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한 뼘 더 아름다워져
가끔 하루가 회색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딱히 무어라 꼬집어 말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는데 유독 피로한 그런 날, 웃을 일도 대화할 일도 없어서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밤을 맞는 그런 날이 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왜일까. 마치 비늘이 반짝거리는 물고기가 강에서 튀어 오르는 것처럼 너무나 생생하고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들이 있다.
가서 씻으라고 하면 "너무 추워!" 하고 입을 삐죽 내밀던 일곱 살 소년의 표정이라든지,
별생각 없이 장난스럽게 노래하듯 "거기서 뭐 해~" 했을 때 내 말투와 똑같은 멜로디로 "아무것도 안 하는데~'"하고 발을 동당거리면서 대답하던 열두 살 소년의 뒷모습이라든지,
한국에 돌아와서 영상 통화를 하다가 "인도에 언제 다시 올 거야?" 물어보며 몸을 배배 꼬던 아홉 살 소년의 내리깐 속눈썹이라든지,
반짝이는 작은 순간들은 소중하다. 그런 아주 사소한 것들이 사실, 전혀 사소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2012년 12월에 아이들을 처음 보았으니 어느덧 우리가 알게 된 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도 부단히 달라졌지만, 한창 키와 지혜가 자라는 나이를 살고 있는 아이들은 더했다.
처음 만난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누구 하나도 같지 않지만, 우리는 다 그렇게 꽃처럼 자라났지만, 그 변화의 폭이 남들보다 더 큰 아이들도 있다. 한눈에 보아도 너무나 다른,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다른 아이들 말이다. 그러나 실은 달라졌다기보다 그 안에 심겨 있던 것들이 피어났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달라진 아이를 꼽자면 나는 H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사실 나와 H는 많은 대화를 나눈 편은 아니다. 아이들이 24명이나 있다 보니, 양육자가 여럿이라 해도 한 명 한 명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세세히 지켜보기는 어려웠다. 성격도 제각각이라 말썽 피우고 시끄러운 녀석들도 있는 반면,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는 녀석들도 있어 더 그랬다. 심지어 양육자들을 아주 은근하게 피해 다니면서 있는 듯 없는 듯한 태도로 그런 낯가림을 1년 정도씩 너끈히 끌고 가는 아이도 있었다.
아무렴 어느 날 갑자기 만난 서로를 보자마자 뚝딱 신뢰하고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만, 만난 그 순간부터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를 지켜볼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나이대 별로 소그룹을 만들어 매일 소그룹 시간을 가졌다. 제일 큰 아이와 제일 작은 아이의 나이 차가 어언 열 살 남짓 되다 보니, 다 같이 갖는 시간만으로는 아이들이 자기 단계에 맞게 배우기 쉽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다.
H도 누나 형들에게 자주 다가오는 아이는 아니었고, 다른 소그룹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정신없이 들들 볶이고 있던 나는 H를 혼낼 일이 여간해선 없었다. 그래도 우리 집에서 H가 혼나는 걸로 손꼽히는 편이라는 건 잘 알았다. 그런데 장난을 많이 쳐서 자주 혼나는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자기 고집이 강한 건 둘째치더라도 별것 아닌 걸로 자기보다 어린아이와 극심하게 싸우거나, 별것 아닌 걸로 혼나는 일이 많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혼내고 있나 싶어 양육자 입장에서도 맥 빠지는 일이지만, H를 혼내는 걸 옆에서 보기만 해도 심란해졌다. 거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허공으로 주먹질을 하고, 저 얼굴이 다시 펴질까 싶을 만큼 심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H를 혼내다가 할 말을 잃는 다른 언니를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단기 봉사 팀으로 왔을 때, 아주 조심스럽게 이모에게 여쭤본 적이 있었다. 혹시 H는 조금... 마음이... 아픈가요? 하고. ("여기 와서 천재 된 거다, 얘!" 하고 대답하셨다. 나는 지금도 이 말이 잊히지 않는데, 한 마디로 아이의 과거와 현재가 훅 느껴지게 만드는 명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H는 다른 아이들과 물과 기름처럼 달랐다. 