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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n 29. 2016

현실의 모자이크화

영화: 스포트라이트(2015, 토마스 맥카시 감독)

※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는 이 글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3월 새 학기, 별생각 없이 친구들과 놀고 같이 본 영화.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처음 접한 건 그렇게였다. 미리 예매한 친구에게 "우리 보는 영화가 뭐라고?" 몇 번이나 물어봐야 했을 만큼, 제목도 별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내용에 대해서도 아는 거 하나 없이 본 영화였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언론을 다룬 영화라고 어디서 대강 흘려 들었고, 뭐 비리나 범죄 같은 걸 열심히 캐서 암적인 세력에게 지지 않고 세상에 폭로를 하겠지 싶었다. 그리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영화관을 나오면 끝이겠지 싶었다. 시놉시스를 몰랐어도 아는 기분이라 더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보러 갔다. 그리고 영화 엔딩 크레딧에 새겨지는 문장 하나하나가 총알처럼 마음에 와 박혀, 엔딩 크레딧을 올려 보내는 내내 심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상담 전공자, 언론 전공자, 인도에서 NGO 일을 하다 온 사람 셋이 모두 다.



처음 시작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잘 나가는 언론사, 한 주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일을 전담하는 '스포트라이트' 팀, 새로 부임해 온 편집장, 그리고 새로 잡게 된 주제. 새로 부임한 편집장 마티는 유대인으로, 가톨릭 교구 입장에선 외부인인 사람이다. 외부에서 관조적으로 보는 사람 눈에 더 뚜렷하게 보인 것이 있었다. 가톨릭 사제도 이를 알고 있기에 그에게 선물이라고 성경을 쥐어주며 묵직하게 한 마디를 건넨다. 얼핏 종교인의 거룩하고 따뜻한 말 같지만 실상은 자기 기세를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성경을 받아 들긴 했어도 여전히 외부인, 게다가 유능한 편집장으로 일하는 마티의 눈에는 그 집단의 모순이 보였다. 가톨릭 성직자의 아동 성추행이었다. 주로 가난한 집 아이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까지도 성추행을 당했다는 거였다. 이 소재를 팀에 던져주자 스포트라이트 팀원들은 감각이 살아있는 현직 언론인답게 칼날처럼 예리한 지적을 쏟으며 회의를 시작한다. 가톨릭이라는 어마어마한 집단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소송으로 들어가면 골치 아파지는데 담당 판사가 독실한 가톨릭이다, 그동안 이 사실을 제보해 왔던 사람은 완전히 별종이라 믿을 수 없다, 그 말만 믿고 파고들기엔 너무 예민한 주제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 팀은 이 일을 파헤쳐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묵살당해 왔던, 스스로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 한 명의 사제 이름을 붙잡고 그 사람의 범죄를 밝힐 생각으로 조사를 시작한다. 크게 귀 담아 들을 일이 그렇게 많을까 싶었지만 피해자는 생각보다 꼼꼼하게 자료 준비를 해 두었고 얼마든지 증언을 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조사가 계속될수록 마치 도미노처럼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하나가, 또 다른 하나가 넘어져 어느새 스포트라이트 팀 앞에는 가톨릭 교회의 '시스템' 자체가 놓여 있었다. 한 명의 사제가 아니었다. 여러 명의 사제가, 뉴욕 곳곳에서 그런 일을 벌여 왔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는 이를 드러내기보다 묵인하고 넘어가기를 선택했다. 드러나는 순간 너무 큰 추문이 일어날 것이므로, 병이나 다른 이유를 빌미 삼아 해당 사제를 다른 교구로 보내 버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남은 피해자들의 삶은, 그 상처는 어디서도 돌보아 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너무 어렸고, 교회와 신부님이라는 이름은 신과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에 감히 거절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게 되도록 상처가 굳어진 이들은, 스포트라이트 팀을 붙잡고 증언을 하면서도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는다. 버럭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더 이상 그 일을 삶에서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인터뷰를 맡은 샤샤(레이첼 맥아담스)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리겠다고, 반드시 알리겠다고 진심을 다해 설득하고 다른 사람들도 분담한 업무를 위해 백방으로 뛰면서 팀은 지지부진해 보이는 일을 조금씩 진척시켜 간다.



처음 이름이 나왔던 사제의 성 추문 관련해서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를 찾아가 뭐라도 실마리를 잡으려고 하다가, 돈 때문에 범죄의 실상에서 눈을 감아 버렸던 그 변호사가 그만두라고 설득하는 말을 듣게 되기도 했다. 이름 높은 자리에 있는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도 만류밖에 돌아오는 게 없었다. 심지어 사건을 조사하다가 알게 된 성추행 사제 중 한 사람이 은퇴한 후 자기 이웃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팀원이 집 냉장고에 몇 번지 집을 조심하라고 써 붙이면서 침통해하기도 한다. 인터뷰를 위해 성추행 혐의가 있는 사제를 만나러 갔다가, 금방이라도 축복을 빌어줄 듯한 푸근한 인상의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인사하는 걸 보며 흠칫 놀라기도 한다.



