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통령의 케이크> 리뷰
DIRECTOR. 하산 하디
CAST. 바닌 아흐메드 나예프, 사자드 모하메드 카셈, 와히드 타벳 크레이밧, 라힘 알하즈 외
PROGRAM NOTE.
<대통령의 케이크>는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자극한다. 칸영화제에 초청된 최초의 이라크 영화로, 황금카메라상과 감독주간 관객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사담 후세인의 강압적인 철권통치 아래 놓였던 1990년대 이라크. 9살 소녀 라미아는 나이 든 할머니와 단둘이 힘겹게 살아가지만, 반에서 1등을 차지하는 영리한 학생이다. 전쟁과 그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로 경제는 무너졌지만, 설상가상으로 학교 선생님은 라미아에게 곧 다가올 대통령의 생일을 맞아 케이크를 만들어오라고 지시한다. 아역을 포함한 비전문 배우들의 진심 어린 연기는 기적 같은 이야기에 사실감을 더해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기쁨과 슬픔을 절제된 연출로 풀어낸 하산 하디 감독의 결정적인 마지막 장면은 관객의 기억에 긴 잔상을 남길 것이다. (박성호, 2025년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상자료원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에 1/17 상영이 있습니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유엔 안보리는 그 침공을 규탄하며 이라크에 대한 전면적인 무역/금융 제재를 결정했다. 제재의 목적은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는 것, 대량살상무기를 폐기하는 것이었지만... 언제나 이런 제재 속에서도 독재자는 어떻게는 무사할 길을 찾고 민간인의 삶에 갖은 고통과 부족이 찾아온다. 당시의 제재는 강도가 매우 높아, 석유 판매가 금지되면서 이라크로서는 외화를 벌어들일 방법도 없는 상황이었고, 의료용품과 인도주의적 상황의 식량을 제외한 모든 수출입이 금지됐다. 깨끗한 식수도 영양가 있는 식사도 구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사망했다.
대부분의 국제 문제가 그렇듯, 이런 상황에는 수많은 행위자(actor)가 있고 그중 단일한 존재가 '악의 축'인 경우보다는 여기도 저기도 책임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본적으로는 사담 후세인이라는 독재자의 존재감이 가장 등등하지만, 영화는 어린 소녀 라미아의 여정을 통해 이 시대의 주요 행위자들을 통찰해 보여준다. 거기에는 거대한 독재자뿐만 아니라 그 체재에 침묵하고 오히려 동조한 일반인들의 '평범한', 아주 빤한 악도 있다. 반대로 그 어려운 가운데도 친절함을 끝내 버리지 못한 사람들의 다정함도 있다.
영화의 배경은 90년대 이라크, 1979년부터 대통령 자리에 올라 있던 사담 후세인의 생일 이틀 전이다. 국제사회의 역대급 제재가 계속되어 서민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지는 상황에서도 그는 온 국민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작달막한 제리 캔 하나의 물을 겨우 채워 그걸로 생활하는데, 그것조차 사담 후세인의 "은혜"라는 말을 숱하게 듣고 또 반복해서 말해야만 한다. 독재자의 사회는 결코 물자의 부족만으로 오지 않는다. 벽에도 귀가 있다.
아이들도 그걸 너무 빨리 알아버렸다. 대통령이 되면 온 세상 케이크를 다 먹을 수 있어서, 온 세상 콜라를 다 마실 수 있어서 좋겠다는 말이나 할 만큼 아직 어린아이들임에도, 학교에 가면 "피와 영혼을 바쳐 희생하겠습니다!" 하고 대통령을 위한 구호를 외쳐야만 하는 사회 현실을 느끼고 있다.
영화에서 사담 후세인은 말이 없다. 그는 단지 존재할 뿐이다. 벽화로, 길거리를 행진하는 사람들이 치켜든 등신대로... 라미아가 가는 모든 곳에 그는 존재하고 있다. 거대한 악의 축, 독재자의 존재란 이런 것이다. 살면서 그와 말 한 번 섞을 일이 없지만 이 거대한 악은 미시적인 일반인의 삶에 계속해서 스미고 영향을 미친다. 정치 체제가, 중요한 공직이, 어떤 위치가... 일반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는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상황을 진전시키고 주인공 라미아에게 구체적인 시련을 부여하는 것은 독재자 후세인의 손이 아닌, 그가 만든 체제를 힘입어 제 배를 불리는 존재다. 체제의 부역자라고도 할 수 있는, 스스로 군인이라고 말하는 학교 교사다. 사소하게는 라미아의 가방에 있던 사과 하나를 훔쳐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는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여 아이들에게 뽑기를 시켜 과일이나 케이크 등을 가져올 담당을 정하게 한다. 한 학급이 다 같이 나누어 먹을 것은, 당연히 아니다.