항상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노를 실탄처럼 잔뜩 채워 넣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아이였다. 무언가 물어도 짜증 섞인 말투로 웅얼웅얼 대답하고는 말아 버렸고, 그 분노의 포인트를 일반적인 관점에서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사진마다 표정을 다 잔뜩 찌푸리고 있어, NGO 후원자들에게 보내 드릴 사진을 고를 때마다 고심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뭐라고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간들이 그런 H조차 변하게 만들고 있었다. H를 혼내다가 할 말을 잃던 언니는 때로는 분명한 단호함으로, 때로는 예뻐 죽겠다는 표정으로 H를 품었다. 묵묵히 어깨를 잡아 주고, 고민을 백 우물쯤 길어낸 후 한 바가지의 말에 담아 내주던 형도 있었다. 언어 습득이 빨랐던 인도인 스태프가 아이의 모어(母語)로 말을 엿가락처럼 부드럽게 줄줄 풀어 아이에게 설명해주던 모습은, 아무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보기에도 충분히 아이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런 크고 작은 순간들이, 뭐라고 단언할 수 없는 그런 순간들이 모여 H의 표정을 바꾸어 가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 사람을 길러내는 건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 사람의 애정과 시간을 약재처럼 집어넣고 오래 뭉근하게 달이면서 길러내는 것이다. 이 과정은 눈에 보이지도 않거니와 언어로 분절되지도 않는다. 그저 작은 에피소드로 기억될 뿐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에게 우리를 어떻게 길렀냐고 물으면,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아는 그 답을 차마 말로는 다 담지 못하듯이. 그저 세 살 땐 이런 일이 있었지, 일곱 살 땐 그런 일이 있었지, 아니 글쎄 열다섯 살 땐 어마어마했지,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하나씩 들어 어렴풋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H는 변해갔다. 유난히 그림 그리는 것에는 끈질긴 노력과 애정을 보이던 H였기에, 한 번씩 호들갑을 떨며 칭찬을 하면 수줍게 웃기도 했다. H의 그림은 유난히 선이 자잘했다. 연필로 꾹꾹 눌러 그리는 일이 없었다. 슥슥 수없이 많은 선을 그어 하나의 선으로 만들었고, 그림체도 무척 섬세했다. 찌푸린 표정으로 발을 쾅쾅 구르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H의 모습을 감안하면 의외인 그림체였다. H의 안에는 어떤 섬세한 감정들이 실꾸리로 홀맺혀 있던 것일까?
분노를 걷어내기 시작한 H의 얼굴에는 놀라울 정도의 수줍음이 어려 있었다. 어찌나 수줍음을 많이 타던지, 나중에는 칭찬을 해 주면 무척 좋아하면서도 그 이상의 대화가 어려울 만큼 스멀스멀 멀어져 갔다. 그렇게 잔뜩 귀엽게 굴어 놓고, 정작 먼저 당당하게 말을 걸기 시작하는 건 상대방이 멀리 있을 때였다. 내가 H와 20분가량 길게 일대일로 대화를 나눠 본 것도 H의 채근으로 현지에 있는 스태프가 걸어준 영상 통화를 위해서였다. 몇 번이나 통화를 하면서도 H는 수줍게 웃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H 안에 가득 쌓인 감정의 실꾸리가 다 풀리면, H는 엉망진창으로 엮여 있던 그 실꾸리를 다시 곱게 겯어 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듯한 H는, H가 그리는 연필 선만큼이나 미세한 H의 발돋움은, 감사한 기적이다. 오늘에 그치지 않고 내일마저 기대하게 하기에 더 감사한 기적이다.
내가 인도에 도착한 즈음은 막내 소그룹을 맡던 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얼마 남지 않은 때였으므로, 나는 자연히 막둥이 그룹을 맡게 되었다. 나로서는 한 달 손님으로 와서 본 게 다인 사이, 아직은 서먹하던 시절이었다. 언니는 능숙하게 소그룹을 인도한 다음, 맨 마지막에 다 같이 둥글게 손을 잡자고 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던 I는 내키지 않는 느낌을 적대적으로 드러내면서 슬쩍 잡았다가 소그룹이 끝나기도 전에 내 손을 패대기치듯 내팽개쳤다.
남녀가 유별한 인도 문화에, 아직 익숙지 않은 내가 부담스럽고 어려웠을 수는 있다. 그렇다 해도 내겐 상처였다. 아이보다 나이가 세 배는 많았어도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씨근덕거리며 내 손을 팽개치는 경험을 할 일이, 살면서 뭐 얼마나 되겠는가. 소그룹을 마치고 그날 밤 나는 언니들에게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언니는 가만히 다 들어준 뒤 대답했다. "물론 네 말대로 문화도 있지만 I가 마음에 분노가 많은 애라서 그래. 아버지에 대해서도 그렇고 분노가 많다고 하더라고."
