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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l 19. 2016

형아야, 네 그림자가 길구나

성숙하게 자란 너희 등 뒤

우리 아이들은 열심히 한다.

그리고 열심히 할 기회도 많다.


  비록 아이들을 한 데 모이게 한 비극적인 역사가 있긴 해도 아이들이 불쌍하거나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이유다. 부모님 품을 떠나 어린 나이에 타지 생활을 하는 걸 생각하면 뭉클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항상 큰엄마와 큰아빠, 누나와 형들이 함께 모인 곳을 '또 하나의 우리 집'으로 여기고 있다. 인도 사람인 큰아빠와 한국 사람인 큰엄마가 이룬 이 큰 가정은 아이들뿐 아니라 내게도 '또 하나의 우리 집'이다. 자주 가지 못해도,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한 집.


  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것 같다. '큰엄마의 나라' 한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큰엄마와 큰아빠를 아는 사람들이 우리 집을 속속 찾아오곤 한다. 덕분에 아이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외국인을 만나는 일이 자연스럽다. 인도인이든 한국인이든 호주인이든 미국인이든 아이들에겐 그냥 형이고 누나고 삼촌이고 이모다. 아이들이 가진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잊지 못해서인지 다시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그렇게 온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자기가 줄 수 있는 최선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한다. 지금은 우리 아이들 모두 학교를 다닌 지 벌써 3년이나 되었고, 때문에 손님이 오셔도 아이들이 바빠 같이 뭘 할 시간이 없을 정도지만 예전엔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학교가 소원이었던 시절, 오매불망 학교 갈 날만 기다리며 홈스쿨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주계(州界)를 넘어 멀리 와서 잡은 보금자리는 아이들에게 '또 다른 집'이었을지언정, 그 지역 사회마저 순식간에 고향이 되어 주지는 않았다.


  언어도 문화도 달랐다. 외국인들이 들락거리고 아이들이 잔뜩 모여 사는 집을 수상하게 여기거나 마뜩잖게 보는 이웃들도 있었다. 의료 봉사 팀이 왔을 때 이웃들에게도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살뜰하게 인사를 하는 등 이웃들과의 관계는 조금씩 나아졌지만 학교는 다른 문제였다.


  아이들의 모어(母語)가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아이들이 학교에 갈 방법은 영어를 배우는 것뿐이었다. 영어 교과서를 사용하고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에 진학해야 했으므로. 그래서 영어를 익히는 동안 아이들은 홈스쿨링을 했고, 그동안 세계 각지에서 온 손님들은 자신의 최선을 끄집어내 아이들의 어린 시절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더해 주었다.


  색종이를 접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크레파스를 부러뜨리기도 하고, 레고 블록을 쌓고, 공을 차고, 자전거를 타고, 노래를 부르고, 멜로디언을 똥땅 거리면서 아이들은 잃어버릴 뻔했던 유년 시절을 하루하루 채워 나갔다.


물감으로 장래 희망을 그려 보기도 하고,
가사를 보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축구도 하고. 근데 그보다 저 야무진 손 끝 좀 보세요...
게임도 하고. 나중에 이런 사진 보여주면 '누구누구 형아랑 이런 게임 했다'고 기억도 제법 잘 한다.
물론 혼나서 벌 서는 날도...


  그야말로 항상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왁자지껄하고, 서로를 붙들거나 장난치거나 하는 손길과 눈빛이 굴러 다니는 곳. 그 모든 것이 반짝임으로 어우러져 잠시도 쉬지 않고 매 순간 다른 빛을 보여주는 곳. 자라면서 사춘기를 맞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생겨 지금은 조금 분위기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빛나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자유 주제 그리기처럼 제각기 따따로인 것 같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구심점은 있었다. 형아들이었다.



