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지파니 꽃 핀 밤
10월의 마지막 밤에 돌아온 한국은 얼핏 낯설지 않은 듯했다. 재적응이 더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어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한 채였다. 무엇보다 먼저 한 일은 마음을 분산시키는 거였다. 일 못 해서 한이라도 남은 사람처럼 잠까지 못 자 가면서 일을 마치고 정신없이 돌아왔는데, 그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 아직 나는 슬픔에 맞설 준비가 되지 않았으므로.
처음 몇 달은 버틸 만했다. 이렇게 차곡차곡 적응해 가는 거구나,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러나 복학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3년 만에 돌아온 학교가 낯설었지만 나는 신입생이 아니라 4학년이었고, 난생처음 보는 낯섦과 낯익던 것들의 낯섦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승모근이 빳빳하도록 항상 긴장한 채 학교를 다녔다. 단언컨대 일곱 살 때 초등학교를 처음 입학한 이래 이토록 바들바들 떨며 학교를 다닌 건 처음이었다. 이제 정신 조금 차릴 만 한가 싶으니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매일 과제를 해도 과제가 매일 있는 이유는 뭘까... 궁금해하며 앉아 있다 보면 어느새 나는 인도 시차에 맞춰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차를 따라 서서히 그리움이 마음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자취하는 집 문에 아이들 사진을 붙였다. 인도에 있을 때 가장 좋아한 프랑지파니 꽃도 몇 송이 붙였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바글바글하던 집에 수십 명이 늘 같이 있다가 하루 종일 혼자 적막하게 앉아 있자니 소름이 끼쳤다. 이쯤 되자 나는 인정해야 했다. 비록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 토박이지만, 만으로 2년 햇수로는 3년 인도에서 지낸 지금의 나는 한국보다 인도가 더 편하다는 사실을. 가기 전에 NGO 사무실에서 들은 말로는 사회화에 걸리는 시간이 대략 2년이랬다. 그 말이 맞는 말인가 보다. 고향 집에 있는 엄마의 집밥보다 인도 집밥에 허기가 지는 날도, 방문을 두드리는 아이들 목소리에 잠을 깨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눕는 밤도 이어졌다. 우습다. 정작 인도에서 마지막 밤 나는 아이들에게 뭐라고 했던가.
써니 디디는 그저 먼 여행을 가는 거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고, 여기도 우리 집이기 때문에 써니 디디는 집을 떠나 여행을 가다가 또 집에 가는 거라고. 그리고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분명 다시 만날 거라고. 그 날을 기대한다고.
오가는 사람이 많은 집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크면서 덜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별에 예민한 마음이 어른거리는 아이들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떠나는 거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시간을 훌훌 털고 집에 돌아간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집으로 여행을 하는 거라고 했다.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그때 우리 막둥이는 차에 매달려 자기 색연필 필요하니까 색연필 꺼내 달라고 계속 외쳤다. 위험하니까 차에 매달리면 안 돼! 나도 외쳤다. 결국 마지막까지 우린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큰 목소리를 내며 인사를 했다. (저걸 인사라고 볼 수 있다면 말이다.)
떠남의 미학이란 들 수 있을 만큼만 드는 것, 그래서 나는 나를 내려놓고 사람만을 챙겨 돌아오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돌아오는 내 캐리어에 내 짐은 별로 들어있지 않았다. 처음 들고 갔던 물건들은 이미 다 수명을 다했거나 그냥 두고 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길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챙겨 준 선물들은 하나도 두고 갈 수 없었으니까. 나는 결국 끝까지 떠남의 미학에 걸맞는 짐 싸기에 실패했다. 내게 바리바리 들려 준 것들은 가뿐하게 들기엔 너무 무거운 마음이었다.
