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하고 수고로운 일상의 향기

영화 <퍼펙트 데이즈> 리뷰

by 선이정

DIRECTOR. 빔 벤더스

CAST. 야쿠쇼 코지 외

SYNOPSIS.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 ‘히라야마’는 매일 반복되지만 충만한 일상을 살아간다. 오늘도 그는 카세트 테이프로 올드 팝을 듣고, 필름 카메라로 나무 사이에 비치는 햇살을 찍고, 자전거를 타고 단골 식당에 가서 술 한잔을 마시고, 헌책방에서 산 소설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이가 소원한 조카가 찾아오면서 그의 반복되는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긴다.


pp.jpeg


고백 하나 하고 시작하자. 나에게는 오래된 것들, 이 세대에 구식으로 불리는 것들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런 사람 한둘인가 싶긴 하지만, 취향을 가식에 가깝게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예정이다. 셀프 주입식 취향이랄까.


그렇게 나는 사각사각 연필을 즐기기보다 연필을 즐기는 사람에 대한 동경으로 연필을 수십 자루 사들였고, LP 플레이어도 없이 LP 판을 샀으며 (잘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이트 컬러반 한정판 러브레터 OST 앨범이 나오는 바람에... 추가 제작은 기약할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습니다.), 뭐든지 그 친구가 하면 멋져 보이는 그런 친구를 따라 필름카메라를 처음 산 게 고3 때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 뭉툭해서 싫다고 안 쓰던 연필을, 어디선가 '시를 쓰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도구가 연필'이라는 말을 듣고 시도 안 쓰는 주제에 사기 시작했으며... 시는 여태 쓴 적이 없다. 대신 필름카메라 따라 샀던 그 친구를 따라서 키보드나 하나 더 샀을 뿐이다. 음악? 모든 현대인이 그렇듯 뮤직이즈마이라이프 입니다만... 막귀에, 취향은 잡동사니 그 자체다. 분위기를 위해 음악을 세심하게 고르는 귀찮은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거 끝내주게 잘하는 사람들 유튜브에 많으니까.


5.jpeg


다시 말해 나는...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 같은 삶에 대한 동경이 있다. 나갈 준비를 하는 고요하고 평이한 아침의 시간은 정갈해 보인다. 문을 열고 아직 희뿌연 하늘을 보며 살짝 웃는 그 표정이 하루를 특별해 보이게 만든다. 트레이에서 동전 몇 개를 챙겨 아침마다 뽑아 마시는 캔 커피, 오늘의 카세트테이프를 고르는 일... 그런 작은 행복이 결코 작지 않음을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한다.


히라야마의 하루를 곁에서 바라보는 듯한 이 영화의 초반은, 별스럽지 않다면 별스럽지 않은데 그래서 참 좋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 보면 새로운 만남도 있고, 기분 나쁜 시선도 있고... 조금도 모험처럼 보이는 면이 없는 그 단정한 일상은, 그럼으로써 오히려 모험처럼 보인다,.


3.jpeg


히라야마의 하루는 '유용한' 노동과 '무용한' 취향의 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꼼꼼하게 성심성의껏 일하고, 또 자기 취향을 꼼꼼하게 돌본다. 필름 카메라로 나무 사이 햇살을 찍는 것, 갓 자란 단풍나무의 아주 여린 잎을 화분에 심는 것, 포크너를 읽는 것, 즐겨 찾는 듯한 식당에서 한 잔 기울이는 것... 그 사소하고 무용한 행위들이 일상에 어떤 감칠맛을 더하는지, 영화는 오래 끓여 정성껏 만든 음식 한 상처럼 맛 보여 준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건 분명 노동(소득)이지만, 그 기둥이 너무 삐걱거리지 않도록 기름칠을 하는 건 취향인지 모른다. 무용한 행위들은 이렇게, 무용함으로써 유용해진다. 다만 이는 그 밀도가 너무 높지 않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노동이 되면 필연적으로 높아지는 밀도를, 취향의 세계에서는 적절하게 조정할 수가 있다. 그렇게 영화가 시작되고 삼십 분 정도, 히라야마의 하루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다 보면, 짧은 꿈이 지나가고, 또 하루가 간다.


8.jpeg


물 표면이 일렁이듯 보이는 그의 꿈은 우리에게 많은 걸 보여주지 않는다. 히라야마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도 영화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조카와, 그로 인해 관객 앞에 드러난 그의 가족사에 무언가 있겠거니 하는 정도의 무게다. 슴슴한 일상에 더해진 친밀한 존재는, 온기만큼이나 상실감을 준다. 밀도를 적절히 조절할 수도 없고, 책처럼 덮으면 그만일 수도 없는, 인간의 존재감. 눈물로든 미소로든 그저 얼굴에 번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는 인간관계의 무게.


4.jpeg


일견 씁쓸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삶이란 이것들의 반복인지도 모른다. 일, 휴식, 가까운 사람, 먼 사람, 자연, 모르는 사람, 취미, 매일의 루틴... 이런 것들이 뒤섞여 기쁨과 슬픔으로 삶에 잔잔하게 번진다. 작은 단풍잎처럼, 나무 사이 햇살처럼.


그리고 이 속성은 변치 않을 것이다. 물론 삶의 모양은 세월에 따라 달라져 간다.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던 사람이 키오스크 앞에서 멍해지기도 하고, 스마트폰을 쥐고 태어난 아이들이 필름카메라 사용법을 배우듯이. 돌고 도는 듯도, 나아가는 듯도... 보이면서 우리의 도구들은 달라진다. 그러나 삶 자체의 속성은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다.


조카는 카세트 꽂는 방향을 모르고, 히라야마는 스포티파이가 어플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 둘 다 밴 모리슨의 음악이 좋다고 생각하듯이. 그거면 되는 거 아닐까. 본질은 그대로 같은 거니까.


2.jpeg


다만 너무 모든 게 바쁘고 매끈하게 흘러가는 현대 사회에서, 구태여 무용함으로써 유용한 히라야마의 일상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건 어쩔 수 없이 지금 가장 부재한 것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자기 취향으로, 억지로 힘줘서가 아니라 (나처럼 동경으로 지어내서가 아니라) 더없이 자연스럽게 채우고 있다는 것. 카세트의 소리, 필름의 노이즈, 그런 것들로 과거의 상념을 반추하고 있기에.


어쩌면 물성을 가진 도구들, 지금 시대에 역행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구태여' 정성을 들여야 하는 도구들의 특징은 그게 아닐까? 인간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 유려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구멍을 뚫고, 과거의 상념을 반추할 수 있도록 인간을 그 구멍에 잠시 빠뜨리는 것.


124분 동안 똑같은 자세로 앉아 가만히 스크린을 바라보게 하는 영화도 어쩌면 그런 것 같다. 은막 위에 펼쳐지는 꿈과 현실을 계속 바라보는 인간들에게, 이 영화는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도를 기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