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 영화 <루오무의 황혼> 리뷰
DIRECTOR. 장률
CAST. 바이바이허, 리우단, 황지엔신
SYNOPSIS. 바이는 3년 전 아무 말 없이 사라졌던 남자친구로부터 중국 남서쪽 어느 작은 마을에서 온 엽서를 받는다. 의심과 망설임 끝에, 바이는 결국 그 마을로 가보기로 결심하고, 진실을 밝혀내려 한다.
장률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았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늘 하는 말, 전작의 흔적이 강하게 묻어난다는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작을 전혀 알지 못하는 내 마음에도 <루오무의 황혼>은 은은하게 들어왔다. 나도 바이처럼 가벼운 가방 하나 메고 골목을 돌고 돌며 걷는 기분이었달까. 그건 여행사 광고 속 인물들처럼 가볍고 산뜻한 발걸음만은 아닌, 그래서 마음에 더 들어오는 여정이었다.
<루오무의 황혼>은 바이라는 여성이 루오무에 있는 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오면서 시작되어, 조그만 마을을 하루에도 몇 바퀴씩 산책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영화다. 얼핏 평화로운 소품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대화 속에서 인물들의 상처와 전사(前史)가 속속 드러나다 보면 곧 느끼게 된다. 이들이 걷고 있는 공간은, 실은 시간이라는 것을.
주인공 바이는 3년 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보내온 엽서 한 장을 따라 이곳으로 왔고, 게스트하우스 주인 리우 또한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로 끌어안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직원 레이, 리우를 사랑하는 황 또한 마찬가지다. 얼핏 초연해 보이는 존재들이라 해서 상처나 상실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아님을, 영화는 조그만 마을을 산책하듯 천천히 자분자분 우리에게 일러준다.
알코올 중독을 떨치고 나아가는 중인, 여전히 그 상흔을 몸의 떨림으로 안고 있는 바이는 이따금 환청을 듣는다. 꾸준히 듣던 기차 소리, 그리고 어느 순간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 모두 멀어져 가는 소리이자, 그들이 도달하는 땅에서는 다소 침략적으로 느껴지는 소리이다. 삶에서 무언가가 원치 않게 떨어져 나간 자리에 남은 스크래치를 상처로, 그 빈자리를 상실로 정의한다면 더없이 바이의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소리들이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무해해 보이는 동시에 어쩐지 조금씩 슬퍼 보인다. 어쩌면 이들도 어린 왕자처럼 마음이 슬플 때 오래오래 지는 해를 바라보았을까. 주인공은 끊임없이 걷고 있는데 관객의 마음은 마치 지는 해를 오래오래 바라본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주인공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는데 관객의 마음은 그 슬픔에 어쩐지 조금씩 취하게 된다. 아주 슬프지는 않은데, 조금은 서글퍼지는 마음.
어쩌면 슬펐던 과거를 뒤에 두고 아직 새로운 시간이 열리기 전에, 슬픔의 잔여물 같은 상태로 잠시 멈추어 서서 서성거리게 되는 영화다. 루오무라는 장소는 그러므로 어쩐지, 정거장 같다. 시간에서 시간으로 넘어가기 위한 정거장. 누군가가 한 시간을 딛고 다음으로 나아갈 때마다 기차 소리가 또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아닐까? 비어 버린 루오무의 집들에도 한때 바이와 같은, 또 떠나간 그 애인 왕과 같은 이들이 살았을지 모를 일이다.
루오무를 그런 장소로 본다면 우리 모두 인생에 한 번쯤은 루오무를 지나간다. 누군가는 게스트하우스에 하룻밤 머무르고 다정한 마음 편지 한 장 남겨둔 채 훌쩍 떠나고, 누군가는 루오무를 한참 빙빙 돌다 집을 구해 3년이나 살고, 또 누군가는 아예 루오무에 게스트하우스를 차리고 와인잔을 빙빙 돌리며 시간을 보낸다. 루오무를 떠나는 방법이 무엇일지는 모르겠다. 절에 가서 성불을 할지, 기차를 타고 떠나갈지, 방법은 모르겠지만 어딘가에서 길이 나타날 때까지는 루오무에서 황혼을 바라보아야 한다. 몸이 덜덜 떨려도. 비슷한 눈매 하나에 상처가 확 건드려져도.
루오무의 시간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루오무까지 끌고 온 상실이나 상처와 온전히 이별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루오무에서 황혼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 그 자체이므로. 철교를 쓸어버릴 만큼 거대한 홍수가 집을 폐허로 만든 후에도 거기 글자로 남아 똑똑히 읽을 수 있는 사랑이 있다면, 더더욱 견딜 만해질 것이고.
영화의 엔딩은 우리에게 어떤 결론도 내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삶 같기도 하다. 정밀아의 노래 <방랑> 가사처럼 "다리를 건너 폭포를 지나도 찬란한 세계가 있지는 않을 거"니까. "싸늘한 밤들이 불안하여도 나무는 내게 그저 견디라 하"는 거니까. 그러나 싸늘한 밤들이 찾아오기 전에 우리에게 따뜻한 황혼의 시간이 있다. 1시간 39분 동안 마음을 기댈 황혼 빛 영화가, 있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시간표]
2026.05.02 13:3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상영코드 330)
2026.05.07 14:00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상영코드 823)
2026.05.08 13:30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상영코드 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