그 말에 나는 I에 관한 기억들을 곰곰이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한 달 동안 손님으로 지낼 때 I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다시 왔을 때 만난 I가 막내 소그룹에 있다는 것, 즉 생각보다 어리다는 것에도 무척 놀랐다. 다른 막둥이들이 팀원들에게 엉겨 붙고 매달리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때 I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기 때문에 은연중에 I가 어린 나이대라고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시 올 생각으로 찬찬히 보지 않았다면 그냥 잊었을 수도 있을 만큼, 그만큼 I는 우리 팀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와는 거리를 둘래야 둘 수 없는 사이가 되었으니, 감추지 못한 속내가 드러난 거였다.
앞으로 이 아이와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기우만은 아니었다. I는 또래보다 눈치가 빠르고 잔머리도 잘 굴러갔다. 톡 쏘는 말도 잘 고를 줄 알았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사람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아이들에게 수군거려 나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아이였다. 그런 모습이 슬쩍슬쩍 비칠 때가 있었지만, I는 단 한순간도 밉지 않았다. I는 사실 무척 여리고 잔정이 많은 속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I는 그 속내를 아주 조금씩, 한 발 다가왔다 두 발 물러서고 또 세 발 다가왔다 두 발 물러서며 천천히 드러냈다.
에이즈 환자의 가정을 방문하고 파김치가 되어 대문을 들어서는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하는 사람은 I였다. 다른 아이들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줄 때 아이는 내 앞까지 재빨리 뛰어와 한 번 꼭 안아주고는 궁시렁거렸다. "누나는 맨날 안아주는 것만 좋아해." 저가 먼저 안아줘 놓고, 누가 보면 내가 억지로 안기라도 했다는 투였다. 그렇게 찌푸린 얼굴로 실컷 궁시렁거려놓고 한다는 게 내 손에 들린 무거운 노트북 가방을 들어주는 일이었다. 그래 놓고 또 자기밖에 없지 않냐며 으쓱으쓱. 이런 아이를 어떻게 1초라도 미워할 수 있을까? 풍선껌처럼 톡톡 튀는 이 매력적인 사랑둥이를.
아이의 마음에 분노가 많다 했다. 내가 만났을 때에도 이미 많이 풀어진 상태였지만 내 손을 팽개치던 마음도 여전히 아이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기억에서도 다 흩어졌지만, 아이가 비수처럼 던진 말에 멍하니 입만 벌린 채 당황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이가 그런 말을 던지는 순간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방금까지 분위기가 좋았다가도 갑자기 그런 말을 툭 던지며 벌컥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고, 기분 좋게 웃다가도 다른 아이 귀에 대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뭐라 수군대기도 했다. 교실에서 만났다면 같은 반 친구 하나 마음을 휘갈겨 놓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럴 때마다 소그룹을 마치고 아이를 따로 남게끔 했다. 꼭 I뿐 아니라 한 두 마디 제지로 수습이 안 될 만큼 유난히 소그룹 진행을 방해하는 아이가 있으면 소그룹을 마치고 남아 일대일로 대화를 하던 게 우리의 관행이었다. 나에게 그 시간은 다른 분위기에 휩쓸리는 일 없이 오롯이 아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아이들에게 그 시간은 때로는 입 꾹 다물고 눈물만 뚝뚝 흘리며 혼나는 시간일 때도 있고, 진중하게 속을 터 놓는 시간일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심지어 마치 나와 노는 시간처럼 인식한 때도 있던 것 같다. 그 시간을 통해 우리가 가까워진 건 사실이니까 뭐 그런 인식도 영 틀린 건 아니지만.
아무튼 I는 그렇게 남는 일이 많은 편이었고, 혼자가 되면 나도 I에게만큼은 빙빙 돌리는 일 없이 의표를 고스란히 전하곤 했다. 가장 많이 한 말은 아마도... "좋으면 좋다고 해! 괜히 싫다고 하지 말고!"였을 것이다. 정이 많고 사람을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아이가 대체 왜- 화가 나거나 슬픈 때도 아닌, 아무 때도 아닌 때에 괜히 사람을 찌르는 말을 하는지.
I는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차마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시선을 불안하게 굴리며 서둘러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뒤돌아서 나가면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말썽꾸러기 친구에게 '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나는 혼났지만, 제압당하지 않았다'라고 으쓱대는 미소였다. 그럴 때면 저 아이가 내 말을 듣기나 한 건지, 방금까지 한 대화가 다 무의미하게 느껴져 힘이 빠졌다. I와의 시간은 씨름 같았고, 나는 내가 그 씨름에서 속수무책으로 샅바를 잡히고 있는 기분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I의 따뜻한 면은 그런 내 모자란 애정마저 흡수하며 피어났다. I는 그렇게 으쓱거리면서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 말을 잘 들어주었던 것이다. I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었고, 우리 사이에는 '좋으면 좋다고 말하는' 연습이 시작되었다. 나를 꼭 안아주고 뒤돌아 궁시렁거리는 것도, 동공 지진을 일으키면서도 눈을 맞추고 내 말을 들으려 하는 것도, I 깐에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그래서 나도 더 뭐라 않고 같이 뒹굴고 장난치며 놀았다.
