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영화 <노 어더 랜드> 리뷰

by 선이정

DIRECTOR. 바셀 아드라, 함단 발랄, 유발 아브라함, 레이첼 졸

CAST. 바셀 아드라, 유발 아브라함 외

SYNOPSIS.

팔레스타인 활동가 바젤 아드라는 이스라엘 점령 아래 파괴되어 가는 마을의 현실을 카메라로 기록해 왔다. 그러던 중 팔레스타인을 취재하러 온 젊은 이스라엘 저널리스트 유발을 만나고, 두 사람은 추방에 맞서 함께 싸우며 점점 가까워진다. 잔혹한 군사 점령 아래 살아가는 바젤과, 제약 없이 자유로운 유발. 그들의 복잡한 유대는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극단적인 불평등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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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감독으로 올라간 이름 4개는 각각 팔레스타인계 2명과 이스라엘계 2인의 이름이다. 이 이름들이 한 자리에 놓인 영화라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한데, 오랜 집요함과 강인한 의지로 현실을 잘 담아낸 좋은 다큐멘터리 작품이기도 하다. 결국 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면 다큐멘터리상을 받으며 더욱 알려진다. 그 후, 감독 중 한 명은 납치를 당한다. 납치된 장소는 무려 자택. 여러 명이 자행한 불법 침입과 구타는 감독을 억지로 끌고 가 감금하는 데까지 이른다. 다소 불안한 전개이지만 감독은 다행히 살아남았다. 영화가 이미 유명해졌기 때문에 감독 한 명이 납치 감금 구타를 당했다는 외신 보도가 짜하게 난 것이다. 범인들은 서둘러 감독을 풀어주었다.


나는 이 문단에서 감독과 범인들의 국적 혹은 민족을 적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숨겨진 주어를 꺼내 읽었을 것이다. 문장에 없어도 현실에 있으면 읽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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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들은 어쩌다 만나게 되었나. <노 어더 랜드>라는 영화는 '마사페르 야타'라는 지역의 수난사를 배경으로 만난 청년들의 이야기이다. 마사페르 야타는 팔레스타인계 주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 십여 개가 있는 지역이다. 한때는 그냥 평범하게 사람 사는 동네였겠으나, 1967년 이후 이스라엘 점령 구역이 되면서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 곳이다. 1970년대부터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군사 지역으로 지정했다. 이 지정은 현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추방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아리엘 샤론 당시 총리가 명시적으로 밝힌 내각 회의록이 대놓고 남아있다. 1981년의 회의록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스라엘 점령 이전에도 해당 지역에 거주했다는 증거가 있다며 법원에 항소했지만, 이스라엘 대법원이었다. 이스라엘 당국은 계속해서 마을 주민들의 거주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군 훈련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법대로 집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마을을 조금씩 부순다. 1967년 전쟁 이후 단일 추방 건으로는 최대 규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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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중 바젤은 이 지역 출신이다. 납치당했던 감독이 바로 그다. 아버지도 활동가였고 자신도 그렇다. 차별이 공기처럼 당연한 곳,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는 힘이 작용하는 곳에서 자란 아이는 그 반작용을 먹고 클 수밖에 없다. 어린 나이부터 카메라를 들고, 이스라엘이 마을에 저지르는 행위들을 똑똑히 기록하며 그는 카메라를 총처럼 휘두르고 자랐다. 그게 그의 투쟁이었다. 카메라라는 도구는 그렇게 이곳에서 평이하지 않은 무기가 된다.


영화를 보면 이스라엘 군인들도 카메라를 무기로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젤을 경계하고 그의 카메라를 빼앗으려 함은 물론, 그쪽에서 바젤을 비롯한 주민들을 촬영하기도 한다. 나 지금 너 찍고 있어, 하고 CCTV처럼, 마치 물증을 남기듯이. 현대 사회의 전쟁은 미사일과 총으로도 하지만, 기억과 기록으로도 한다.


그 집요한 기록을 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힌다. 물론 목적을 대놓고 명시한 공식 자료가 남아있기도 하지만, 정말 군 훈련지로 쓰기 위한 생각이라면 단번에 공간을 비울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 속 이스라엘 군인들은 한 주에 한 집씩만 부수고 간다. 그리고 올 때마다 인프라를 하나씩 부순다. 송전탑을 꺾어버리고, 궁여지책으로 쓰는 발전기도 빼앗아 가고, 우물에 시멘트를 붓고, 아이들 놀이터를 부수고, 막아서는 사람에게 서슴없이 총을 쏜다. 이것은 단순히 공간을 비우기 위함이 아닌, 그 공간 위의 사람 피를 말려 절망과 고통으로 몰아넣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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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히고 분노가 치솟는다. 이 마을의 우물을 판 건 아니지만... NGO에서 일하면서, 세계 곳곳의 식수시설 설치하고 학교 짓고 아이들에게 생리대 나눠주는 일들에 마음 끓이며 수년을 살았는데, 그 모든 일에 역행하는 행동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화가 난 장면은 버젓이 아이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 군인들이 득시글득시글 몰려가는 장면이었다. 어떻게 감히 학교에 이런 짓을 해. 애들 글자 배우고 숫자 배우는 곳에서 어떻게 감히 그래. 부들부들 화가 났다.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이스라엘 주민들의 눈을 피해 밤에 공사를 하면서 어렵게 지은 학교가 부서지는 모습을, 우리 학교가 부서지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스크린 밖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에 비해, 스크린 속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괴로움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초연하다. 그 초연함이 더 기가 막혔다. 날 때부터 차별을 공기처럼 마신 바젤과 이들도 마찬가지다. 물에서 태어나 아가미를 가진 존재들처럼, 이들은 차별 속에서 자랐기에 삶과 투쟁의 호흡을 길게 가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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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군인들 앞에서 이들은 구구절절 맞는 말로 맞선다. "우리 땅인데 이방인 취급받아요" 하는 서글픔도. "고작 놀이터에 이 대군을 끌고 와? 우린 놀이터도 있으면 안 돼?" 하고 따져 묻는 말도. "내가 당신 아이들한테 이런 짓을 하겠어?" 하고 묻는 인간성도. "우리에게 다른 땅은 없어요 [No other land]. 우리 땅이니까 참고 견디는 거죠." 하며 삶이 곧 투쟁임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초연한 태도도.


