람도 묵묵히 세차장에 몇 번이고 들어간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삶이 망가지지 않았다고, 그 문장을 힘주어 말할 수 있는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은 끝내 새로운 용기를 끌어낸다. 특정되지 않은 누군가, 여전히 상처 안에 있지만 거기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용기를. 그래서 이 영화의 엔딩은 모든 이를 위해 보내는 박수 같았다.
고등학생들이 까르르 웃으며 하교하는 길에 단풍이 너무 아름답게 흐드러진 장면을 부감하는 장면에서, 어쩌면 나는 생의 속성이 이런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슬픔과 상처 안에서도 생은 담담히, 계절의 흐름처럼 길을 간다. 그리고 그 길을 일상의 빛으로 메우는 건 결국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도 유난스럽다고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고 은은한 사랑이라고. 그러므로 사랑이야말로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닐까. 끝내 일방적인 종이 쪽지 너머로도 닿고 마는, 그 씩씩하고 튼튼한 사랑이야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