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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May 30. 2016

처음, 또 한 번의 처음

비장한 각오보다 무거운 너의 가벼움

눈을 뜨니 그 곳은 뙤약볕에 아찔한, 여름 나라였다.

  가기 전에 들은 단편적인 설명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누군가는 고아원이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고아원이라고 하면 센터에 계신 분이 (지금은 이모라고 부르는, 이 곳을 시작한 분이) 화내신다고 했다. 고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고아지만 마음으로 품은 자식들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방향이 엇갈린 정보들을 대강 훑어보면서도 아이들이 사랑받는 곳이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인도가 덥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았음에도 정작 도착해서는 그 태양 볕에 아연실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머리로는 아는 것과 실제로 아이들을 만나는 건 영 다른 이야기였다.


  약간의 두근거림을 안고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더러는 바닥에서 구슬 치기 같은 게임을 하고 있었고, 더러는 방문에서 나와 고개만 쏘옥 내밀고 있었으며, 더러는 원래 알던 사람인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음속에서 별이 튀고 폭죽이 터졌다. 아이들이 사랑받고 있구나, 머릿속에 대강 구겨져 있던 명제가 눈앞에 폭발적으로 펼쳐졌다. 아이들은 정말 사랑받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웃고, 저렇게 말하고, 저렇게 자신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은 웃고 있지만 아이들은 아주 먼 길을 왔다.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 두메산골 정도 되는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아이들이었다. 나무를 오르내리고 강에 풍덩 뛰어들면서 놀 수 있는 곳, 고사리 손으로도 부모님 농사를 도와 드리는 풍경이 펼쳐졌어야 했던 곳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이런저런 정보를 더 찾아보았을 때, 아이들의 선조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그 가족들은 오래전부터 그 땅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일상의 풍경이 참변처럼 무너져 버린 건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우리에겐 너무나 멀리서 아득하게 느껴지는 죽음이지만, 이 땅에 분명 그런 죽음들이 아직도 있다. 다른 곳에 살아서, 사회적 계급이 달라서, 가문의 이름이 달라서, 성별이 달라서, 믿는 종교가 달라서, 인사법이 달라서, 그런 크고 작은 다름을 이유로 사람의 생명이 도구로 손쉽게 전락해 버리는 그런 일들 말이다. 그리고 오직 너무 멀리 아득한 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이 죽음으로 느껴지지 않고 딱딱한 숫자로만 느껴지는 그런 일 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우주보다 신비롭고 소중하다는 걸 생각할 때, 수 천 수 만 개의 우주가 곳곳에서 잔혹하게 깨지고 사라지는 이런 일은 정말이지 몸서리쳐지게 끔찍한 일이다. 매우 다양한 10억 개 이상의 우주를 품은 나라지만, 인도에서도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난다.


  가장 유명한 건 아마 2012년 구자라트에서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때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갈등이었다. 시작은 기차에 불이 난 일이었다. 기차에는 힌두교도 58명이 타고 있었고 이들은 힌두교 사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 사원 자체가 평범한 사원이 아닌데, 여기에 이 사건의 핵심이 많이 녹아 있다. 힌두교 사원이었는데 무굴 제국이 득세하면서 힌두교 사원을 부수고 모스크를 지었고 또 힌두교도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오면서 복수하듯 다시 모스크를 부수고 그 자리에 힌두교 사원을 지은 것이었다. 그런 사원에 다녀오는 힌두교도들의 발걸음이 무슬림들(이슬람교도들을 일컫는 말이다.) 보기에 고왔을 리는 없다. 사람들은 무슬림들이 기차에 불을 지른 거라고들 했다.

  피는 피로 이어졌다. 시간이 여린 색을 찬찬히 덧입히도록 오래 자리를 지켜 온 구자라트라는 이름에는 순식간에 학살이라는 이름이 뒤덮였다. 곳곳에서 살인과 강간, 방화가 이어졌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더 흉흉한 사실도 드러났다. 주 정부는 이 모든 일에 침묵을 지켰다. (당시 주 정부 수반은 현재 총리직을 맡고 있는 나렌드라 모디.) 완전한 암묵적 승인이었다. 힌두교들의 상징으로 쓰이는 주황색 깃발이 곳곳에 나부꼈다. RSS였다. 대강 민족 봉사단쯤 되는 뜻이라는데... 모르겠다. 내 눈에는 서북 청년단이랑 느낌이 비슷하다.


  비슷한 일이 우리 아이들의 마을에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피가 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뿐. 사람들은 숲으로 숨었다고 한다. 한겨울의 숲 속은 무척 추웠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수많은 집들이 불탔으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한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카스트가 낮았고 종교가 달랐으며 경제력도 사회적인 목소리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우리 이모와 이모부가 그곳에 가신 게 그때였다. 담요와 긴급 구호 용품들을 챙겨 가셨을 때, 어느 정도 급한 불이 꺼져갈 때쯤 무엇이 가장 필요하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사람들은 옆에 앉아있는 아이를 떠밀며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내가 집이라고 부르는 공간은 그렇게 처음 시작되었다. 지금은 밝고 사랑스럽고 희망차며 아름다운 모습들로 가득하지만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었다.