이 상황을 담고 싶어서, 문제의식을 느끼며 찾아온 이스라엘 사람 유발에게는 이런 아가미가 없다. 그래서 그는 조회수가 적게 나오면 초조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 수십 년 간 지속된 싸움임을 피부로 아는 바젤은 이 속도가 빠를 수 없음을 너무 자연히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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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과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시위를 이어나간다. 바젤은 계속해서 세상과 연결되며 이 소식을 알리고자 하고, 유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계속한다. 다른 공기를 먹고 자란 두 사람이지만, 한 명은 자기 땅을 떠날 수 없고 자동차도 빼앗기고 그저 존재하는 것조차 불법인 존재인 반면 다른 한 명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 가끔 그 차이 앞에 마음이 복잡 미묘해지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의 우정은 평범한 여느 이십 대 청년들의 우정이다.


너 전공 살릴 거야? (못 살릴 거 같은데...) 너 결혼할 마음 있어? (못할 거 같은데...) 야 우리 여기 뜰까? (몰디브 어때...) 같은 말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지극히 여상한 대화들이다. 총탄의 종류를 곧바로 구별해 내고, 군대와 불도저를 매일 같이 보고, 쫓기고 매 맞고 빼앗기는 것이 일상이 된 이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일상이 있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유발이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탄 바젤이 정말 졸려서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얼굴로, 배터리가 방전되었다고 말할 때 유발이 자도 된다고, 쉬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장면이다. 둘 사이에 쌓인 신뢰와 애정이, 거기서 묻어나는 편안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이라서 그렇다. 평범한 일들이 평범하지 않게 투사되는 곳에서도, 우정은 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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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내게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사람들의 피를 말리는 집요한 폭력, 그건 내게 지극히 비일상적이고 그래서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들,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바라보는 마음들도 있었다. 그 익숙한 마음은 우리가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환기한다.


한편으로는 이 문제에 대해 목소리 낼 때 조심스럽던 마음이 사그라든다. 여차하면 '반유대주의'의 탈을 씌우기 때문에, 실제로 반유대주의가 워낙 심각한 문제였던 것도 맞기에 조금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는데, 유대인 유발에게도 반유대주의라고 화를 내는 걸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그 말도 이젠 무기였군. 무기로 휘두를 수 있다는 건 상처가 아니라는 뜻이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의 이 폭력에 동조하고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홀로코스트조차 상처가 아니다. 그것이 상처였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동차를 죄다 빼앗고 남은 몇 안 되는 차량에 다른 색깔 표지판을 붙이라고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표시로 노란 별을 붙이고 다녀야만 했던, 차별이라는 상처의 기억은 이들에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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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속에서는 상처 없이 매끈한 삶을 동경하게 된다. 그러나 마을을 부순 자리에 알 박기 하듯 들어온 이스라엘계 정착민들의 가린 얼굴에서, 상처도 부끄러움도 없는 자의 초상은 참으로 끔찍하다는 사실만이 읽힌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비인간화해 왔지만, 정작 그 끝에 인간성이 말살된 얼굴은 과연 누구의 얼굴인가. 그런 얼굴을 가질 바엔, 차라리 상처 속에 같이 남겠다.


카메라가 총처럼 기능하는데 그 기록물을 보는 사람이 생채기를 피할 길은 없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보고 나서도 관객의 마음은 편하지 않을 것이다. 뭐 저런 일이 다 있나 어이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 그럼에도 이 모든 일이 남 일처럼 느껴지는 스스로의 무감함이 마음에 남을 수도 있다. 무엇이 남아도, 남으면 된 것이다. 상처 없이 매끈할 수 없는 자리에 기꺼이 자신을 앉혔다면, 그래서 이 생채기 안에 같이 있었다면 그걸로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내가 이 생채기 속에 같이 선 마음은, 영화를 보고 떠오른 어떤 시구로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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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 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夕陽)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歎息)을 얻으면서.

동(東)이랴, 남북(南北)이랴,
내 몸은 떠나가니, 볼지어다.
희망(希望)의 반짝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 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 김소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모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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