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햄넷> 리뷰
DIRECTOR. 클로이 자오
CAST. 제시 버클리, 폴 메스칼 외
SYNOPSIS.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온 ‘아녜스’는 마을에 새로 온 교사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이룬다. 어느 날, 두 사람에게 예기치 못한 비극이 찾아오고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참혹한 상실의 고통 속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와 비극을 극복하게 되는데…
세기의 비극 ‘햄릿’ 뒤에 숨겨진 가장 깊은 삶의 기록
사랑이란 뭘까. 잘 모르지만 고체보다는 액체, 액체보다는 기체에 가까울 것 같다. 고요하게 전파되는 속성을 품고 있으므로. 매와 함께 등장한 여자와, 숲에서 돌아오는 여자를 맞이하는 남자가 다짜고짜 나타난 영화 초입, 우리는 두 사람의 신상정보를 아무것도 모르지만 두 사람 사이에 호감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감정이 번지는 것을 본다. 우리만 모르는 게 아니라 둘도 서로의 이름을 모르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도 마음이 닿는다.
정작 두 사람의 신상정보는 여상한 동네 가십처럼 관객에게 전달된다. 두 사람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가족 구성원들이, 상대방에 대해서는 더욱 못마땅해하는 가족 구성원들이 하는 말 속에서. 사랑에 진짜 필요한 건 그런 신상정보가 아니라는 듯이.
두 사람은 모든 신변잡기를 제하고 그저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이야기에 녹아 흐르고 있었다. 왜 연인들은 이다지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는 걸까? 무향무취의 기체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을 잡으려 갈구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일까? 어떤 작품은 이를 시인의 선택으로 보고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어떤 작품은 이를 회귀하는 계절 속에서 계속되는 사랑의 노래로 보지만 (뮤지컬 <하데스타운>), 선택이든 회귀든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동일하다.
두 사람은 눈앞의 것이 아닌 다른 걸 본다. 감각 그 이상에 의지해야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글을 쓰는 남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꿈꾸며 존재하고, 숲에서 걸어 나온 마녀의 딸이라는 여자는 남들과 좀 다른 것들을 보는 눈을 가졌다. 투명하게 넘실대던 그들의 사랑은 이내 닿아가는 손끝과 혀끝을 타고 현실로, 감각의 세계로 내려앉는다. 이때부터 사랑은 그 모양과 색깔을 달리해야 한다.
우여곡절을 겪지만 아무튼 두 사람은 그럭저럭 잘 해내는 것 같아 보인다. 엄마가 된 아녜스는 새의 가슴에 소원을 담아 띄우고는 방식으로 슬픔을 씻어내기도 하고, 아빠가 된 윌은 자신이 쓰는 희곡과 무대의 세계를 아이들의 마음에도 전파하며, 그럭저럭 연착륙을 해 나가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삶에는 반드시 그런 순간이 온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당도하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삶에 맞설 때 사용했던 모든 도구들이 무력화되는 순간. 그 어떤 조숙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으로도, 눈앞에 없는 세계를 꿈꾸는 손으로도, 각고의 노력으로도 맞설 수 없는 순간.
그 조우를 이미 겪어본 사람은 안다. 윌의 어머니는 그래서 강할 수 있었다. 산고를 겪는 아녜스에게 너는 할 수 있다 말하며 윌이 태어날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을 보면, 윌은 이야기의 재능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윌의 어머니가 가진 건 단순한 이야기의 재능만이 아니다. 철저하게 무력해져서, 삶이 주었던 것을 거둬가는 순간을 몇 번이고 겪은 사람의 마음이다. 닫아두고 살지만 여전한 슬픔이 그의 안에 흐르고 있다.
아녜스가 폭포처럼 길길이 날뛰며 자기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움직이고 있을 때, 윌은 검은 호수처럼 스스로의 안으로 침잠하고 있다. 그런 윌의 모습을 보며 예술가는 결국 생을 매개로 연금술 비슷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성숙이나 눈이나 약으로도 가보지 못한 곳에 닿게 만드는 것. 기체였던 사랑이 눈물이라는 액체로 흐르고, 그렇게 슬픔에 슬픔을 녹인 끝에, 마침내 단단한 이야기의 고형물이 된다. 영화의 시작에서 보이지 않게 향기처럼 번지던 사랑은, 영화 끝에 가면 누구나 볼 수 있는 무대 위의 무엇이 되어 있다.
슬픔 속에 담가진 슬픔이 녹아 천천히 우리를 녹인다. 이것을 우리는 정화(淨化)라고 불렀다. 누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가 무엇인지 묻거든 눈을 들어 이 영화를 보게 할 일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카타르시스의 교과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을 강조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사랑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 이야기의 손을 잡고 살아남아, 또 그 손을 건네는 것. 그걸 인생이라 부른다면, 인생이 손을 맞잡고 전해준 것은 결국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아녜스의 성장담으로 본다. 있는 힘껏 애써도 되지 않아 무력감에 빠지고,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움에 빠져도, 이야기가 손을 내밀어 인간을 그 구덩이에서 건져낸다. 삶의 자리에서 이야기와 더불어 계속 살아가도록 해준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나고, 또 누군가의 손을 잡아준다. 이야기는 우리를 살리고, 우리는 또 이야기를 손에서 손으로 남긴다.
이 아름다운 <햄넷>이라는 이야기에서, 나를 가장 많이 울게 한 것은 슬픔보다도 사랑이었다. 사랑으로 용기 낸 누군가의 행위, 모든 선을 끝내 넘게 한 그 용감한 마음이었다. 그 사랑이 전해지는 수단도 결국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사랑이 반짝, 보석처럼 맺힌다. 클로이 자오와 제시 버클리, 폴 메스칼이 펼친 연금술의 결과물이 내 마음에 도달했다. 당신의 마음에도 이 보석이 박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