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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Feb 21. 2017

우리 내일 또 만나

언제나 같은 표정으로


  언제 보아도 포슬포슬 웃음이 나오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도 내겐 그렇다. 사실 상황은 제법 심각한 날이었다. 우기가 몇 달이나 남은 한여름이었는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밤새 폭우가 내렸다. 인도는 우기에만 비가 몰아서 오고 평소에는 쨍쨍한 날들이 이어지기 때문에 나무들도 그 두께가 큼직큼직하고 도로의 배수 시설도 많지 않은데, 그러다 보니 예상치 못한 폭우에 속수무책이었다. 커다란 나무가 우지끈 떨어지면서 전기 시설을 건드려 정전 상태가 하루를 넘겼고, 앞집 뒷집 우리 집 할 것 없이 마당이 엉망이었다. 지대가 좀 낮은 방에는 물도 들어와서 고생을 했다.


  아침이 밝고 마당 청소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멀뚱멀뚱 지켜보던 막둥이 녀석이 청소는 안 도와주고 우산으로 콕 장난을 걸어와서 난데없이 스트리트 파이터 한 판이 벌어지던 참이었다. (나의 무기는 쌍 쓰레받기...) 우리 막둥이는 키도 작고 덩치도 꼭 다람쥐 같이 작지만 힘은 세서 의외로... 내가 진다. 우리는 좀 뭐랄까 톰과 제리 같은 사이였다. 나는 그게 G와 놀아주는 내 방식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주변에서 다들 우리는 친구라고 많이들 그랬으니 뭐 그냥 친구 하기로 한다.


막둥이 G의 사랑스러운 눈웃음
...그리고 그의 성격

  막둥이 G는 (내 기준) 신기한 아이였다. 덩치도 제일 작고 나이도 어리고, 형들은 위로 23명이나 있는데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남들 기 죽이고 다녀서 걱정이었다. 처음 왔을 때는 형들을 너무 때리고 다녀서 오죽하면 깡패 소리까지 들었다고 했다. 엄청난 장난꾸러기에 천둥벌거숭이여서 세상 재미있어 보이는 건 다 하고 다녀야 속이 풀리는 녀석이기도 했다. '형' 소리도 안 붙이고 자기보다 두 배는 큰 형들을 이름만 찍찍 부르고 다니면서도 또 옆에 가서 예쁜 눈웃음 지으며 귀엽게 막내 노릇을 할 줄도 알았다. 만인의 막둥이이기도 하고, 형들이 워낙 착하기도 했어서- 우리 막둥이 G의 기죽지 않는 태평천하는 계속되었다. 쭉.


1인칭 형아 시점

  G를 보고 있으면 '쟤는 정말 즐겁게 사는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G의 발꿈치 뒤에 즐거움이라는 꼬리표가 꼭 붙어서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G는 정말 아이다운 아이였다. 키득키득 웃는 소리, 마구 늘어놓은 블록이나 자석 막대 같은 장난감들, 정리하라고 하면 티 나게 건성인 손길로 그저 빠르게만 툭툭 정리하던 몸짓, 다 만든 블록을 가져와서 자랑할 때 우쭐거리는 그 표정, 정말 좋아해서 자꾸 읽어달라고 하던 곰돌이 푸 책, 베갯머리에 가져다 놓았던 곰인형... 상황상 일찍 성숙해야 했던 형들에게는 희미했던 아이스러운 해맑음이 G에게는 있었다. 그런 G의 해맑음을 다들 오래 지켜주고 싶어 했다. 물론 그래도 배워야 할 건 배워야 했다. G가 가진 야무지면서도 영악한 일면은 나쁘게 발현되면 또 굉장히 얄밉게도 굴 수 있는 면이었으니까 더더욱.


  한 번은 N과 싸우다가 화가 나서 무척 나쁜 말을 했다가 무척 혼난 적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읜 N에게 부모님을 입에 올리며 욕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N도 무지막지하게 화가 났고, G의 얼굴을 할퀴었다. 상처를 남기는 정도의 몸싸움은 우리 집에서 큰엄마가 회초리로 엄하게 다스리시는 사항이었지만 그 날만큼은 예외였다. G는 N이 자기 얼굴을 할퀴었다며 잉잉 울었지만, 식구들 중 그 누구도 G에게 그대로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결국 방에 혼자 꽁 틀어박혀 있던 G는 나중에야 비척비척 N에게 사과했다. 그런 식으로 G는 조금씩 자기의 태평천하를 남들과 공유하는 법을 배워 나갔다. 모든 곳이 학습장이었다.


