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기록, 삶과 죽음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리뷰

by 선이정

DIRECTOR. 오모리 켄쇼

CAST. 사카모토 류이치, 타나카 민(내레이션)

SYNOPSIS.

전자음악의 선구자이자 영화음악 거장, 환경과 평화를 외치는 운동가로 활약해온

전방위의 아티스트 류이치 사카모토

2020년 12월, 그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마지막까지 음악으로 살아있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모든 순간



그 언젠가, 누군가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그 어머니는 한국에 계셨고 우리는 편도 비행도 매일 있지 않은 먼 나라에 있었다. 그는 다소 차분한 말투로 기도해 달라는 말만 남겼고, 그 담담함에 오히려 할 말을 잃었을 때 그가 말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다 한 번 죽는 거야." 그 말에 조금 놀란 얼굴들을 보고, 그는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왜? 사람은 누구나 한 번 꼭 죽게 된다는 거 몰랐어?"


가끔 그 순간을 돌아보곤 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꼭 죽게 된다는 말을, 이후에도 가끔 떠올린다. 그럼에도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나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며, 그 문장을 아주 길고 다정하게 읊어주는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꼭 죽게 돼. 잘 보렴.



사카모토 류이치 삶의 마지막 3년 6개월을 담은 이 영화를 두 단어로 축약하라면 단연 음악 그리고 기록일 것이다. 건강검진에서 질병을 진단받고, 남은 시간을 톺아보며, 사카모토 류이치는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맞이한다. 그는 마치 자신의 육체처럼, 피아노 한 대를 자택 마당에 두어 눈 비를 맞고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실험을 한다. 정성껏 닦고 정교하게 조율하며 아름다운 소리를 목적으로 가꿨을 법한 커다란 물체를, 이제는 자연 한가운데 맡겨두고 거기서 낼 수 있는 실험적인 소리들을 찾아낸다. 이 영화 또한 그런 작업으로 느껴진다.



#기록

일기장에, 휴대폰 메모에, 그는 숱한 단상들을 기록해 두었다. 죽고 싶지 않은 마음, 낫고 싶은 마음, 죽음을 잘 준비하고 싶은 마음, 치료를 받을지 말지 현실적인 고민들을 하는 마음, 하고 싶은 일이 남아있는지 아닌지 돌아보는 마음, "무엇을 하든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슬"픈 마음,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 과거를 후회하는 마음과 그를 단속하는 마음까지도.


그 기록들은 인간적이다. 보고 있노라면 사카모토 류이치의 피아노 음계 뒤에 있던 그의 생활감이 둥실둥실 떠오른다. 음. 카멕스 립밤을 쓰는군... 사카모토 류이치도 유튜브 ASMR을 듣는군... 다양한 곳을 다니는 인간은 일기장의 날짜 뒤에 위치도 써 놓는군... 저런 거장도 인생의 문제 앞에서는 '부탄에나 가버릴까' 하는 도피성 생각을 하는군... 마지막을 정리하면서 끝까지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에는 "조급해하지 마!"가 꼭 들어가는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에 대한 평소의 생각은 역시나, 중요하군.


삶과 죽음은 얼핏 반의어처럼 느껴지지만, 우리는 등잔을 켜고 끄는 식으로 빛과 어둠을 조정하듯이 삶과 죽음을 대할 수는 없다. 그저 삶의 끝 지점에 놓인 미지의 것이 죽음이고, 삶은 삶 그 자체인 동시에 죽음으로 하루하루 가까워져 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사카모토 류이치처럼 생을 정리하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질문과도 결부될 것이다.



#삶

사카모토 류이치 삶의 마지막 날들을 꼭꼭 모두어 정리한 이 영화에서도, 사카모토 류이치가 그동안 우리에게 보여 온 삶의 궤적이 뚜렷하다. 동일본 대지진(2011년) 이후 창단해 지원해 온 오케스트라는 그의 끝날까지도 그에게 큰 의미를 남긴다. 원전과 평화에 대한 그의 생각도 여전하다. 우크라이나의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폐허 위를 딛고 서서 연주한 영상에 그는 부드럽게 자신의 음악을 붙인다.


