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돌아봐도 여기서 웃고 있을 거야
나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고, 작은 교회를 다닌다. 그래서 내게 교회는 매주 갈 때마다 마치 백석의 여우난곬족이 맞는 명절 같은 느낌이다. 우리 할머니가 아니어도 우리 할머니고, 우리 큰엄마가 아니어도 우리 큰엄마인 곳. 재수생이었던 나를 위해, 편찮으신 할머니를 위해, 해외에서 근무하시는 분을 위해, 군 입대한 친구를 위해, 끊임없이 내 일처럼 기도하고 마음 쓰는 곳. 모두가 정말로 가족 같은, 나는 그런 곳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매주 성가대 연습을 하고, 컵라면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새벽까지 앉아 시험 공부를 하고, 성탄절이면 무릎까지 푹푹 쌓인 눈밭에서 새벽송을 돌고 와 코코아를 마셨고, 때로는 합숙을 한다고 자기도 했다.
그곳에서, 무슨 모양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비정형 무늬 장판으로 덮인 교회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이따금씩 생각하곤 했다. 오래전 여덟 살이었던 내가 '사금파리'라는 단어를 알게 된 후 '사금파리 무늬'라고 멋대로 정의 내렸던 그 모양을 한참 들여다보며, 아주 별것도 아니지만 항상 같은 자리에 있어 주었던 이 장판 무늬를 그리워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아직 살지도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현재에 대해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그 오묘한 아득함을 나만 느껴본 건 아니리라. 어렸을 때 나는 아주 쉽게 이 감정에 몰리곤 했는데, 이 감정이 분명히 언젠가 현실이 될 거라는 걸 알기에 더욱 그랬던 듯하다.
그리고 시간이 그 먼 미래를 나의 오늘로 데리고 왔을 때, 아무럴 것도 없는 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그런 날이면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장판을 한 번씩 떠올리는 '오늘'에서, 그 오늘을 함께 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한 생각이었다. 언젠가 또 오랜 시간이 흐르고, 오늘 햇살 아래 빛나는 모든 것이 다 사금파리 무늬 장판처럼 과거의 것이 되더라도- 내게 그랬듯 아이들에게도 이 시간이 와글와글한 명절처럼 소중하고 따스한 기억으로 남기를. 그때쯤이면 아이들 기억 속에 나는 밤톨보다 작게 쭈그러져 있겠고 아마 찾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서로가 서로의 여우난곬족이 되어 줄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참 든든하고 뿌듯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이곳에 와서 다행인 아이들이 있다. 거친 세상 모든 풍파를 막아줄 수는 없을지라도 작은 우산을 펴 받쳐주며 함께 걷고 싶은 아이들. 갑자기 삶에 생겨 버린 굴곡들을 딛고 또 아름답게 자라고 있는 내 동생들이다.
고생은 양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한 사람당 고생의 분량이 얼마씩 똑같이 책정되어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N은 그 상당 부분을 이미 다 써버렸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늘 N에게만큼은 차라리 그렇게 책정되어 있는 거였으면, 그래서 앞으론 꽃길만 걸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곤 한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N은 아주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
두 살 남짓 되었던 어린 시절, N은 부모님을 한 날 한 시에 잃었다. 생활고를 비관해서였는지, 아니면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서였는지, 초기 문서마다 말이 조금씩 엇갈려 있어 정확한 이유는 당사자만이 알겠지만 어머니는 우물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구하려고 뛰어든 아버지도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중에 N이 어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말을 듣고 말해준 대로라면, 당시 N네 가족은 N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동생이 자랄 수 있도록 새 집을 짓던 중이었다고 했다.