그렇게 떠나왔고 그렇게 지냈다. 그 동안 내가 떠나온 그곳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다. 여전히 거기 있는 친구들 가족들을 통해 틈틈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들과 통화를 몇 번 했고, 조잘조잘 인사를 나누었지만 같이 살던 때처럼 아주 사소한 수다 같은 건 들을 수가 없었다. 서로 그리움이 너무 짙어서인지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기가 늘 급급했다. 오늘 학교에선 무슨 일이 있었다든지, 요맘때는 뭘 하고 놀 때라든지, 하는 작은 이야기들이 그립다는 욕심은 잠시 묻어 두었다. 내 안부와 우리 부모님 안부까지 걱정하는 싹싹한 아이들의 깊은 마음 앞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편 HIV/AIDS 사업장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오기 직전 사업장에서는 과부들과 생활력 없는 여성들을 데리고 수공예 부업 교육을 시작했다. 장식용 구슬을 만드는 일인데, 액세서리로도 쓸 수 있고 옷이나 직물에 장식으로도 달 수 있는 구슬이어서 활용도가 높았다. 벌써 꽤나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고, 나오다 마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든 이 일로 생계에 보탬이 된다면, 그리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는다면 참 좋을 일이었다.
마음 한편이 참담해지는 소식도 있었다. 오래전 크리스마스 행사 때 '한 말씀'을 부탁했던 야무진 소녀 G가 서둘러 시집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G의 삶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알기에 이해한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고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온 아이였다. 아이가 딛고 사는 세상은 종잇장처럼 얇고 불안했다. HIV 양성인 여자아이들이 사춘기에 어떤 고민을 하는지도 많이 들었다. '과연 내가 결혼할 수 있을까?' 하며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여럿 보았으니까. 한국에 사는 20대인 내게도 가끔 드는 그 생각이, G에게는 얼마만큼의 무게였을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급한 결정이었다. 현지인 간사들에게 끝까지 말을 않았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의지해 온 사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 급한 결혼에 대해 가타부타 말 듣기 싫었던 것뿐이겠지만, 그래도 기왕 시집 가는 거 이야기하고 축복 받으면서 가지. 든든한 친정처럼 있어 줄 사람들인데 그렇게 무 자르듯 끊고 가서 좋을 게 뭔가. 속이 상했다. 피어나던 꽃봉오리를 꺾어 화병에 넣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면, 그건 내 욕심이지만.
다른 서글픈 이야기도 있었다. 내가 처음 팀으로 왔을 때 돌잔치를 갔던 집이었는데, 갈 때마다 고봉밥을 차려 주어서 그 집에 간 날은 저녁에 식사 대신 소화제를 먹어야 하는 그런 집이었다. 남편이 주폭을 일삼고 집안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해도, 아주머니는 아이들 야무지게 챙기고 손 대접까지 싹싹하게 하는 밝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남편이 나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전부터 에이즈 진행을 저지하는 약을 잘 먹지 않아 걱정이긴 했는데... 지금 그 아주머니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그런 밤, 가만히 누워 눈을 감으면 꼭 그곳의 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밤이 쌓이고 쌓여, 내 마음을 다시 그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나는 오롯이 이곳에 있지만, 매일 부단히 애쓰고 열심히 살고 있지만, 심장 똑 떼 놓고 온 것처럼 아플 때가 있다. 마치 그게 부적응자의 낙인 같아서 인정하기 싫었지만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마음으로 흘러 들어오던 그리움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기억 하나하나에 잠식당한다.
마지막 밤 꽃 목걸이를 걸어 준다고 오면서도 부끄러워하던 그 얼굴들,
먼지 날리는 길 학교를 다녀오던 아이들의 듬직한 미소,
어디서 주워 왔다면서 심은 망고나무를 멀뚱멀뚱 들여다보던 나와 그런 나를 멀뚱멀뚱 들여다보던 아이 얼굴,
때로는 발로 차고 몸싸움을 벌이면서 놀기도 했던 그 숨찬 시간과,
때로는 안돼! 하지 마! 소리를 치고 혼을 내도 몇 분 후면 이내 같이 웃던 크고 작은 기억들,
걸어도 되는데 굳이 뛰면서 옆에서 종알종알 (먹고 싶은 간식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던 저녁의 공기,
이런 것들. 같이 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옆에 있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나노 단위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포개졌다.
