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러서 더 예쁘다
밤이 깊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10월에 인도에 들어갔지만 시간은 금방 흘러 다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두고 있었다. 처음 인도라는 곳을 밟았던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해마다 같은 계절은 비슷한 감정의 꾸러미를 끌어안고 다가온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렷한 한국에 비해 인도는 한국인들이 느끼기에 덜 더운 여름, 비 오는 여름, 여름 그 이상의 여름, 쭉 여름처럼만 이어지니까 그 색깔의 차이가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공기가 변하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밤이 깊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방을 혼자 썼기 때문에 더 그랬다.
방을 혼자 쓰는 게 외롭지는 않았다. 일종의 정거장처럼 된 내 방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발을 디뎠다. "써니야, 초코 먹을래?" 하고 입에 초콜릿을 물려주면서 들어와 앉는 디디도 있었고, "언니 뭐해요?" 하고 들어왔다가 내가 일 하고 있는 걸 보고 자기도 뭔가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며 옆에 노트북을 들고 와 앉아서 영어 공부를 하거나 맡은 일을 하는 디디도 있었다. 저녁마다 찾아와 나와 함께 수학 숙제를 하는 아이도 있었고 (하나 맞출 때마다 물개 박수를 쳤음은 물론이다.) 학교에 다녀오면 일 없이도 문을 똑똑 두드리며 매일 컴퓨터 붙들고 뭘 하느냐고 물어보는 아이도 있었다.
당시 내 주 업무는 후원자들에게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는데, 아이들은 자기들이 읽을 수 없는 한글 타자로 내가 뭘 그렇게 열심히 빠르게 치는지 궁금해했다. '우리를 응원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시는 분들 있지? 그분들한테 감사 인사를 드리고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드리는 거야. 네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그분들이 많이 궁금해하셔.'라고 대답하면 흐응... 하며 한글을 해독할 기세로 한참 들여다 보고는 또 뭐라고 썼냐고 물었다. 그럼 나는 '너 되게 잘 생겼고, 착하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진지하게 믿는 눈치는 아니면서도 또 되게 좋아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엄마가 보내 주신 생필품이 담긴 택배 박스를 괜히 저희들끼리 뒤적거려 보더니 고무장갑을 발견하고 신이 나서 갖고 놀던 아이들도 있었다. 아무튼 누구도 나를 홀로 두지 않는, 서로가 서로에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따뜻한 관심을 갖는 집이었다. 그래도 혼자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생각들이 있었다. 주로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었다.
나란 사람이 원래 좀 그랬다. 아무리 잘 하고 있다고 말해줘도 스스로가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지만 자존심은 센 사람.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죽어라 연습을 해서 내 최선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사람. 잘 못하는 것은 등 뒤에 숨겨두고 싶어 하는, 뭐 한국에서는 꽤 흔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그 방법이 통했지만 여기선 아니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방정식이나 함수처럼 방법을 미리 익혀 두고 해당 숫자를 집어넣으면 정답이 똑딱 나오는 일이 아니었다. 피와 살과 마음, 우리를 둘러싼 법칙은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는 생명의 유동성이었다. 제각기 다른 24명의 아이들, 여러 명의 양육자들, 비슷해도 달라 보이는 상황과 문맥 속에서 나는 어떻게 가장 현명하게 아이들을 대할 수 있을까?
예를 들자면 이런 거였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큰엄마'에게 혼나야 하는 상황이 몇 가지 있었다. 거짓말, 도둑질, 서로 피 보도록 치고 박고 싸울 때. 이 세 가지 상황은 반드시 큰엄마 손으로 넘어갔고, 아이들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매한 상황들이 있었다. 모든 상황을 가이드라인으로 정해 놓을 순 없는 법이니까. 문제는 아이들이 모두 종류가 다른 방정식처럼 뚜렷한 '개인'이었고, 양육자가 여럿이어서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똑같은 상황은 똑같이 다뤄 주어야 아이들 사이에서 불만이 없을 텐데, 아이 각자를 따져 보면 그 아이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또 따로 있었다. 게다가 양육하는 디디(누나, 언니)들 바이나(형, 오빠)들 모두 각자의 기준이 달라, 어떤 사람에게 이건 크게 혼낼 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별 일 아니었다.