공사가 반쯤 진행되었을 무렵이었고, N 부모님의 일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쉬이 묻힐 일이 아니었으며, 계층과 종교와 종족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배타성이 괴물처럼 날을 세우고 있던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두 살 남짓이었던 N이 그 집을 마저 짓고 지킬 수는 없었겠지만,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집을 집어삼켰다고 한다. N의 집에는 더이상 N에게 남겨질 것도 N이 살아갈 공간도 없었다. N은 그때부터 친척 집을 전전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사촌 형 Z와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 사이의 몇 년 동안 N의 삶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하기는 조금 어렵다. 중이염을 달고 살다시피 했던 약한 몸 상태, 웃어 보라고 해도 안면 근육을 빳빳하게 경직시키는 것밖에 하지 못하던 얼굴, 물에 젖은 생쥐 같은 눈동자, 이런 것들을 보며 대강의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확실한 건 절대 녹록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자마자 파라다이스가 펼쳐진 것도 아니었다.
이모의 입에서, 혹은 초반부터 있었던 다른 스태프의 입에서, 그 시절의 N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새로운 세계를 접한 건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스태프들에게도 새로 시작하고 적응해야 할 일 투성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영어라는 언어를, 도시라는 문화를 배워야 했다면 N은 거기에 하나 추가해 '생활' 그 자체를 배워야 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본 후 뒤처리를 해야 한다는 것, 추우면 겉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신발을 신으면 발이 감싸이는 기분이 난다는 것, 이런 작은 것까지도. 당연히 모두에게 쉽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모두 사랑 하나로 그 길을 건너왔다.
N의 매일매일 자체가 기적이었다. 환하고 자연스러운 N의 미소가,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하루하루가 선물이고 기적이었다. 이모는 N이 웃는 것만 봐도 그런 기분이 든다고 하셨다. 처음 왔을 때의 N을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런 내게도 N은 나이와 상관없이 막둥이 같은 존재였다. 부둥부둥 아끼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모든 순간을 지켜봐 줘야 할 아기새 같은 존재.
비록 기적처럼 밝아지고 행복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과정 중에 있는 게 당연했다. 아이들이 한 살씩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학교에 다니면서 아이들의 세상이 넓어져 감에 따라 아이들에게는 점차 또래 집단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N은 다른 아이들보다 여전히 생활 면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아이였다. 신발끈을 매는 일, 옷매무새를 다듬는 일, 실내화나 도시락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일 등이 N에게는 조금 더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그 나이 때 아이들 중에는 야무진 손길로 착착 챙기는 아이보다 이리저리 흘리고 다니는 아이들이 더 많긴 하지만, N은 그럴 때마다 확 긴장을 하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잘못한 것이 있어 혼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확 굳어져 어떤 생각이나 대답도 잘 하지 못했다. N은 결코 말썽꾸러기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주변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었지만, 그 주변 눈치 때문에 혼날 일이 늘곤 했다.
N과 같은 학년인 친구들 중에는 우리 집 최고 장난꾸러기들이 다 몰려 있었는데, 그 친구들을 따라 같이 장난을 치다가 어느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그 선을 넘어 혼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더 넘어서는 일,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함할 만한 정도인 때도 종종 있었다. 혼날 걸 알면서도 재미있으니까 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N은 아이들을 따라 함께 노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가 혼나서 더 당황스러워했다. '이러면 안 돼'를 다시 일깨워주면 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N에게는 조금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다.
한 번은 N이 색연필을 달라고 왔다. 불과 며칠 전에 색연필 한 세트를 가져갔는데 벌써 다 떨어졌을 리 없었다. 물어보니 모른단다. 분명 가방 어딘가에 낱개로 뒹굴고 있을 것이었기에, 같이 가방을 열어 정리를 하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방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었다. 공책의 낙장이나 몽당연필, 색연필도 상당수 찾았다. 그러나 의아스러운 물건이 들어 있었는데 숟가락 세 개였다.
아이들이 도시락을 싸 가기 때문에 아침마다 숟가락을 챙기는데, 평상시 집에서는 손으로 식사를 한다. 이는 개념의 차이인데, 손으로 먹는 게 지저분한 일로 인식되는 우리와 달리 인도에서는 타액이 섞이는 것이야말로 부정하다고 생각해서 누구 입에 들어갔다 나왔을지 모를 숟가락이 내 몸인 손보다 지저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숟가락의 존재감 자체가 희미해 가끔 잔반 처리를 하다가 숟가락까지 내버린다든지 숟가락을 잘 챙기지 않는 일이 많았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숟가락 수가 자꾸 줄어들어, 아이들에게 숟가락 관리를 잘 하도록 이야기하던 즈음이었다.
