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영화 <파리, 밤의 여행자들> 리뷰

by 선이정

DIRECTOR. 미카엘 허스

CAST. 샤를로뜨 갱스부르, 키토 라용 리슈테르, 노에이 아비타, 매건 노스맨 외

SYNOPSIS.

이혼 후 두 자녀와 함께 파리에서의 새 출발을 꿈꾸는 ‘엘리자베트’ 즐겨 듣던 심야 라디오의 전화 교환원으로 일하게 된 그는 사연을 통해 만난 소녀 ‘탈룰라’를 집으로 초대한다 자유로운 영혼의 ‘탈룰라’는 가족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러오고 아들 ‘마티아스’와는 묘한 감정을 나누며 가까워진다 서로의 온기를 채워가던 어느 날, ‘탈룰라’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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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본 소감은 어쩐지 누군가에게 띄우는 편지로 담고 싶습니다. 수신자가 없는, 이 도시의 겨울밤에 옷깃을 여미고 있을 누군가에게 라디오 전파처럼 띄우는 편지입니다. 실제로 심야 라디오 방송국이 주요하게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새벽의 라디오 같은, 삶이 띄우는 편지 같은 기분이 들 테니까요.


밤이라는 시간을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시나요? 저는 어릴 때 밤을 꽤나 무서워했던 기억입니다. 그냥 사방이 어둡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온갖 괴담의 시간 배경이 밤이라는 게 무서웠고, 어떤 으스스한 일이든 일어날 것만 같아 무서웠어요. 어둠이 내리면 익숙하던 풍경조차 낯설게 보여 두려웠습니다.


요즘은 좀 다릅니다. 정신없는 하루가 가고 어지간한 일로는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시간, 밤이 비로소 저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에 편안함을 느끼곤 합니다. 딱 내가 켜둔 조명만큼만 어둠을 몰아낸 공간, 내가 켜둔 소리만이 귓가에 와닿는 시간이라 좋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밤이야말로 비로소 온전히 두 다리 뻗을 수 있는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영화 속 엘리자베트에게도 밤은 그런 시간입니다. 비록 1981년이라는 배경이 현재와 많이 다름에도, 삶을 찾아오는 어려움의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혼한 남편은 새로운 인연과 새 집에 들어가 산다는데, 같이 있던 공간에 혼자 남아, 물건들과 아이들과 경제적 부담까지 품는 엘리자베트는 어쩌면 밤을 지탱해 이 시간을 넘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 심야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혼자 안전한 공간에 앉아서도 혼자가 아님을 느낄 수 있는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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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친구 삼아 엘리자베트는 다시 일상을 꾸려 갑니다. 즐겨 듣던 심야 라디오에서 DJ와 사연자의 전화를 연결해 주는 교환원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라디오에서 만난, 갈 곳이 없어 여기저기 전전하며 산다는 소녀 탈룰라를 집으로 데려와 지냅니다. 아들 마티아스가 특히 탈룰라와 가까워지고, 그렇게 가족인 듯 유사가족인 듯 미묘한 온도가 조금씩 올라갑니다.


그 누구도 자기 삶에 편안하게 적응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각자의 삶임에도 조금씩은 부적응자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그 서투르고 조금씩 삐걱거리는 상태들이 오히려 도시에서 잘 안 보이는 작은 별빛들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마음은 덜그럭거리며 삶에 적응할 자리를 찾아갑니다. 담배 연기로 뱉는 한숨에서, 또 가끔은 보고 나서 한참 후에 좋아지고 자꾸 생각나는 영화에서, 또 가끔은 옆에 있는 누군가의 눈길에서. 사랑을 말하거나 혹은 말하지 않는, 눈길에서. 침대에서 편안한 자세를 찾아 몸을 뒤채는 것처럼, 조금씩 삶에 적응하려 애쓰는 가족들의 작은 언행들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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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인물들의 모습은 정말 "파리, 밤의 여행자들"처럼 보입니다. 밤의 도시와 낮의 도시는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는 것만 같아요. 우리는 어쩌면 밤마다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밤이 우리에게 남긴 흔적을 몸과 마음에 품고 새 날을 맞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흔적은 사랑일 수도 상처일 수도 있고, 그걸 덮는 안락함일 수도 있겠죠. 그러니 밤은 결코 홀로일 수 없는, 누군가와 함께인 시간입니다. 가족과, 사랑과, 최소한 나 자신과.


엘리자베트가 일하는 라디오 방송에서는 청취자들을 "여행자les passageurs"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목소리 하나로 연결되어 밤의 어둠을 나눠 덮는 사람들이죠. 인간이란 내 삶 안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만, 또 그래서 서로가 필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꼭 격정적 사랑의 상대가 아니어도, 약간의 미온으로 연결된 사이로도 충분합니다. 이 영화는 그런 온도를 고스란히 가지고 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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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온도가 가장 높았던, 영화에서 가장 따뜻했던 지점이 있습니다. 음악과 달콤한 것들 사이에서, 가족들은 작은 섬처럼 뭉쳐 서로의 숨결과 존재를 느낍니다. 별게 아닌 듯해도 이 장면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삶의 한기가 들 때 온도를 높여줄 겁니다. 어떤 밤에는 이불처럼 덮고 잘 기억이 되어 주겠죠.


보고 있노라면 엘리자베트의 아파트는 마치 '삶'을 은유하는 공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파트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갔을 남편, 생각지 못하게 들어온 탈룰라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내 삶에 들어오고 또 나가죠. 어떤 살마은 매몰차리만큼 힘차게 떨치고 나가고, 또 어떤 사람은 마음 아파하며 마지못해 떠나갈 겁니다. 꿈꿔온 모양대로의 삶이 아닐 때에도 같이 하는 사람들도 그 안에 있죠. 같은 기억을 만들고, 살아가고 만나고 헤어지고, 울기도 웃기도 하고, 사랑하고 다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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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거기 대단한 것은 놓여있지 않을지도 몰라요. 시답잖은 것들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게 삶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게 뭐야 싶을 물건이 또 누군가에게는 나를 지켜줄 상징이 되기도 하죠. 시답잖아도 시덥잖지만은 않은 것. 그게 삶이 아닐까요.


저는 이 영화가 그렇게 잔잔한 온도로 흘러가서 좋았는데, 마치 삶의 파편처럼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영화를 볼 때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기대하고 볼 때도 있지만, 그냥 삶의 한 자락을 잘라 펼쳐 놓았기에 좋은 영화들도 있잖아요. 만약 삶이 끝날 때 주마등처럼 지나간 날들이 눈앞에 스쳐간다면, 기승전결 식의 이야기보다는 이 영화를 더 닮아 있을 것 같아요. 완벽한 해피엔딩이나 절망적 새드엔딩도 아닌, 흘러가는 나날들의 어느 한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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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밤입니다. 공교롭게도 눈 내리는 겨울밤이에요. 어디 계시든 따뜻하게 계시길, 그리고 가끔 스스로가 부적응자처럼 느껴지는 순간과 맞닥뜨린다면, 부적응자 대신 여행자라고 스스로를 다정하게 불러주시길. 그리고 음악이든 라디오든 누군가의 눈길이든, 그 마음 기대며 밤의 안락함을 누릴 무언가가 있기를요. 보고 나서 더 좋아지는 영화, 어쩐지 자꾸 생각나는 영화인 이 영화 또한 겨울밤에 우리의 목소리를 연결해 줄 작품으로 당신에게 띄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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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일은 12월 17일입니다.

*제목은 이상은의 노래 <삶의 여행>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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