한 번은 전에 왔던 누나 한 명이 방학을 맞아 한 달 동안 지내러 온 적이 있었다. 그 누나가 소그룹 시간을 진행하고 있는데, I가 또 '꼬장'을 부렸다. 다른 아이들의 탄력까지 받으면서 흐름을 탄 그 날의 심술은 거의 무례한 수준이었다. 오랜만에 온 그 누나 얼굴 보기가 민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도 화가 잔뜩 나서 유독 어깃장을 놓던 세 녀석을 앉혀 놓고 혼냈다. 하나씩 차례차례 혼내면서 다른 아이들에게는 '잘못했다,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그 누나에게 사과하러 가라고 했다. 그러나 I만큼은 끝끝내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였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 I를 따로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았다. I 손을 붙들고 문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딱딱한 뒷모습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쟤 오늘 써니디디한테 되게 혼나겠구나...'라고 쓰여 있었다. 실제로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방 문을 닫자마자 I는 서럽게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얘 저기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거든...
아이는 끅끅 울면서 말했다. 자기도 그렇게 무례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고, 그 누나한테 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그 날 우리가 나눈 대화의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늘 하던 대화와 비슷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 우리가 주고받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포옹은 기억난다. 꼭 우리의 관계를 고스란히 시각화해놓은 것 같은 포옹이었다. 웃고 파고들다가도 훅 찌르고, 찌르다가도 끌어안으며 밀당 같은 씨름을 계속해 오던 우리가 마침내 이뤄낸 어색한 포옹이었다.
우리의 씨름은 그렇게 끝났다. 물론 어린이는 어린이니까, 그 후로도 장난을 많이 치고 혼나는 일도 가끔은 있었지만- 적어도 감정싸움을 하는 일은 없어졌다. 하루하루 물 먹은 것처럼 피어나던 I의 다정함은, 밀당까지 할 줄 알아서 더욱 사람을 흐물흐물 녹여 놓을 만큼 감각 있는 다정함이었다. 그 차이를 가장 명확하게 본 건 오래전 내가 왔던 것처럼 단기 봉사 팀으로 온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이 달라진 것을 볼 때였다.
단기 봉사 팀으로 온 사람들을 피해 다니던 I, 한 번도 가까이 와서 웃거나 말을 걸거나 '귀여운 아이'답게 굴지 않던 I였는데. 단기 봉사 팀으로 온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장난도 치고, 그중 몇 사람이 나중에 I의 이름을 제일 먼저 언급할 만큼 살갑게 구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누구의 기억에라도 뚜렷하게 남을 만큼 사랑스러운 다정함, 저게 I의 본모습이구나 싶었다.
I는 거의 동물적이라 느껴질 만큼 눈치가 빠르다. 인도에 있을 때도 같이 지내던 누나가 한국으로 돌아갈 즈음이 되었다 싶으면 가까이 가서 "누나는 이제 곧 돌아갈 거지?"라고 묻곤 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어도 눈치가 빠른 아이라고 할 텐데, 이건 정말 동물적 감각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아직 비행기 표도 안 끊었는데, 나도 아직 확실히 모르는데 얘가 어떻게 아는 거지? 하고 신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말은 그만큼 I가 애정을 갖고 관찰하고 있다는 뜻이다. 관찰력이 좋고 눈치가 빠른 면은 타고난 것도 있지만, I가 주변 사람들에 대해 어마어마한 애정을 갖고 있기에 더 계발된 측면도 있다. 세 사람의 형과 누나가 동시에 떠나던 날 밤, 전에 없이 우울한 얼굴로 와서 "왜 한국인 누나 형아들은 다 집에 돌아가?"라고 묻던 아이의 얼굴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떠올리면 찌르르 아파 오는 기억으로 내 마음에 맺혀 있다. 한 달 동안 세미나로 자리를 비운다는 내게 "한 달을 가는 것도 영원히 가는 것만 같아"라고 말해 내 심장을 콱 쥐어버린 날도 마찬가지다.