  우리는 청소도 다 같이 하고 일도 다 같이 했는데, 막둥이도 물론 같이였다. 그 고사리 같은 손에 팔랑팔랑 (허세용) 목장갑을 끼고 마당을 정리했다. G는 청소를 깔끔하게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같이 하는 놀이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나중에는 자기 할 일을 대강 뭉개 버리고 자꾸 도망가서 G와 같이 청소하는 아이들의 불만이 많이 제기되었다. 그러면 이름을 부르며 찾으러 나갔고, 그러면 또 형제 많은 집의 흔한 놀이가 시작되었다.



  G는 분명 똑똑하고 야무졌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기보다는 그냥 해야 할 때만 딱 하고 빠지는 편이었다. 그래서 시험 기간에는 제일 먼저 공책을 들고 와서 누나 옆에 앉았다. 꼭 해야 되는 거라면 피하지 않고 미루지 않고 빨리 끝내 버리는 게 G의 엄청난 장점이었다. 덧셈 뺄셈을 하기 위해 작대기를 그리고 손가락을 다 동원해 세는 모습이 참으로 하찮아서 얼마나 귀여웠는지.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기만 하는 녀석 같아도 진지할 땐 진지할 줄 알았고, 이맘때는 고향 집에서 뭘 한다든지 하는 다소 감성적인 이야기도 은근히 잘 풀어놓곤 했다.


이만한 초콜릿(L), 완전 맛있음(O), 단돈 2루피(V), 3개 사주세요(E)

  밖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들도 많이 했는데, 어느 날은 손가락으로 LOVE를 만들면서 손동작에 맞춰서 말하는 걸 배워 와서 해 줬다. 중간에 '정말 맛있음'을 빼먹어서 그게 LOVE인 줄 몰랐던 나는 초콜릿을 사달라는 건가 고민했다. 때마침 밸런타인데이 하루 전날이었다. G는 이게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짓더니 개의치 않고 다시 해주었는데, '3개 사주세요'만 기억하고 그게 알파벳 E 모양이라는 건 기억을 못 해서 또 이상하게 했다. 그래도 다행히 두 번째는 LOVE를 포착하고 같이 웃었다. (그리고 사정사정해서 사진을 찍었다.) 그냥 매일이 유쾌한 시트콤 같은 날들이었다.



  그런 G의 길지 않은 인생 최대 위기는 학교에 다닌 지 2년 차가 되었을 때 찾아왔다. 우리 집에 있는 아이들은 G를 제외하고 23명 모두가 한 학년에 여러 명씩 있었다. 같은 집에서 같이 나가면 다 삼삼오오 흩어지는데 G만 혼자 가야 했던 것이다. 첫 해야 뭐 학교 다니는 게 다들 처음이니까 각자가 긴장하고 있었을 거고, 그렇게 새 친구들을 사귀면서 괜찮았다. 그런데 방학 때 고향 집에 다녀와서 새 학년을 맞으려니 이 녀석이 덜컥 겁이 났던 거다. 아프다고 꾀병 부리면서 학교 가는 걸 최대한 미뤄 보려다가, 정 안 되니 눈물 퐁퐁 작전으로 갈아탔다. 눈물도 안 나는데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남 우는 얼굴 보면서 그렇게 웃음을 꾹 참기도 처음이었다.


  이 눈물바람은 G의 새 학기 관행이 되었고 아직도 새 학기가 되면 병아리처럼 입을 삐쭉거리고 있는 G가 사진에 동동 담겨 온다. 여전히 하찮고 귀엽다. 그러나 G가 이렇게 하찮게 귀엽고 사고 치고 혼나도 해맑게 클 수 있는 데는 누군가의 든든한 조력이 있었다.




  G의 친형인 U였다. 24명 아이들 중에는 친형제가 같이 와 있는 경우가 몇 있는데 U와 G도 그랬다. 옷도 아무렇게나 해뜨리고 물건도 마음껏 늘어놓고 히히 웃는 G와 달리 U는 제 옷차림이며 제 자리를 얼마나 깔끔하고 야무지게 챙기는지. 한 날 한 시에 산 옷도 U의 옷은 새로 산 옷처럼 눈이 부셨다. 워낙 손끝이 야물기도 하지만 동생이 워낙 자유분방한 영혼이다 보니 U는 자기 관리보다 동생 뒤치다꺼리를 더 많이 했다.



사실은 U도 형아들 뒷모습을 보고 자라는, 아직은 아이인데.