아이들과 함께 살 때, 이모부 말씀에 예쁘게 대답하는 아이들을 보며 감탄한 적이 있었다. (내겐 이모부고 아이들에겐 큰아빠다. 우리 중 누구도 혈연은 아니지만.)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셨던 이모부 여름 뙤약볕에 피부가 그을린 채로 돌아오신 날이었고, 아이들과 다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때였다. 아이들은 볼에 난 자국을 보며 질문을 했고 이모부는 설명을 해 주셨다. 진중한 설명을 다 들은 아이 하나가 앞니 없는 미소를 환히 지으며 "그러니까 햇님이 큰아빠 볼에 뽀뽀를 한 거네요?" 하고 말했다. 한 발짝 뒤에서 흐뭇한 미소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쟤 시인이야 뭐야... 그날 밤 나는 그 인상 깊었던 순간을 노트에 썼다.
아이들의 입에서는 투명한 반짝임이 쏟아져 나와 주변을 맴돌다 흩어진다. 그런 반짝임을 다 잡아둘 수만 있다면. 아마 먼 훗 날에는 본인도 잊을 이 작은 이야기들을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어린 날의 고운 것들, 대신 기억해 기록해 두고 싶다.
인도 사는 써니 디디 이야기는 써니 디디가 더 이상 인도에 살지 않기 때문에 귀국과 동시에 종지부가 찍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마음이 여전히 거기 있는 걸 어쩌랴. 여기서부터는 마음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추억 여행이다. 여태까지가 직접 몸으로 부딪고 발로 뛰며 만났던 HIV/AIDS 환자들 이야기 위주였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복닥복닥 같이 살고 매 순간 서로를 깊이 끌어안았던 아이들 이야기다. 하지만 사소하고 소중한 그 매 순간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리 아이들을 먼저 소개해야 할 것 같다. 그러려면 다시 시계를 한참 앞으로 돌려, 내가 아이들을 처음 만난 2012년 연말까지 돌아가야 한다.
안녕하세요! :D
얼마 전 제2회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인도 사는 써니디디 이야기'가 금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두 그 동안 부족하고 두서 없는 글을 읽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 드립니다.
처음 수상 후보라는 연락을 받고 일주일 동안은 잠도 설쳤어요. 너무 기쁘고 떨리는 소식이기도 했고요. 동시에 인도에서 들려온 소식들도 그때 빗발치듯 들어와서... 양극단의 감정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저번 프로젝트 때는 수상을 정말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음... 내 글이 왜 안 되는지 알겠어...'라고 생각하던 차였어요. 그래서 기쁜 한편 놀라기도 무척 놀랐습니다. 하지만 기왕 후보에 오른 거, 대상을 수상해 책으로 출판한다면 인도에, 제가 살던 땅에 바치는 헌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두근두근하기도 했어요. 즉... 혼자 감정의 널이란 널은 다 뛴... 신기한 경험을 한 일주일이었습니다.
수상도 감사하지만 수상까지의 그 일주일도 참 감사하게 보낸 시간입니다. 요즘 향수병이 도지던 차에 오랜만에 다시 글을 들여다보고, 그 때의 감정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시간이 되더라고요. 또 수상 후보에 오르면서 현지나 사무실과 이 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몰래 쓰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당사자들이 제 글을 읽기 시작하니 더더욱 실감이 나네요. 이 글은 제가 썼지만 제 것은 아니라는 걸, 다시금 또 깨닫습니다. 그래서 더 몸 둘 바 모르게 감사한 마음이 울컥울컥 올라옵니다.
퇴고는 그동안도 (의외로) 틈틈이 해왔지만, 글 전체가 불균형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어요. 제가 인도에서 HIV/AIDS 환자들을 만나러 다니는 내내, 저는 제가 동생이라고 부르는 아이들과 같이 살았는데 그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잘 쓰지 않았거든요. 어쩐지 집안 일을 가족들 모르게 연재하는 기분이었어서...
그치만 이제는 제가 이 글을 쓰는지 다 아시고, 다 보고 계시니- 또 써 볼까 합니다. 사실 제가 보고 싶어 견디지 못하고 쓰는 거지만요. 시즌2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ㅎㅎ 이전에는 슬프고 무겁고, 그럼에도 소망이 피어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면 이제는 자라나는 새싹 같은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담아 보려고 합니다. 차차 함께 나누어요. :)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