나는 I가 기대된다. I가 인간에 대해 갖고 있는 이 애정이 앞으로 I의 삶에서 어떤 도구를 통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기대되어 견딜 수 없다. 그 날이 오면, 언젠가 그 날이 오면 나는 어린 시절 I가 내게 들려주었던 반짝거리는 말들을 I에게 돌려줄 생각이다. 공시랑공시랑 중얼거리던 아이의 반어법도, 그런 와중에 한 번씩 솔직하게 직구로 던져 오던 진심 한 조각도, 나는 일기장 구석구석에 부지런히 모아 놓았다.
혼자 사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럼 밤에 귀신 나와서 귀신이 누나 잡아갈걸!" 하고 놀리다가도, 그런 거 안 믿거든, 아무도 안 올 거거든, 하는 내 말에 "아 그럼 내가 갈게!" 하던 것도.
우리 사진을 왜 이렇게 많이 갖고 있냐며 대체 누가 다 준 거냐며 궁시렁거리기에 "나중에 너 다 크면 앨범으로 만들어서 줄게, 내가 준비하고 있거든." 했더니 "아니 인도에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 무슨 준비를 해?" 하고 또 구시렁거리다가 대뜸 "나중 말고 지금 와! I want you NOW!"라고 외치던 것도.
"우리 같이 살 때는 누나가 나를 맨날 혼냈어! 누나는 맨날 혼내기만 했지!" 하다가도 그 시절이 그립다고 말하던 것도. "내가 맨날 혼냈다면서! 그래도 좋냐?" 하면 으응... 하고 끄덕이던 것도. 그러면서도 그 시절이 우리 삶에 주어진 선물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오늘도 내일도 다 선물일 거야, 하면 또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도.
"거기서 뭐 하고 있냐~" 하고 노래하듯 아이를 불렀을 때, H가 표정을 찌푸리며 'No!'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H는 발을 동당거리며 내 말투와 똑같은 멜로디로 "아무것도 안 하는데~" 하고 노래를 불렀다.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안 믿은 누나들이 많았다.
H는 지금도 전화를 하면 내 안부뿐 아니라 가족의 안부까지 싹싹하게 묻는다. 특히 불과 며칠 봤을 뿐인 내 친동생을 얼마나 찾아대는지. 동생한테 "너 나 몰래 얘한테 뭐 먹을 거 줬냐?"라고 진지하게 물어봤을 정도였다. 심지어 평생 H의 입에서는 들을 거라고 기대도 않았던 "I love you"라는 말도 음성 메시지로 남겼다.
"나는 2년을 같이 살고도 못 들은 말을 네가 들었네..." 하면서 씁쓸한 척했지만 사실은 무척 기뻤다. H가 이제 그런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을 만큼 감정 표현에 능숙해졌구나.
속눈썹을 내리깔고 몸을 배배 꼬며 "누나는 인도에 언제 다시 올 거야?" 묻던 I는, 입술을 깨물며 애써 웃는 나를 몇 번 포착한 뒤로 이제 그 질문을 하지 않는다. 대신 깔깔 웃으면서 돌려 말한다.
"다들 요즘 엄청나게 말 안 들어. 이제 누나가 인도에 다시 와도 아무도 누나 말 안 들을걸? 누나한테 인사도 안 할걸?"
"거짓말. 그래 놓고 네가 제일 먼저 와서 인사할 거지? 막상 가면 다 내 말 들어줄걸?"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당장 인도에 와서 시험해 보든지!"
마음으로는 비행기 표 끊었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다 주옥같아서, 아이가 살면서 잊히기엔 너무 아까운 반짝거림이라서, 대신 적어 둔다. 언젠가 아이들이 이 시간의 작은 조각들은 잊어버릴 만큼 훌쩍 자라면, 그때 돌려주어야지. 나의 회색빛 날들을 반짝거리게 해 준 아이의 빛을. 아이가 작게 발돋움할 때마다 세상이 한 뼘씩 더 아름다워지는 걸 볼 수 있었던, 그 소중한 순간들을.
너무나 고마운 아이들의 아이다움을, 아주 별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보물처럼 또 꺼내 본다. 그리고 오늘도 아이들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 사랑한다고, 넘치는 마음을 허공에 꾹꾹 외쳐 본다. 적금 붓듯이 꾸준하게 이런 날들을 모으다 보면 만기 해약의 그날도 언젠가 오겠지. 그때까지도 아이들은 계속해서 발돋움하기 바쁠 테니, 그 뒷모습은 내가 대신 스케치해 보관해 두어야겠다. 이건 그냥 스케치가 아니라, 세상이 아름다워진 기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