  G가 형들을 때리거나 실내화를 잘 챙기지 않거나 하는 날들이 적립금마냥 쌓이고 쌓여 한번 크게 혼나는 날이면, '앞으로 잘 할 거야?' 하는 질문으로 이 시간이 마무리될 것 같으면 G는 꼬박꼬박 곧잘 대답을 했다. 그러나 G가 정말로 잘 할 리 없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았다. 그래서 U는 그럴 때마다 동생을 도와주라고 같이 한 소리 들었다. 내가 내 동생 때문에 엄마한테 혼났으면 동생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을 것 같은데, U는 표정만 좀 찌푸린 채 단호한 목소리로 G에게 잔소리를 달달 하면서 G를 가르쳤다. (G는 콧등으로 듣는다.) 이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 G가 혼날 만한 행동을 할 때는 누가 뭐라기도 전에 U가 단속에 나섰다. 딱딱거리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 제 동생이 혼나지 않길 바라는 형의 다정한 마음이었다. G가 그 마음을 알까 모르겠다만.



U의 얼굴에 묻은 잘생김
...그리고 그가 G의 형이라는 게 느껴지는 순간


  처음 만났을 때 U는 말을 걸면 마치 미모사가 움츠러들듯 눈썹부터 확 찌푸리면서 중얼중얼 대답을 하는 아이였다. 성격이라기보다는 수줍음이 많아서 그랬다. 잘해주면서도 뒤에서 은근히 잘해주고 티 내지 않는 편이었다. G에게도 그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한 번은 누나 한 명이 빨랫감이 가득 찬 바구니를 들고 가는 걸 보고 말없이 쓱 같이 들더니 고맙다고 말해주는 누나에게 welcome, 짧게 툭 말하고는 가버려서 누나 마음을 뿌듯하게 했던 적도 있더랬다. 안 그럴 거 같은 티를 다 내놓고서도 다정하게 주변을 돌볼 줄 안다.



  G가 해야 할 일만 꼬박 마치고 놀았다면, U는 매 시간 성실한 편이었다. 노트 필기도 같은 학년에서 가장 정갈하게 했고, 숙제가 무엇인지도 (거의 매일) 말이 갈릴 때면 대개는 U의 말이 가장 정확했다. 숙제가 아무리 많아도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열심히 했다. 아침형 인간이었던 U가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게 보이면 내일 아침에 하기로 약속을 하고 침대로 보내면서도 걱정을 안 했다. 다음 날이면 아직 새벽이라고 할 만한 아침시간에 약속한 분량을 꼭 지키기 위해 일어나 숙제를 하고 있는 U를 볼 수 있으니까.



  막둥이 G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의외로) 잘 나누는 편이라면, U는 오해를 받으면 받았지 자기 속내를 훌훌 털어 말하는 편은 아니었다. 입을 꾹 다물고 표정을 찌푸려 불만을 표현해도 그 불만이 뭔지 속속들이 터놓는 법은 잘 없었다. 한번 터지면 속사포이기는 해도, G에게 그렇듯 다른 친구들이나 누나들 형들에게도 자기 애정을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늘 G와 톰과 제리 시트콤을 찍느라 바빴던 나는, 그래서 U에게 별스럽게 감동적인 말을 들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비행기를 타러 가기 직전 마지막 저녁 식사 때- 밥을 퍼 담아주는 내게 U는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 언제 다시 올 거야?
- 나도 모르지.
- 그럼 내일 다시 와.


  꼭 '오늘 학교 끝나고 와' 정도의 무게감이었다. 마치 당연하게 오늘 가면 내일 오는 것 같은 말투. 그 가벼운 말투에 담겨 있을 마음에 찡했다. 그로부터 1년가량 시간이 흐른 후 걸었던 어느 날의 영상 통화에서도 U는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똑같은 말을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했을까? 하나하나 다 진심이었을 그 마음을 생각하면 또 애틋하다. 할 말도 꾹꾹 묻어놓는 그 성격에, 그래서 사춘기도 말없이 삐뚤어지다가 큰엄마와 시간 보내고 단숨에 제자리로 돌아왔던 그 U가, 여태까지의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을 향해 갖고 있을 그 애정이 오롯이 느껴져서. U는 그 애정으로 오늘도 G를 잘 가르쳐주고 있을 것이고, G는 형 말을 콧등으로 들어도 은근히 U의 발자국을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이미 그렇듯이.




그리고 그때쯤 우리 다시 만나자. 똑같은 표정 똑같은 말투로 내일 만나자고 인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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