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로 연출된 악의 세상에서

영화 <힌드의 목소리> 리뷰

by 선이정


DIRECTOR. 카우타르 벤 하니야

CAST. 사자 킬라니, 모타즈 말히스, 클라라 코우리, 아메르 흐헬 외

SYNOPSIS.

2024년 1월 29일, 가자지구에 대피 명령이 떨어진 날. 6살 소녀로부터 1통의 신고가 접수된다.

“나한테 총을 쏘고 있어요, 제발 데리러 와 주세요”

적신월사는 구조대와 단 8분 거리에 있는 ‘힌드’를 구하기 위해 조정 절차를 이어가지만 구조 작전은 무려 5시간 동안 이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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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신월사(적십자는 이슬람 국가에서 십자 모양 대신 초승달 모양을 사용하며, 이름도 적신월사가 된다)에서는 폭격을 비롯한 위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구조 전화를 받고, 구급차와 원격으로 연결하여 안전한 경로로 구급차를 보내는 일을 한다. 그러는 중 6살 아이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그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다면... 아마 당신은 어렵지 않게 그 결말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이스라엘 군이 총을 쐈겠지. 폭격을 했겠지. 나는 이런 내용을 담은 영화를 그동안 꽤 많이 봐왔으니, 영화를 보고 놀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 아픔을 목도하는 것이, 목격자의 숫자가 되어 존재하는 것이 내 할 일이라 믿으며 영화를 보러 갔는데. 글쎄 아직도 놀랄 일이 남아 있었다.


당신 앞에 아무 문장이나, 한 문장을 펼쳐 놓아 보자. 그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한 단어를 남긴다면 당신은 무엇을 남기겠는가? 나는 아마도 동사를 남길 것 같다. 그만큼 나는 그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을 조금 고쳐먹었다. 때로는 동사보다, 그 동사를 서술하는 수식언이 일의 본질을 더 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군은 총을 쐈다. 폭격을 했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나를 놀라게 한 것, 속이 메슥거리게 한 것은 '어떻게' 총을 쐈고 '어떻게' 폭격을 했는가, 이다.



**이하에는 영화 <힌드의 목소리>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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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행복한 아이들'의 세상

전작에서부터 다큐멘터리와 극 영화 사잇길을 찾아 걷던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은 이번에도 그때처럼 현실과 극 사이를 촘촘하게 박음질한다. 구조 신호를 보내고도 구조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존재를, 그걸 망연자실 보지 못한 채로 보고 있어야 하는 직원들의 눈을 배우들이 표현할 때, 우리에게는 힌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저 어리기만 한 아이의 목소리가. 한없이 어린 그 목소리는, 똑똑하게 자기 할 말을 한다.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자기를 구해 달라고, 전화를 끊지 말라고. 몇 시간이 가도록 끈질기게, 구조 신호를 보낸다.


당신이 예상하듯, 또 어쩌면 뉴스에서 보았듯, 그 구조 신호는 응답되지 못한다. '행복한 아이들' 유치원에 다니는 나비반 힌드 라잡. 고작 여섯 살 아이의 구조 신호에도 응답하지 못하는 세상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세상인가. 어쩌다 우리 어른들은 '행복한 아이들' 하나도 구해주지 못하는 이런 세상을 만들고야 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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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분노와 슬픔과 프로토콜의 세상

영화의 공간 배경은 힌드의 전화를 받는 적신월사 사무실 내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명감을 가지고 자리를 지키는 직원들의 모습이 있다. 밤샘 근무를 하고 아침에 퇴근하려다가도 필요하다면 자리에 다시 앉는 라나, 뜨거운 심장이 가장 앞서는 (아마도 신입인 듯한) 오마르. 프로토콜을 철저히 지키며 희생을 최소화할 길을 찾는 마히드, 모든 이들의 심리 안전을 돕고 있는 니스린, SNS를 통해 이런 이야기들을 세상에 알리는 라일라. 이들은 서로 역할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다. 누군가는 이제 막 시작해 분노와 슬픔이 가장 앞서 있고, 누군가는 그 단계를 모두 거치며 버틴 끝에 너덜너덜 지쳐 있다.