세상이 다시 미쳐가는 것 같다고, 무서워져 간다는 그의 기록. 그가 떠난 후에도 점점 야만으로 경도되어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고통을 감각하면서도 예술로 평화를 전하려 한 그의 움직임이 여전히 위로가 된다. 한 사람의 힘으로 이 많은 문제를 다 어쩔 수는 없겠지만, 그가 보여준 것처럼 하나하나의 음악으로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이 새로이 연결한 사람이 또 어떤 일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잔해 속에서도 인간은 그 잔해를 밟고 서서 다음 발걸음을 딛는다.


아름다운 소리를 희구하는 것 또한 야만에 맞서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걸 실제로 보여준 사람이 있다는 건 이 세상에 큰 힘이 된다. 이미 개척된 길로 사람들이 계속 걸어갈 테니까. 인간이 소리를, 음악을 통해 멀리서 손길을 더하고 연대를 전한다는 것은 참 아름답다.



#음악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단어들을 그는 구름 위에만 올려놓지 않는다. 구름의 은빛 안감 같은 이런 단어들을 끄집어내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그는 구름을 통째로 음표에 실어 지상에 내린다. 악보를 찾고, 메모와 파일을 정리하고, 연필로 악보에 슥슥 흔적을 남기며... 다음 공연을 준비하는 거장의 모습은, 정말이지 구름 같다.


끝내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닮아가게 되는가? 드뷔시를 사랑했던 청년은 구름 같은 음악, 달 같은 음악을 평생 추구하며 나이 들었고 이제 그의 음악에서는 정말로 구름과 빗방울, 달 같은 것들의 둥근 기운이 흘러나온다. 이 영화는 그 기운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도록, 96분의 러닝타임 안에 몇 번이나 그의 연주를 풀버전으로 넣어 주었다. 구름처럼 천천히 떠 가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이 속도로, 부디 나도 이 속도로 살아가자고, 매번 매 순간은 아니어도 이 속도를 잊지 말자고 생각하게 된다.


육체는 쇠잔하고 기록은 짧아져 간다. 그러나 음악만큼은 계속해서 새로운 꿈으로, 새로운 작업으로 이어져 간다. 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으면서도. 무엇을 남길까 하는 고민도 계속된다. 꼭 보관할 책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나머지는 묶어서 정리하면서도, 콘서트에서 연주할 수 있는 곡과 없는 곡을 구분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꿈만큼은 정리되지 않고 여전히 기세가 성성하다.



#죽음

죽음까지 대략적으로 남은 시간을 예상할 수 있고, 그래서 삶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진다는 건 축복일까 아닐까. 사람마다 답은 다르겠지만, 축복으로 여기든 아니든 그 시기가 쉽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보인 사카모토 류이치의 정리는, 제법 아름다워 보인다. 그는 꾸준히 내던 목소리를 담고, 꾸준히 추구하던 것들을 추구했으며, 사이사이 익살과 정성을 잊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연필을 쥐고 건반 앞에 앉은 거장을 보며, 결국 죽음이란 삶의 뒤편이 아니라, 지금 사는 모양들이 극한으로 수렴되는 곳에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삶과 나의 죽음은 어떻게 보일지, 또 어떻게 모일지 막연하게 상상해 본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삶과 죽음은 상당히 괜찮아 보였다. 그의 음악처럼 구름을 닮았다.


그의 연주와 사진, 글과 주변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상영관에, 이따금 관객들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퍽 감동적이었는데, 각자 인생의 어떤 시점에 만난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을, 거기서 받았던 감정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랬다. 사람들은 각자의 어떤 순간들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그의 음악이 어떤 기억과 구름처럼 뭉쳤을지, 어떤 위로로 달처럼 두둥실 떠올랐을지. 마치 멀리서 뒤늦게 치르는 장례식 같아 마음이 조금 따뜻해진다.



사카모토 류이치를 사랑한 사람, 그의 음악을 삶의 군데군데서 조우한 사람에게 특히나 좋을 영화이지만, 삶과 죽음 앞에 서 있는 건 모든 인간이 다 마찬가지이므로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좋을 영화다. 다만 모든 것을 멈추고, 극장의 어둠 속에서 보길 권한다. 일상의 자잘한 단면들이 껴묻거리처럼 우리를 따라올 수 없는 곳에서, 구름의 속도로 존재할 수 있는 곳에서.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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