  우리는 다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등을 보고 자란다. 아이들도 그랬다. 물론 큰엄마와 큰아빠의 가르침이 제일 중요한 기준이고 누나와 형들이 하는 말도 곧잘 듣는 편이기는 하지만, 뭐 다 그런 거 아닌가. 나이 차이가 가늠도 안 되는 선생님보다는 한 학년 위 선배가 더 무섭고, 엄마가 아무리 예쁘다고 멋있다고 해도 친구들이 멋있다고 할 때야 비로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그런 거. 그중에서도 오늘은 형아 오브 형아, 맏형 라인에서 곧은 등을 펴고 자라 준 세 명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우리 집 형아들은 어쭙잖게 나이를 무기로 휘두르는 녀석들이 아니었다.


얼핏 봐도 키가 제일 큰 세 녀석이 형아 라인. 다른 '형아'들이 치고 올라온 지금도 저 세 명은 자타공인 최고의 형아들이다.

  처음부터 형아들은 독보적 존재들이었다. 키가 다 고만고만했던 시절 세 녀석만 키가 불쑥 컸고, 뭘 하든지 잘 하고 열심히 하는 것도 독보적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말썽을 피우고 치고받고 싸울 때도 형아들은 좀처럼 그러는 법이 없었다. 형아라 한들 상대적인 것일 뿐, 이들 또한 좀 툭탁거리고 말썽을 부려도 충분히 이해가 될 나이였는데.


  모두 서로의 언어가 서툴던 시절, 언어가 다른 양육자들과 아이들 사이에서 훌륭한 통역을 하며 다리를 놓아주었다. 어른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언어로 통역을 하는 것뿐 아니라 서로의 마음과 마음까지 통역해 옮겨 주었으니까.


  그 시절이 어언 4~5년 전이고 형아들 나이도 대략 열두어 살 정도였으니, 나는 통번역학을 전공했음에도 그 시절 우리 아이들 발뒤꿈치조차 못 따라간다. 나이와 상관없이 존경스러운 아이들이다. 이제는 제법 머리가 굵은 동생들이 자꾸 딴짓을 하려고 할 때면 근엄하게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사춘기를 겪는 녀석들이 이제 형아 말이라고 다 듣지는 않아서, 우리 형아들이 고생이 많다.)



  아이들이 학교 가는 꿈을 꾸며 홈스쿨링을 하던 시절, 고향에서 학교를 다녔던 다섯 명만 먼저 학교에 보냈더랬다. 버스를 갈아타며 가는 제법 긴 등하교 길이었고 다른 아이들과 분리된 스케줄이기도 했지만 다섯 명 모두 무던하게 잘 해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맏형 라인 Z와 L은 독보적이었다. 나이에 비해 낮은 학년을 다니고 있었는데, 자존심이 상할 수도 속이 상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불평 하나 하지 않고 늘 1, 2등을 다투고 월반을 밥 먹듯 했다.


  워낙 공부 시작 자체가 늦었던 데다가, 행정적으로 월반을 할 수 없는 단계가 있어 아직도 실력과 나이에 비해 낮은 학년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집에 오면 숙제 딱딱 마치고, 제 할 일 야무지게 하고. 고백하건대 아이들의 누나 위치에 있었던 나도 10대 때 그렇게 못 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또 한 명의 형아, O는 한참 어리고 키도 제 어깨 아래로 오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홈스쿨링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도운 손이 얼마나 인이 박혔는지 단단했다. 그 손에 처음으로 연필을 잡고 공부를 시작했으니, 가뜩이나 키가 컸던 O가 조그마한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끙끙거리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얼마나 눈물겹고 감격스러운 광경이었겠는가. 이 집 형아들의 특성인지, O 또한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천성이 착한 O는 늘 감사하는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내가 단기 봉사 팀으로 갔을 때도 그랬다. 다른 아이들이 공 차고 그림 그리고 악기 불고 노래 부르며 신나게 깔깔거리는 집 한가운데 앉아 아이는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 받아쓰기를 했다. 아이의 꾸준한 노력이 눈에 밟혔던 큰엄마가 말씀하신 대로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앉긴 했지만, 집안 분위기를 알 리 없는 손님이었던 써니 디디는 '다른 아이들 노는데 혼자 공부하려면 마음이 안 좋지 않을까' 걱정했다. 기우였다. 아이는 그 수많은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것처럼 집중했다.


