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지 않는다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 리뷰

by 선이정

DIRECTOR. 자파르 파나히

CAST. 바히드 모바셰리, 마리암 아프샤리, 에브라힘 아지지, 하디스 파크바텐, 마지드 파나히 외

SYNOPSIS.

어느 날, 나를 지옥으로 이끌던 삐걱 소리가 다시 들렸다.

분명 그놈이다. 하지만 만약에 아니라면?

“그저 사고였을 뿐? 누군가는 그걸 평생 기억해”


*1월 13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 예정이 있습니다.


p.jpeg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은 오프닝 시퀀스부터 흥미롭다. 부부가 탄 자동차가 밤길을 가르고 있는데, 상대쪽 차선의 차 뒤를 개 몇 마리가 맹렬하게 짖으며 뒤따르고 있다. 그리고 마치 지금까지 없던 사람처럼 뒷좌석의 아이가 등장하고, 이어 대화를 통해 뱃속 태아의 존재도 드러난다. 사고가 이어지고, 다친 개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관객에게 다친 개는 보이지 않지만, 자동차 등에 붉게 비춰진 남자의 얼굴만이 보인다.


관객이 보지 못한 광경을 아이는 보았다. 아이 엄마가 "신이 도우셔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고 말할 때, 아이는, 그러니까 다친 존재를 목격했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말이 거짓임을 아는 아이는, 강아지 인형을 끌어안는다. "그저 사고였을 뿐" 다 신의 뜻이라는 엄마의 말에 아이는 대답한다. "개를 죽인 건 아빠잖아. 그게 무슨 신의 뜻이야."


이란에서 맹렬히 시위하다 스러진 사람들, 그들을 향한 폭력을 주도하거나 방임하며 "신의 뜻"이라고 말한 사람들의 존재를 암시하는 듯한 오프닝이다.


2.jpeg


개를 친 남자가 차를 정비소에 맡길 때, 그의 의족 소리에 놀란 사람이 있다. 그는 차량을 따라 미행해 남자의 집을 알아내고 따라다닌다. 남자가 집을 벗어나는 것을 따라가고, 주춤대며 어렵게 길을 건너는 개를 지나치고, 손도끼를 꺼내 들고 남자를 납치한다. 이것도 신의 뜻일까? 그 개의 죽음처럼? 의와 불의에 선을 긋지 않고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간편하게 일축했던 사람들은 본인도 그 논리에 묶인다는 사실을 외면했던 것이다. 자신이 그동안 폭력을 가해온 사람들보다 낮은 구덩이에 빠지는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으므로.


그러나 의족을 찬 남자는 본인은 고문관이었던 적이 없는 무고한 시민이라 말하고, 저 말을 믿어야 할까 고민하던 사람은 그를 다시 차 트렁크에 싣는다. 가해자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핸 그의 여정이 시작된다. 트렁크에 과거의 상처를 실은 채로.


5.jpeg


그렇게 시작되는 우여곡절의 로드무비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상처를 비춘다. 공통점이 있다면 상처 이후에도 사람들은 살아간다는 것이다. 화요일마다 서점에 앉아있고, 결혼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그러나 상처들은 어딘가에 남아있다. 허리를 부여잡고 다니는 사람에게만 남아있는 게 아니다.


어떤 이들은 확실히 알고 싶어하고, 어떤 이들은 과거를 묻은 채 오늘을 마저 살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이야기를 앞으로 전개시키는 건 결국 이야기를 매듭짓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힘이다. 과거를 잊지 않는 사람들, 그 문제를 그냥 침묵으로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지가 시간을 앞으로 이끈다는 점은 현실과 같다.


물론 이는 결연하고 멋진 이야기라기보다, 슬픈 이야기다. 다 잊고 훌훌 털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건 쉽지 않다. 여전히 과거의 상처는 짙다. 다 묶어놓고 가둬 놓아 상대의 기동성을 다 떨어뜨린 채로도 이들은 눈 가린 자 앞에서 목소리 내기를 삼간다. 피해자들이 눈에 불을 켠 반응을 하는 것만 봐도, 그 시절 그들이 당한 일의 광기가 가늠된다.