여기에 당첨됐다는 게 소녀 라미아의 불행이자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세간살이를 팔아 어떻게든 해볼 생각으로 라미아를 데리고 할머니는 시내에 가고, 그 과정에서 할머니와 헤어지면서 라미아 혼자만의 여정이 시작된다. 한 축은 할머니의 손녀 찾기, 다른 한 축은 라미아의 케이크 재료 찾기. 양갈래로 나뉜 이 로드무비는 그때부터 당시 이라크 골목골목의 상황을 하나하나 목격하게 해 준다.
벽에도 귀가 있는 나라에서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신은 관대하시도다"라고 말하지만, 신은 그럴지 몰라도 이 나라의 꼴은 그렇지 않다. 라미아가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불친절한 사람, 악독한 사람, 음흉한 사람, 각양각색의 악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가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모른다. 체제의 부역자까지는 아니니까. 그러나 담담히 비추어지는 이들의 모습에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그렇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냥 악다구니 판에서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음흉하게 구는 면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그저 어쩔 수 없어서 방관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꼭 이 정도일 필요는 없었던 동조자였다. 영화는 거대한 독재자가 만든 거대한 시스템이, 과연 어떤 혈관을 타고 일반인의 삶을 더 짓뭉개지는지를 보여준다. 그 모세혈관에는 수많은 동조자들이 와글와글 악다구니 판을 만들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라미아와 할머니를 시내까지 태워 준 우체부 아저씨는 말할 것도 없고, 크고 작은 다정함으로 라미아를 대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또한 녹록하지 않은 상황 속에 놓여 있지만 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 물어보기도 하며 무엇보다 아이를 보호한다.
짧게 스쳐가는 인물이지만, 식당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라미아의 손을 잡아준 여자가 있었다.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는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톡 쏘아붙이며 거절해야 할 만큼, 그 또한 피곤한 일들과 음흉한 욕구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는 노래가 시작되면 이내 웃으며 라미아를 가까이 불러 손을 잡아준다. 그건 당장 라미아의 배를 채워주는 것도, 라미아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손을 잡고 웃어주는 작은 친절과 다정함에도 의미가 있음을,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손을 잡고 박자를 타는 여자와 라미아가 식당 벽의 거울에 비추고, 그 옆에는 사담 후세인의 초상화 같은 것이 먼지 아래 빛바랜 채로 걸려 있다. 아무리 선명한 색채로 그의 초상을 그리고, 아무리 화려한 장식으로 그의 사진을 꾸며도, 그건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거울에 비추는 라미아와 여자는, 아주 작은 친절과 작은 미소 밖에는 주고받은 게 없는 두 여자는, 살아 생생하게 빛 속을 움직이고 있다.
후세인의 초상화를 치켜든 사람들이든, 부시의 초상을 태우는 사람들이든, 후세인과 부시 그 본인들이든... 이들은 라미아가 위기를 맞을 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단을 만든 수많은 행위자들이다. 그러나 라미아의 손을 붙잡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있다. 무수한 선악의 얼굴들이 모자이크처럼 점점을 이루는 모습을 영화가 조망하고 나면, 영화가 그 선과 악의 평범성 사이에서 가장 공들여 바라보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그건 사랑의 얼굴이다. 길가메시의 시구처럼 맑은 물에 비친 사랑의 얼굴, 그리고 눈싸움을 하면서 지켜본 상대의 얼굴. (눈싸움은 합법적(?)으로 상대의 얼굴과 거기서 풍기는 마음을 한참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나 사랑에 가까운 행위인지.) 결국 남는 건 사랑의 얼굴이다.
폭력적인 정치 체제 안에서 상처받기 쉬운 개인이지만, 그 사랑의 얼굴에 힘입어 닭 한 마리 안은 소녀가 골목골목을 헤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여정은 과연 얼마나 더 오래 흘러갈 수 있을까. 이 눈물은 눈싸움 때문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온전히 사랑의 얼굴에만 거할 수 없어서 처절한 세상을, 거울 속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보다 딱딱한 등신대나 초상 속 악의 존재가 더 부각되어 슬픈 세상을, 영화는 직접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선명하게 조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