  그 집중에서 차분함보다는 조급함이 느껴졌지만 십분 이해가 갔다. 나도 재수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게 풀리지 않는 문제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보다는 불안함과 조급함이었으니까. 제 친구들이 학교를 가는 걸 보며 얼마나 부럽고 조급한 마음이 들었겠는가. 그래도 그런 내색 없이 늘 학교 가는 친구들의 가방을 들어다 주며 아침마다 배웅을 하는 친절한 아이였다. 덤덤한 모습만 보이던 아이가 실수로 한 문제를 틀렸을 때 서럽게 엉엉 울던 날, 그 마음을 느낀 동생들은 단체로 홈스쿨링 선생님을 찾아갔다고 한다. 형아가 너무 속상해하니까 한 개 맞은 걸로 해 주시면 안 되겠냐고. 그 예쁘고도 찡한 이야기의 결과로 손님 써니 디디가 보충 수업을 위해 같이 앉은 거였다.


  자릿수가 바뀌는 덧셈과 뺄셈을 했던 기억이 난다. 받아쓰기로 불러 줄 문장이 마땅치 않아 'R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E가 공을 차고 있습니다, L이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는 식으로 아이가 함께 하지 못하는 집안의 풍경들을 읊으면, 아이는 그것을 문장으로 잡아 꾹꾹 눌러 적었다.


  최선을 다한 아이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공부를 이제 처음 시작한 아이니까 1학년이나 2학년에 들어가게 되겠지 하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채 본 인터뷰에서 4학년을 다녀도 될 것 같다고 한 것이다. 아이는 4학년에서 공부를 시작해 차곡차곡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자릿수가 바뀌는 뺄셈에서 쩔쩔매던 아이가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를 공부하는 걸 볼 때, 방정식을 배우는 걸 볼 때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수학을 잘 하고 못 하는 것보다도 아이가 마음을 다 쏟아부어 최선을 다한 결과가 그만큼 쌓인 것 같아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지금 아이를 보고 있지 않아도, 이 세상 어디에 얼마나 떨어져 있어도, 아이가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형아들의 등을 보며 컸으니 다른 아이들도 조금씩 자란다. 워낙 압도적으로 잘 하는 형아들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형아들보다는 더딘 속도지만, 형아가 동생을 챙기고 친구가 친구를 챙기며 훈훈한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다. 저렇게 평생을 의지하는 사이로 하루하루 나아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내 마음이 다 든든해진다.



  이렇게만 쓰면 우리 형아들은 반듯하고 재미없는 샌님이들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잔소리만 딱딱 해대고 제 공부만 잘 하는 아이들이라면 동생들이 이렇게까지 좋아할 리는 없으니까.


  아이들은 그냥 주어진 역할과 의무에 충실하게 반응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진짜 형아로 있을 뿐이다. 우리 형아들은 정말 진심으로 동생들을 예뻐하고 좋아한다. 동생들도 마찬가지여서, 특히 체구가 작은 막둥이가 형아들에게 매달리거나 무릎에 앉거나 할 때 보면 권좌에 앉기라도 한 것처럼 으스대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참 가소롭고도 귀엽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 Z가 써 준 편지에는 '디디가 항상 나를 친동생처럼 대해 주었고, 큰 형으로 대우해 주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 말이 내겐 참 뭉클했는데,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자기를 대했는지 정확하게 알아주었고 표현까지 했기 때문이다. 나의 노파심과 기우 때문에 항상 잘 되었다곤 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Z를 비롯한 형아들을 대할 때는 어린아이들과 다른 기준을 두었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도록 둔다든지, 동생들이 형아 말을 따르도록 한다든지, 형아의 존경스러운 점을 구구절절 나열한다든지 하는 나의 서투른 노력들이 전달되었고, 내가 노력했다고 자기한테 다 좋게만 느껴졌을 것도 아닌데 그 결과보다 내 마음을 헤아려 써 준 편지가 눈물겹게 고마웠다.


  우리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이다. 조금씩 단단하게 자라나는 등 뒤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아이들, 그래서 주변에서 얼마든지 밟고 따라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 가는 아이들. 그래서 미래가 더 기대되는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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