아마 숟가락을 가져갔다가 꺼내 놓는 걸 깜빡해 책가방에서 나뒹군 모양이라고 추측한 나는 화가 났다. 도시락 가방도 아니고 이게 왜 책가방에 들어 있냐고, 꺼내 놓는 걸 깜빡한 거냐고 물었다. 애써 화를 삼키려고 애쓰며, 혼내는 게 아니라 어떻게 된 건지 파악을 하고 싶으니 이야기해 달라고 말했다. 아이는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다른 아이들이 숟가락을 두고 갔을 때 챙겨주려고 자기가 더 챙겼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애써 억누르려던 화는 사라지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친구들 사이에 끼는 일을 다른 아이들보다 어려워하는 N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었을 N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었다. 그 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실 아이들의 세계를 어른들이 볼 때는 아름답지만, 아이들끼리라서 더욱 잔인한 측면도 있다. 서열을 짓거나 소외감을 주거나 괴롭히는 일이 아이들의 세계에 왜 없겠는가. 오히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청소년들이나 어른들의 세계보다 더 적나라하다.
자기 자신도 야무지게 챙기지 못하는 N이 숟가락을 (그것도 책가방에서 꺼내어) 챙겨준다 한들 다른 아이들이 고마워하고 감동을 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오히려 N이 자신감 있는 모습이 되었을 때 더 친근하게 굴어올 것이다. N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사실 N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였다.
그래서 그 날 우리 대화의 주제는 자신감이었다. 남의 숟가락을 챙겨주는 게 물론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자기 색연필을 야무지게 잘 챙겨두는 것이라든지, 자기 잘못이 아닌 일에 주눅 들지 않는 것이라든지. 그 날의 대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네 잘못이 아니다'였다. 우리는 그런 대화를 제법 자주 나누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N의 키팅 선생님이라도 되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이 글이 내 1인칭이어서 내가 N과 나눈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나는 N이 속한 소그룹 담당이었기에 N과 대화를 나눌 일이 많았지만 또 아마 N을 가장 많이 혼낸 사람도 아마 나일지 모른다. 다시 말해 나는 N에게 뭐 대단한 사랑을 주었다든지 N을 변화시켜 갔다든지 한 사람이 아니다. 키팅 선생님은 책 속에 계셨고, N은 그리고 나는 서투르게 하나씩 배워 가며 현실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같은 사람이 아주 많이 있었다. 6개월, 1년, 2년... 각자 삶에서 얼마간을 떼어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누나들 형들, 인도에서 한국에서 심지어 미국이나 독일, 브라질에서도 와서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한 수많은 누나 형들이 다 조금씩 그렇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N이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존재인 큰엄마 큰아빠(내게는 이모 이모부)가 계셨다. 누나 형들의 서툴지만 진심 어린 노력, 큰엄마 큰아빠의 든든하고 안정적인 사랑, 그 안에서 N은 점점 피어났다.
N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 피어난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교과서 읽는 모습을 보면 아이가 지금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흐름을 잡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아이는 노트에 힘주어 쓴 필기를 암기했고, 진지하고 성실한 얼굴로 교과서를 손가락으로 되짚으며 중얼중얼 읽었고, 최소공배수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찾아와 질문을 했다. 아이가 암기한 내용을 확인하고, 아이가 읽는 내용을 듣고, 아이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다시 풀어 설명해 주면서 나는 보았다. 아이의 눈에 반짝반짝 피어난 별들을.