대화를 많이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겐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이 인도인 스태프들이 보기에는 큰 일이어서 '아 그렇구나' 하며 문화 차이를 알게 되기도 하고, 앉아서 양육자들끼리 '이런 일이 있었다, 저런 일이 있었다' 이야기도 많이 했다. 이렇게 써 놓으니 뭔가 거창하게 한 거 같지만 사실 별 거 아니다. 아이들 유치원 보낸 어머니들이 커피 한 잔 하며 수다 떠는 분위기와 비슷하달까. 빨래를 개면서, 야채를 다듬으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웃으면서 같이 보내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을 혼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르쳐야 하는 부분, 이해되는 부분, 칭찬해 주어야 할 부분, 그럼에도 혼내야 할 부분들 사이를 우리는 부지런히 오갔다. 가르치며 배웠고, 혼내며 혼났다. 처음에는 '세상에 어떻게 아이가 이렇게까지 생각을 하고 배려를 할 수가 있지?' 하는 모습만 보여주던 아이들도 조금씩 다양하고 진솔한 면면을 보여주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달 팀으로 왔을 때의 써니 디디와 살러 온 써니 디디가 다르고, 한 달 팀을 맞는 아이들과 같이 사는 디디를 맞는 아이들이 달랐다. 한 코 한 코 뜨개질을 하듯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관계의 망을 촘촘히 얽어가기 시작했다.
그중 유독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12월이었고, 중간에 디디 한 명의 생일이 있었던 걸 제외하면 아이들 생일로는 3달만의 생일잔치였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생일 맞은 사람을 가운데 케이크와 함께 앉혀 놓고 우리가 그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그 사람만이 갖는 좋은 점은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생일 맞은 아이가 철저하게 주인공인 시간이었다. 하지만 유독 한 녀석이 계속 떠들고 장난치고 뒤를 보고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전에도 소그룹 공부 시간에 혼자 몸에 담요를 두르고 드러누우며 장난을 치다가 내게 몇 번 경고를 받은 녀석, S였다. 생일 주인공에게 집중해 주자, 고 이야기를 몇 번 했지만 한창 자라는 7-8살 소년에게 얼마나 어려운 당부인가.
결국 생일잔치가 파한 후 아이와 나는 대치 상태에 섰다. 아이도 며칠 연속으로 내게 지적을 받는 게 어려웠고, 나도 아이가 며칠 연속으로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생각에 어려웠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게 우리가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기도 하다. 서로의 삶에 더 이상 서로가 손님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고 깨달은 순간이었다. 결국 있는 대로 감정이 상한 아이도 뛰어 나갔고, 여기 오래 있던 디디가 자기가 얘기를 해 보겠다고 나를 앉혔다. 나도 홀로 방으로 돌아와 눈물을 훔쳤다. 나의 서툶이 미안한 동시에 속상했다. 요령 없이 달려들다 지쳐버리는 스스로가 싫기도 했고, 그렇지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날 밤이었는지 다음 날 밤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이가 내 이름을 부르며 종이 한 장을 달라고 했다. 학용품을 관리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데...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아이를 보자, 아이는 헙 하고 입을 다물더니 후다다 달려갔다. 뭐지? 나중에 알고 보니 써니 디디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종이를 달라고 한다는 게, 급한 마음에 써니 디디 이름부터 나온 거였다. 어떻게 알았냐면, 아이가 주춤거리며 다가와서는 곱게 접은 편지 한 장을 건네주었으니까.
커다란 A4 용지에 적힌 글은 딱 세 줄이었다. 담요를 가지고 장난쳐서 미안하고, 디디 말을 듣지 않아서 미안하고, 앞으로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며칠 연속으로 혼낸 시간이 하나하나 내 마음에 걸려 있었듯, 아이도 그랬던 거였다. 미안하고 속상한, 내 마음과 닮은 마음을 행간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아직 맞춤법에 서툴렀던 그 시절의 아이는 for와 from을 쓸 때마다 o와 r의 위치를 자주 헷갈려했다. for를 fro라고 쓰거나 from을 form으로 쓰는 일이 잦은 걸로 보아 머릿속에서 두 단어가 엉킨 듯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겉면만 봐도 이 아이가 썼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편지가 완성되었다. 까만 볼펜으로 삐뚤빼뚤 써 내려간 여백 가득한 편지임에도, 누가 보아도 정성이 가득 들어간 편지였다.