4.jpeg


이들의 조심성은 상처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 현실이 온전히 괜찮아지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간호사며 경찰이며, 가는 곳마다 뇌물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 나라 전체가 얼마나 취약한지 느낄 수 있다. 아직 정의가 회복되지 않은 나라에서, 피해자들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0.jpeg


이야기의 시작점이었던 들판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 세트를 닮았다. 이들은 정말로 나무 아래 앉아서 고도 비슷한 것을 기다린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기다림은 끝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나저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올까? 왔을까?


오래 전의 나는 늘 고도가 올 거라고 믿는 쪽이었다. 비록 순식간의 비극이 부자와 하인을 쓸고 갔어도, 두 사람의 기다림이 끝없어 보이고 실없어 보여도, 언젠가 반드시 고도는 온다고 믿는 쪽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고도가 오는 동시에 오지 않는다고도 생각한다. '내일'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왔을 때는 반드시 '오늘'이 되어 있듯이, 그러므로 내일이라는 시간 안에 거하는 건 영영 불가능하듯이. 과연 이들이 기다리는 시간은 현재가 되어 와 줄까?


1.jpeg


그러나 등장인물들, 피해자라고 불렸고 생존자라고 불리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영원히 고도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 세트의 나무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다. 대신 이들은 자기다운 삶을 산다. 그 와중에도 태어난 생명을 거두고, 바보 소리를 듣던 생존자는 자기 카드로 수술비를 내고 가해자의 혈육을 먹인다. 아이가 태어났다고 과자를 돌리는 전통을 따른다.


절멸, 을 말하며 아이와 임산부까지 죽이던 사람들. 그들과 같아질 수 없어서. 상처의 한가운데에서 피곤한 하루가 흘러갔음에도 새로 결혼하는 부부는 축하를 받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축복을 받는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수천 수만의 고통이 얽힌 세상에서도.


수많은 개인의 삶에 생채기를 남긴 역사를 두고 정의와 단죄를 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 영화는 잘 보여준다. 그건 어쩌면 고도처럼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온다 해도 우리가 생각한 모양은 아닐 것이다. 그 고도는 아마 백마 탄 영웅이나 장군의 모습이 아니라, 아픈 허리를 부여잡아 바보 소리를 듣는 사람의 모습일지 모른다. 아무튼 상관없다. 이들은 고도를 기다리지 않고 일어나 뚜벅뚜벅 자기 발걸음을 걸을 테니까.


안전한 길은 아니다. 더 큰 트라우마, 더 위험한 상황이 그들을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 또한 고도의 아이러니. 기다리기만 하면 고도는 오지 않는다, 절대로.


그건 평화와 닮았다. 평화는 기다리기만 하는 자들에게 오지 않는다. 목 놓아 외치고 찾아다니는 자들의 땅에 임한다. 평화를 외치는 일이 아무리 무용해 보여도, 아무리 바보스러워 보여도- 평화를 외치지 않는 이들만 득시글거리는 세상에 살고 싶지는 않은 이유다. 개를 보면 차를 멈춰 서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새 생명이 태어나면 과자를 나누는 세상에 살고 싶다. 설령 아직은 너무 평화가 요원해서, 그 순간에조차 적당히 '삥 뜯기는' 세상일지라도.


dir.jpg


<그저 사고였을 뿐>으로 칸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받고, 10월에 부산에도 찾아왔던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또 다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오스카 캠페인 중에 내려진 선고였고, 2025년 12월의 초입에 들은 뉴스였다. 이란 출신 감독들의 상황을 미루어 보면 망명도 가능한 선택지였지만...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이란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이란이 겪는 어려움은 일시적인 시련일 뿐이라고, 자기가 숨쉬고 살아가고 창작할 곳은 이란이라고.


고도를 기다리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감독의 행보를 보며, 영화 속 인물들에게 좀더 평온한 내일이 오길 희망하게 된다. 물론 이 생각 또한 마음에만 둔다면 그런 날은 임하지 않을 것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무사를 빈다. 누구도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눙칠 수 없도록, 이야기를 계속하고 주시하는 것. 멀리 있는 우리가 평화를 외칠 수 있는 방법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땅의 상처를 마시는 삶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