일반 회사에서도 제작 부서와 영업 부서 사이 이견이 생길 수밖에 없듯이, 이런 NGO 안에서도 역할에 따라 이견이 생긴다. 이런 이견이 어려운 이유는 어느 하나가 옳고 어느 하나가 그르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 맞는 말이지만 현실에서 그 맞는 말들이 동시에 배열될 수 없기 때문이다. 6살 아이가 차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으니 당장 구급차를 보내야 한다는 오마르의 말은 옳다. 그러나 길고 긴 조정을 거치지 않고 구급차를 보낸다면 구급차도 총격을 당할 것이기에, 모든 프로토콜을 철저히 지켜야만 한다는 마히드의 말도 옳다. 통화 목소리를 담아 세상에 알리는 라일라의 업무는 꼭 필요하다. (그 업무가 없었다면 힌드의 목소리는 우리에게까지 도달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런 이미지가 숱하게 널리고 깔렸다는 오마르의 지적 또한 우리를 고민하게 한다. (수전 손택이 쓴 <타인의 고통>을 읽으며 괴로워하게 한다.)


통상적인 상황이라면, 이견 사이 논의와 조정을 통해 사안마다 다른 농도의 해답을 함께 찾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이면서도 한 시가 급한 상황에서, 직원들의 감정은 널을 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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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급박한 와중에 잠시 휴대폰을 쥐고 게임으로 눈을 돌리는 장면이 나온다. 눈물 한 방울이 아직 뺨을 다 타지도 못했는데 갑작스럽게 게임을 하는 장면이 누군가에겐 이상해 보였을까? NGO에서 일하는 내 눈에는 정말 마음 아팠던 장면이었다. 비슷한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유독 마음이 무거운 이야기를 많이 들은 날 밤이나, 출장지에서 만난 아이들의 눈빛이 무겁게 마음에 남은 귀국 길에... 나는 하염없이 경쾌한 에세이, 소품이라고 느껴지는 가벼운 일본 소설들, 애거서 크리스티를 읽었다.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하면서, 애거서 크리스티라니? 얼핏 악취미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정제된 구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떻게 해결되는지 패턴을 아는 이야기, 지금 이곳과 참으로 멀게 느껴지는 이야기, 그런 걸로 환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물며 이들처럼 급박한 상황에 놓였다면, 그건 살기 위해 잠시 호흡을 불어넣는 시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나. '행복한 아이들'이 행복한 아이들로 살아갈 수 없게 하고, 남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모인 이들이 인공호흡처럼 핸드폰 게임을 다급히 켜게 만드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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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세력: 고도로 연출된 악의 세상

이스라엘 군이 총을 쏘았고 폭격을 했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상했던 대로다. 동시에 예상했던 대로가 아니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서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고도로 연출된 느낌이었다. 이 영화가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면, 현실과 전혀 무관한 가상의 이야기였다면, 관객의 심장을 최대한 쫄깃하게 쥐락펴락하고 싶어서 서스펜스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극을 설계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구급차와 힌드를 둘러싼 이스라엘 군의 행위는, 몇 번이고 희망과 절망의 낙차를 반복하며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 끝에 기다린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수준의 난사였음까지 포함해, 잔인할 수 있는 최대치로 잔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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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인 군사 행위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다. 전쟁 중이라면 응당 총알을 아끼고 시간을 아껴, 전쟁이라는 행위를 신속정확하게 마치는 것이 목표일 텐데. 한 번에 다 죽이고, 구급차도 한 번에 쏘아 죽이면 그만이다. 이미 적신월사 가자 지구 지부는 폭격으로 폐쇄되어 서안 지구에서 전화를 받는 상황이었고 가자 지구에는 마지막 구급차가 남아 있었다. 가자 지구에서 앞으로 다시는 '힌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려면, 그들을 빠르게 쏘아 없애는 것만으로도 가능했다.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일가족이 피난길에 오르는데, 그것도 대피 명령이 내려서 거기 따른 것뿐인데, 낮에 시작한 총격을 어둑한 밤까지 이어가며 무려 한 차에 355발을 쏘았다는 건, 총알도 시간도 남아도는 자들의 행위라고밖에 이해할 수가 없다. 튼튼한 차량이자 누가 봐도 구급차임이 빤한 차량이 갈기갈기 찢어질 때까지 총격을 했다는 건, 그들을 단순히 죽이고 싶었던 것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악의. 나는 여기서 그냥 악의가 아니라 고도로 연출된 악의를 읽는다. 보통 전쟁 중의 적대행위는 직선적인 적의(敵意)를 품는다. 이리저리 돌리고 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다룬 사건에서 이스라엘 군이 보인 행위는, 마치 고양이가 지나가던 벌레를 잡아 툭툭 가지고 놀듯, 서스펜스를 극대화한 영화를 사람들이 오락적으로 즐기듯, 고도로 연출된 악의를 보인다.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건, 내게 단 한 가지로 해석된다. 이들은 악의를 유희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들에게 이건 전쟁이 아니라, 절멸까지의 시간을 버는 행위일 뿐이다. 사람들이 지칠 때까지. 지쳐서 이곳을 모두 외면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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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리고 우리들: 이 역사를 기록할 세상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홀로코스트보다 더한 악행으로 인류 역사에 기록될 거라고. 홀로코스트 시절 나치의 악행은 물론 끔찍했고, 홀로코스트는 인류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그 시절 악의 대명사는 "악의 평범성", 즉 행정화되고 관료화된 사람들이 사유하지 않으면서 처리한 일들로 거대한 죽음을 이끌어갔다면. 지금은 그것보다 더 적극적인 악이라고 느껴진다. 조롱까지 보일 수 있는 여유, 유희적인 연출까지 할 수 있는 여유 안에서 악의를 고도화하고 있다고 느낀다.