아이는 공부를 잘한다. 머리가 좋고 똑똑하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이유는, N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주변 눈치를 본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때 책을 붙들고 있던 이유는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해하지도 못하던 <좁은 문>이나 <데미안>을 들고 있으면 그런 나를 대견하게 여기는 어른들의 흐뭇한 눈을 보는 게 좋아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라도 읽은 게 내 삶에 책의 근육을 길러 주었다. N에게도 그랬다. 나는 N이 책을 펴 놓고 씨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늘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씨름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쌓아 올린 노력이 모여, 네 삶을 자신 있고 당당하게 이끌어갈 힘이 되고 근육이 되어줄 거라고. 그러니 너는 괜찮다, 다 괜찮다고. 이미 과거를 돌아보는 담담한 눈을 가진 너지만, 그렇게 남들에게 전해 들은 너의 역사를 이야기해 주던 너지만. 앞으로 시간이 더 흘러 지금을 과거로 돌아보게 될 때, 색색의 벽화와 자동차 장난감, 친구들과 하던 캐럼 볼, 좋아하는 캐릭터 공책과 함께 노력했던 시간들도 흐뭇하게 떠오를 거라고. 그리고 그때 이 시간이 네게 풍성하고 다채롭고 행복한 기억이면 참 좋겠다고.
이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인도를 떠나올 때 N이 써준 편지에는 "자기가 슬플 때 위로해 주어 고맙다"고 써 있었다. 얼마 전의 영상 통화에서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말 하나하나는 내 평생 어느 때라도 N과의 시간을 떠올리면 훈장처럼 떠오를 것이다. 내가 잘해서가 아닌, 네가 잘해서 내게 남은 훈장으로.
그 이야기를 들은 건 작년이었다. 이모가 심각한 표정으로 스태프들을 모두 불러 모으셨고,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뭔가 할 일이 생겼다든지 손님이 오신다든지 아니면 바로잡아야 할 일이 있다든지 뭐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모가 무겁게 입을 떼셨을 때 나온 이야기는, 그런 일상적인 것들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서 마치 거짓말처럼 들리는 이야기였다.
P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아이들과 통화하기 위해 핸드폰 신호가 잡히는 곳으로 올라간 산에서, 총에 맞아서. 구구절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위험하고도 억울한 죽음이었다. 사건 경위를 들으며 나는 처음 들어본 정치 세력 이름 두어 개를 들었고, 사람이 다 같은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무자비함도 꼭 그만큼 들었다. 고향 마을에서 P의 형과 다른 어른들이 상황을 대략적으로 정리한 후에 P를 데리러 오기로 했고, 그때까지 P는 물론 다른 아이들도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를 하지 않게끔 했다. 애매한 소문으로 알게 되는 것만큼 끔찍하게 알리는 방법도 없을 테니까.
하필이면 그 주 내내 P는 우리를 찾아와 아빠와 통화하고 싶으니 전화기를 달라고 하곤 했다. 어영부영 거절하고 돌아선 그런 날 밤이면 우리끼리 앉아 심란해하고 눈물 훔치곤 했지만, 결국 P도 알게 될 일이었다. 흰 셔츠와 검은 바지를 좋은 것으로 구입하고, 가는 동안 기차에서 먹을 간식을 정성껏 준비하는 것밖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P는 자기를 데리러 온 목사님과 함께 떠났고 2주 후 돌아왔다. P가 돌아온 시기는 공교롭게도 내가 스리랑카에 가 있던 때여서 돌아오는 P를 보지는 못했는데, 그래도 잘 견디고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돌아와 보니 정말이었다. 그리고 손재주 좋기로 손꼽히는 L 특유의 멋스러운 글씨체로 'P와 P의 가족들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큼직한 카드가 벽에 붙어 있었다. P를 위한 아이들의 마음이었다.
