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귀 기울여야 할

[전주국제영화제] <낮은 목소리 2> 리뷰

by 선이정

DIRECTOR. 변영주

CAST. 윤두리, 강덕경, 심미자, 박두리, 박옥련, 김복동 외

SYNOPSIS.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세상의 편견과 육체적 고통에 싸여 있던 삶을 딛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 나아간다. 우리는 <낮은 목소리 2>를 통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여성임을 확인하며, 습관처럼 굳어진 슬픔을 삶에 대한 희망으로 전환할 의지를 마주한다.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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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보고 싶었지만 아직 못 본 영화 리스트에는 언제나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3부작이 있었다. 지금은 주로 극영화와 드라마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변영주 감독의 강연이나 저서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다큐멘터리스트일 때 나오지 않을까 감히 추측했다. 역시나 이 영화는 30년의 세월을 거슬러 보아도 힘이 있었다.


2026년에 이 영화를 돌아보면,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이는데 모두 내 기억 속 내가 아는 얼굴보다 젊어서 기분이 묘하다. 70대의 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는 어찌 저리 젊을 수가 있는지. 윤미향 의원은 젊다 못해 어려 보였다. 수요 집회도 200회를 넘어섰을 즈음인가 보다. 1,700회가 넘는 수요일이 쌓인 지금의 눈으로 보기엔 생경한 숫자지만, 얼마나 소중하게 하나하나 쌓인 숫자인지 할머니들의 삶을 통해서 느껴진다.


영화는 다짜고짜 강덕경 할머니의 증언으로 시작하지만, 이내 제작 의도와 방향성을 공고하게 밝힌다. <낮은 목소리>가 나오고 몇 개월 후, 서울에 있던 나눔의집은 경기도 광주로 이사를 했고 할머니들이 이제 새 집에 사니까 영화도 새로 찍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변영주 감독에게 연락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중심에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자기가 영면에 들기까지 다 찍어 남겨 달라는 강덕경 할머니의 의지가 있었다. 여전히 남은 할 말, 여전히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할머니들에게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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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갖는 가장 큰 미덕은 할머니들의 삶을 '피해 증언자' 이상으로 드넓게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할머니 본인들도 피해를 증언하고 알리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사회가 할머니들에게 듣고 싶었던 (혹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던) 목소리 또한 피해 증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할머니들의 삶에 피해자 이외의 다면적 정체성이 있다는 지점은 쉽게 놓쳐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변영주 감독과 제작진들이 나눔의집을 드나들며 담은 다양한 장면들을 펼쳐 보여준다. 같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노래를 부르고 낄낄거리고, 살뜰하게 노동을 하고, 같이 밥을 먹고, 첨예하게 의견 대립하는 회의를 열고, 아픈 동료에게 주사를 놓아주고, 그림을 그리고... 피해 증언은 그 사이 자연스럽게 섞여든다.


1시간을 조금 넘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관객은 어느새 할머니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운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그 입장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변영주 감독이 막걸리를 받아 마시고, 떨어져 구르는 농자물을 받으러 급히 뛰고, 배추도 받아 가고, 허허 웃고, 같이 걸으며 할머니들과 함께 보낸 시간처럼. 눈물로 증언하고 그 증언을 무겁게 받아 적는 순간만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모든 순간이 있었고 그중 슬픔도 기쁨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라는 집합명사 안에 할머니들을 뭉뚱그리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격과 취향을 자연스럽게 담는다. 강덕경 할머니뿐만 아니라 공주 같은 심미자 할머니, MZ세대가 가장 사랑했을 것 같은 윤두리 할머니... 그러면서 할머니 한 사람 한 사람을 알아가게 된다. (나는 윤두리 할머니와 박두리 할머니의 패기와 유머가 가장 인상 깊었다. 특히 박두리 할머니께서 사사해 주신 상대 멱살 잡는 법...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작품이 90년대에 이미 우리에게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다. 피해자로서의 납작한 인간 상 속에 할머니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는 것이. 이런 일상의 사소함이 할머니들이 당한 폭력의 잔혹함이나 그로 인한 할머니들의 피해를 축소하지는 않는다. 사안에 대해서도 할머니들의 피해를 충분히 말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변영주 감독이 <낮은 목소리>로도 드러냈듯, 이 영화 속에서도 언급되듯. 더러는 일본 선생에게 속아서, 더러는 공출되듯 끌려가서, 더러는 길 가다가 경찰에게 붙잡혀서... 끌려갔고,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그 피해를 말해야 함과 동시에, 할머니들이 피해자와 생존자일 뿐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는 사실이 좀 더 이야기될 필요도 있다. 이 영화가 1997년작인데 이 관점이 아직도 유효하게 발화되어야만 하는 사회라는 생각 또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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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의 사랑스럽고 소박한 일상과 동시에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간절함이다. 강덕경 할머니는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이 영화가 잘 찍히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싸움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저세상에 가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기를 기도하겠다고 할 만큼. 게다가 밀수부터 요정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박두리 할머니가 새벽기도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 또한 할머니들의 아픔을 "아버지, 다 아시잖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공개되고 30년이 흘렀음에도, 전주의 상영관에서는 웃음소리와 훌쩍이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아직 이 낮은 목소리는 더 전해져야 할 것이다. 더 많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할머니들이 바란 것은 더 이상 이런 일을 누구도 겪지 않는 것이었다. 그 마음을 담듯, 변영주 감독은 다른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젠더 폭력의 존재를 언급하며 이야기를 닫는다. 그 뒤로 이어지는 엔딩 크레디트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권해효, 김혜수, 방은진, 씨네21 같은 존재들이 광고 협찬으로 함께했다는 내용과 더불어, 각 학교의 여성 총학생회부터 일본 내 이 영화를 함께 보고 싶어 상영회를 조직한 모임들까지. 결국 우리를 가르는 것은 국적이나 성별이 아니라, 이러한 폭력에 동의하지 않는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야 할 낮은 목소리가, 아직 우리에게 더 많이 남아 있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시간표]

2026.05.02 10:00 CGV전주고사 1관 (상영코드 301)

2026.05.03 17: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상영코드 443)

2026.05.07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상영코드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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