  아이들은 여기서 영어를 처음 배웠다.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 새로 배워야 할 게 많았다. 처음 하는 도시 생활, 처음 보는 사람들, 처음 써 보는 언어...


  가끔 생각한다. 스무 살에 처음 상경한 나도 가끔 누군가가 '만인의 타향'이라고 평한 이 회색 도시를 견딜 수 없어 치를 떨곤 했기에. 타고 오를 나무도, 숲에서 불어오는 미풍도, 염소 소리도 없는 도시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예닐곱 살 꼬마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지.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아이들이 한 뼘 더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아이들은 정말이지 잘 해냈다.


  내가 아이들을 만난 건 그즈음이었다. 아이들이 오후 햇살처럼 밝고 쾌활하게, 보드라운 면 티셔츠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활짝 열어 사람을 대하고 있었던 때. 나는 살면서 아이들을 예뻐하거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본 적이 별로 없고, 오히려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데면데면하는 편이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보들보들 사랑스러운지, 절로 마음이 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물론 아이들이니 싸우기도 하고 잘못하다 혼나서 울거나 벌 서는 것도 계속 봤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이지 순둥이 천사들은 아니지만, 온전하게 고분고분해야만 사랑스러운 건 아니니까.


  길고도 짧았던 3주 반은 금방 훌쩍 지났고, 떠나기 전 마지막 날 아이들이 낮잠 자는 시간에 나는 고요한 평온으로 덮인 공간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이곳에 다시 오게 될 거야, 나는 다시 올 테니까. 가만히 혼자 생각하면서 노트를 펼쳐 펜으로 꾹꾹 눌러썼다.


모두가 잠든 이 시간과 공간에서
나무만 홀로 제 잎 떨구고 섰다

나른한 오후의 마법이 풀리고
아이들 하나둘씩 눈을 뜨면
헤어짐이 성큼 그 큰 발을 옮겨오리라

사랑은 헤어짐과 닮지 않아서
빨래에 스민 햇살에 묻어
우리 같이 앉은 다정한 자리마다
어느새 슬쩍 다가와 있곤 했으니

헤어짐의 커다란 발걸음마다 파도가 일어
툭, 툭 건드릴 때마다
아프게 깨지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 여기 있으니
사랑이 아플 때마다
하나씩 새로이 고개를 내밀어

말간 얼굴로
헤어짐에게 내일을 기약하는
고사리 같은 손이다

그 손을 살짝 붙든 바람이
나무의 우는 얼굴을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인도를 떠났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에이즈 사업장으로 들어가기로 했지만 사실 3주 반 중 3주는 아이들과 보낸 시간이었다. 혹시나 돌아가지 못할까 봐 두려운 밤, 자신이 없어 다 포기하고 싶어 지는 밤이면 덜컥 덜컥 아이들이 떠올랐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떠올리는 것도 아이들의 웃음이었다.



  몇 달이 지났다. 적당히 낯익으면서도 낯설어 설렘을 주는 아침이 밝았다. 밤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들어온지라 몸이 고단했지만 마음이 설렜다. 방 밖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고향에서 쓰는 말이었기 때문에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써니 디디라는 단어만큼은 똑똑히 들렸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나갔다.

  그 날은 또 하필이면 제법 긴 연휴였고 버스까지 대절해 다 같이 동물원에 가기로 한 날이라고 했다. 물론 아직 인도 더위에 적응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그 날 하루 굉장히 피곤하긴 했다. 심지어 동물원에서 성추행까지 당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와서 살게 된 인도의 첫인상이 나쁠 수 없었던 건, '써니 디디 대체 언제 나오냐', '써니 디디 문 노크해 봐도 되냐'면서 다른 디디들을 귀찮게 했다던 우리 아이들의 사랑 덕분이었다. 아직 다 낯설어 계속 혼자 둥둥 떠 다니는 나를 챙겨 주고 말 걸어 주고 붙잡아 주는 아이들의 성숙한 배려 덕분이었다.


  고작 아이들인데 그렇게나? 싶을수도 있지만, 사실 아이들의 세계란 깊고도 진지하다. 장난꾸러기들의 시각으로 보는 세계란 결코 내가 보는 세계와 같지 않을 것이다. 훨씬 흥미진진하고 다채로운 세계를 아이들은 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건설 현장은 이 가벼운 레고로 만들어지고,


세상에서 가장 알록달록한 움직임은 단색의 젠가에서 나오고,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판은 전문 '꾼'들이 아니라 여기서 나오는지도.


  나는 무척이나 비장한 각오를 몇 번씩 되새기고 되새기면서 간 길이었는데, 내 비장한 각오가 부끄러웠다. 아이들이 만드는 가벼운 공기, 아이들이 던지는 가벼운 인사, 아이들 입에서 가볍게 흘러나와 부유하는 웃음소리, 이 모든 가벼움은 내 안의 가장 무거운 각오보다 더 묵직한 힘이 있었다. 아이들의 세계란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른들이 영영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을 그리워하는지도.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썼는지도. 그래서 내가 여전히 아이들을 그리워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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