팔레스타인을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해진다. 너무 거대한 행위자들이 이스라엘의 편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인간 짐승(human animal)'이라 칭하며 비인간화한다. 구급대와 힌드를 둘러싸고 있었을 군인들에게, 그 정신은 성공적으로 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비인간화'에 맞서, 거기 있는 이들이 '사람'임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뉴스 보도 하나에 자신의 모든 작업 계획을 취소하고 이 영화를 시작한 감독이 있다. 그 영화를 만드는 데 총괄 프로듀서로 이름을 내건 이들이 있고, (여기에는 호아킨 피닉스와 루니 마라, 브래드 피트 같은 유명 배우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수상 후 모든 '비인간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 알폰소 쿠아론 감독 등이 있다.) 한국에 들여와 극장에 펼쳐 놓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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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있다. 스크린 위의 이야기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현실과 맥박을 같이 하고 있는 이야기를, 그래서 괴롭고 또 동시에 한편으로는 내가 뭘 할 수 있나 무력감마저 들게 하는 거대한 세상을, 구태여 마주하는 관객이 있다. 나는 이 목도가 모여 역사가 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관람 자체가 유의미하다고 믿는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건 너무 요원한 미래처럼 보이겠지만, 끔찍했던 역사로 인류의 뇌리에 박힌 홀로코스트조차 믿기 힘든 이야기로 외면받던 시절이 있었다. 홀로코스트 같은 일이 유대인들에게 다시는 일어나선 안되듯이,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땅에 갇혀 고통받고 죽어가선 안된다. 누구도,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이스라엘 태생이든 가자 지구 태생이든.


죽음은 늘 그곳에 있었습니다. (...) 우리가 모든 품위를 상실하도록, 땅에서 밥을 먹고 빵 몇 조각을 두고 서로 싸우며 조금이라도 가진 것을 서로 빼앗는 그런 짐승이 되도록 고의로 모욕이 행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부분은 그에 저항하고 인간으로 남아 있기를 택했습니다. (...)
우리가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겪은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고, 더욱이 믿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_시몬 베유, <나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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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현실은 절망적이다. 같이 영화를 보고 나온 직장 동료는 "마지막 구급차가 사라졌으니, 앞으로는 전화를 받아도 어차피 가자 지구에 구조를 갈 수 없다. 그러면 적신월사에서도 가자 지구에서 오는 전화를 안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맞는 분석이다. 이 영화 이후 적신월사의 상황이 바뀌지 않았다면, 앞으로 '힌드의 목소리'는 가자 지구 바깥으로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영화를 타고 어렵게 찾아온 힌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쩌면 다시 들려오지 못할 수도 있는 이 목소리를, 소중하게 듣고 기억함으로써, 함께할 당신을 기다린다. '비인간화'에 맞서 인간의 얼굴을 목도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분쟁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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