어릴 때부터 P는 다정하고 섬세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였다. 늘 밝은 얼굴로 인사하고, 누나 형들의 손을 제 볼이나 어깨에 얹으며 애정 표현을 하고, 누나들이 새 옷을 사거나 머리를 평소에 다르게 묶거나 하면 예쁘다는 말을 제일 먼저 해주는 사람도 P였다. (근데 빈말은 안 한다. 진짜로 예쁠 때만 예쁘다고 해준다.) 한 번은 누나 한 명이 머리를 말리는 걸 보고 자기가 해 주겠다고 드라이기를 쥔 적도 있다. 그만큼 또래 인도 남자아이들이 갖기 쉽지 않은 섬세한 결을 가진 아이다.
또 예술적인 것들에 관심이 많은데, 그림 그리기, 노래, 춤, 악기 연주 등 다재다능하다. 야무지고 깔끔한 성격에 옷 입는 것도 늘 멋쟁이여서 P는 우리 집 패션계의 얼리어답터로 통했다. 무대에 있으면 더욱 돋보였다. 다 같이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춰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데, P가 그런 아이였다. P가 타악기인 돌락이나 봉고를 연주할 때면 감탄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두루두루 잘 하기도 잘 했지만, 어정쩡하게 하는 건 싫어했다. 뭔가 할 때 자기 성에 찰 때까지 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는 얼마나 표정이 진지한지 모른다.
그러던 P가 사춘기를 지내면서 다정하던 모습보다는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또 하필 이런 아픈 일을 겪게 되어 유독 더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대견하게도 P는 힘든 일을 겪으며 우리가 알던 어린아이의 면 위에 새로운 면을 덧그리는 시기를 잘 보내고 있었다. 한 번은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시는 분과 통화를 했는데, 사건 경위와 그 이후의 이야기를 P는 차분하게 한 문장씩 이야기했다. 힘들면 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P는 그런 내게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힘든 이야기를 조금씩, 정리해 풀어내고 있었다.
P의 상처와 아픔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함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우리는 그저 함께 마음 앓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있었다. 특별한 위로의 말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누구도 억지로 찾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있으니 괜찮다든지 그런 식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함께여서 감사했다. 우리의 소중한 가족 P는, 여전히 우리의 소중한 P로 우리와 같이 있다.
먼 훗날 P가 이 시간을 돌아볼 때, 때로는 세상 홀로인 듯 느껴지기도 했을 흔들리는 시간에, 우리가 함께 있음을 보았으면 한다. 한 프레임의 사진 안에, P를 환영하는 카드가 붙어 있는 한 방 안에, 한 집 한 가족 안에 우리가 함께 있음을.
그 후로도 시간이 더 흘러 P는 더 성장했고, 지금쯤이면 내가 보지 못한 사이 더 성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먼 훗날'은 더 가까워지고 있다. 오늘은 어제가 되고, 내일은 오늘이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언제 어디선가 우리 다시 만나면 또 다정하게 웃어 줄 P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오늘 교회를 다녀왔다. 장판 무늬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냥 바닥이 바닥이려니 밟고 다녔다. 그러나 이러다가도 어느 날, 아무럴 것도 없는 어느 날 불현듯 장판의 사금파리 무늬를 보며 이 기억들을 하나하나 건져 올리는 날이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과 함께 살지 않게 된 지도 어느새 제법 시간이 흘렀다.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그러나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아마 앞으로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나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에도 아이들은 과거를 과거로 두고 지금도 조금씩, 하루씩, 내일로 나아가고 있다. 살아가고 있다. 지금 내가 한국에서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아이들 24명은 다 함께 있고, 아이들에게는 큰엄마 큰아빠 누나 형들이 있다. 나뿐 아니라 더 이상 아이들과 같이 살지 않는 많은 누나 형들의 마음도 아이들에게 머물러 있다.
이 모든 사랑받은 기억이, 함께 웃고 울고 먹고 자고 떠들고 배우고 놀았던 기억이, 살아가는 날 중에 언제 돌아보아도 아이들을 향해 미소 지어 주었으면 한다. 언제 돌아봐도 따스하게 품어주는 기억으로, 아이들의 힘이 되었으면 한다. N에게, P에게,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도.
작은 마음 하나 멀리 편지처럼 띄워 보내는 것이 오늘 나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