그 후로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아이는 엉뚱한 매력이 있지만 또 솔직했다.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이실직고하는 게 자연스러운 아이였다. 한 번은 세 자릿수의 덧셈 문제를 하고 있었는데, 자릿수가 바뀌는 문제여서 좀 어려웠다. 그런데 푼 흔적도 없이 답만 재깍재깍 적혀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라... 누구 거 베꼈지.' 했더니, 뭘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눈치를 볼 의지가 전혀 없는 편안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다 지우고 다시 해봐, 직접 해야 늘지, 했더니 또 끄덕끄덕하며 잘 지운다. 한 번 걸렸으니 이번엔 당연히 자기가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에 다가가 보니 또 답만 재깍재깍 적혀 있다. 또 베꼈지, 했더니 또 아무 변화 없는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끄덕. 이쯤 되면 그 엉뚱한 솔직함에 웃음이 나온다. 다 걸릴 거 알면서, 다 지우라고 할 거 알면서, 감출 의지도 없으면서 대체 왜 베끼는 건지. 올바른 듯 은근히 삐뚤빼뚤한 학생이었던 나는, 삐뚤빼뚤한 듯 올바른 그 모습이 의아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수학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미련이 없던 아이지만, 호기심이 많은 S는 곧 과학과 탐구를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기 시작했다. 전구 연결 같은 숙제가 있으면 열 일 마다하고 매달렸고, 나중에 전기가 나간 어느 날은 그 전구를 밝혀 침대에 매달아 두면서 환하게 웃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래, 저런 애한테는 숙제 내 줘도 보람 있겠다. 역시 과학의 미래는 어린이에게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 박수를 쳐주었다. 동식물은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걸어 다니는 닌텐도 동물의 숲이 따로 없었다. 오는 길에 주웠다면서 집에 송사리를 가져와 대야에 풀어놓더니, 송사리가 꽤 많이 죽었다 싶을 때면 또 어디선가 주워와 송사리를 리필(?)하는 것은 물론 날마다 다른 디자인으로 자갈과 풀을 이용해 대야를 얼마나 잘 꾸며 놓는지 그 센스와 정성이 감탄스러웠다.
나중에는 친구들이 자기 집에 있는 금붕어랑 어항까지 선물해 주어서 그걸 집에 가져다 놓고는 날마다 지극정성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다 이 아이의 정성을 알고 금붕어 돌보는 일을 이 아이의 당번으로 맡겨 두었다. 물에 산소가 없어지면 물고기가 죽는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물고기 죽으면 안 되니까 물고기 밥과 산소 발생기를 사다 달라고 얼마나 나를 들들 볶았는지 모른다. 산소 발생기가 없는 동안은 물을 매일 갈아주는 정성도 보였다. (사실 그게 물고기 피부에 더 안 좋다고 말했는데 그것보다 산소 부족으로 죽는 게 더 무서웠던 것 같다.) 귀국 직전, 마지막이라고 큰 맘먹고 새 금붕어와 산소 발생기, 자갈까지 사서 어항을 꾸며 주었는데 그걸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그런 아이의 편지는 마지막까지 나를 웃게 했는데,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공항에 홀로 앉아 이제 이 곳을 떠난다는 상념에 젖어 눈물이 나올 것만 같던 바로 그때 눈물이 쏙 들어가는 편지를 발견했다. 이제는 from을 잘못 쓰는 일보다 잘 쓰는 일이 더 많은 아이가, 생뚱맞게 happy birthday라고 썼다가 슥슥 지운 그 흔적 때문에 헛웃음이 터졌다. 오래전 누구한테 종이를 달라고 해야 할지 헷갈렸던 것처럼, 이 편지 왜 쓰는 건지 또 순간 헷갈린 거다. 마지막까지 산소 발생기 사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으며, 미완성처럼 보이지만 저게 완성이라는 게 또 매력 포인트 되시겠다.
며칠 전 저 멀리서 날아온 아이의 사진을 보고 나는 요 근래 들어 가장 환한 웃음을 지었다. 과학과 탐구와 관찰을 좋아하는 아이, 뭐든지 호기심이 많은 아이, 해맑게 웃는 아이, 방귀 뀌었다고 친구들이 아무리 놀려도 그냥 웃을 만큼 성격 좋은 아이, 솔직하고 정직한 아이. 여전히 그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삐뚤빼뚤하지만 올바른 그 모습으로.
내가 나의 서툶에 발목을 잡혀 끙끙 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서툴러서 더 예쁜 아이의 마음을 보면 내 고민은 사르르 잊게 되었다. 서툶과 느림 안에서 삐뚤빼뚤하게 쭈욱 그어 가는 아이의 선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자타 불문하고 서툶을 계속 보면서도 좀처럼 인정하지 못하던 내 작은 마음이 그 안에서 녹아 말랑말랑해진다. 딱딱해진 것들을 녹여내기에 더욱 올바른 삐뚤빼뚤함, 바로 그 마음을 순수라 불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