이 모든 장면은 전혀 선정적이지 않게, 체계적이고 지적이지만 지루하지도 않게 흘러간다. 꼼꼼하게 사건의 맥을 짚어 주어 관객이 서서히 그림을 따라갈 수 있도록 배려했는데,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한 번씩 심장이 철렁한다. 남루한 점퍼를 입은 청년이 계속해서 거칠게 인터뷰를 거부하다가 어렵게 시선을 떨구며 입을 열었을 때, 실제로 스크린 속의 그가 덜덜 떨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걸 보는 내 마음이 그랬는지 나는 그 장면을 무척 덜덜 떨리는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다. 성추행을 저지른 사제가 푸근한 얼굴로 문을 열었을 때도 그 의외성에 마치 공포영화에서 귀신을 본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어릴 때 이후로 교회를 나가지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교회에 갈 거라고 믿었는데 이게 뭐냐며, 마이크(마크 러팔로)가 크리스마스 성가가 울려 퍼지고 촛불이 밝은 교회를 밖에서 씁쓸하게 들여다볼 때, 그 상반되는 두 이미지 안에서 나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씁쓸해졌다.



내게 가장 잊을 수 없는 대사는 스포트라이트 팀장인 월터가 파티에 가서 친구를 만나 도움을 청할 때 한 말이다. 이 일은 그냥 넘기라고, 허허 웃는 얼굴로 사실상 단호하게 선을 긋는 친구에게 월터가 던진 한 마디.


한 아이를 기르는 것도 마을 전체의 책임이고,
학대하는 것도 마을 전체의 책임이야.


 HIV/AIDS 사업장에서 가정 방문을 다닐 때 가끔 학대당한 아이들을 만나고, 그 눈동자의 깊이를 마주했던 시간이 있어서였을까. 그 말은 유독 내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고 잠언처럼 내 머리맡에 놓였다. 월터는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건 한 개인의 범죄, 개인의 흉악함에 눈이 가려 거기에 치를 떨다가 놓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시스템이, 구조 자체가 악하다면 개인은 크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도덕적 결함을 저지르기 너무나 쉽다. 거기 쓸려가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종교 생활이고 경건이어야 하는데 그 종교가 악한 시스템을 갖춰 버리다니. 선의 허울을 뒤집어쓴 악은 교활하기에 더욱 악하다.



그들은 결국 해낸다. 기사를 냈다. 보통의 영화라면 여기서 이름처럼 '스포트라이트'를 가득 비춰 주며 영화를 끝마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 직전, 아주 중요한 사실이 담긴 글씨를 스크린 가득 내비친다. 이들이 기사를 냈고, 수백 개의 팔로업 기사를 냈고, 더욱 충격적인 사실들이 밝혀졌다고. 처벌과 법치로 해결되지 않은 비슷한 사례들이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다음은 그 목록이다'라는 글씨가 나온 이후, 나는 숨을 헉 들이켜야 했다. 까만 스크린을 빼곡하게 채운 하얀 글씨는 묵묵히 그러나 정확히, 다양한 나라와 지역을 가리키고 있었다. 개인의 문제는 개인만 잡으면 되지만, 시스템은 같은 결과를 대량 복제해 내기에 더욱 무섭다. 공고히 다져진 시스템은 충실하게 기능하고 있었고, 그 피해자들의 눈물과 한숨과 어려운 시절과 고민과 탄식 섞인 기도와 그조차 할 수 없어져 버린 절망이 얼마나 두터울지 생각하면 심란했다.




현실을 왜곡하고 뒤틀어 표현해도 예술이라고 하면 용인되곤 한다. 그러나 가끔 도가 지나쳐서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인간 된 도리보다 앞에 두는 사람들을 보면 눈꼴시고 같잖다. 영화도 예술의 세계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존재 자체로 그런 사람들에게 일갈이다. 현실을 차곡차곡 한 조각씩 모자이크화로 영화에 담은 것 같다. 곡해되지 않게, 극적인 구조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다큐멘터리 담듯 차곡차곡 담았다. 그러면서도 보는 이가 흡입력을 느낄 만한 구성이다. 정성이다.


선정적인 장면이 있어야 시선을 끈다는 시대에 선정적인 장면 하나 없이 보는 이의 가슴을 치고, 글이 길면 보지 않는다는 시대에 브리핑 같이 펼쳐지는 호흡 긴 대사로 감정을 이끌어낸다. 현실이야 어떻든 '정신 승리'하고 카타르시스를 주었다면 오히려 영화관을 나오면서 잊혔을 것 같은데, 까만 스크린 가득 흰 글씨를 채워 넣는 것만으로 내게 그 옛날 링의 사다코가 텔레비전 밖으로 기어 나오는 장면만큼이나 충격적이고 강한 인상을 남겼다.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대개 사회의 무너진 곳을 밝히고 드러내어 정의를 세우는 언론인의 소명을 마음에 품고 시작할 것이다. 현실이, 영화에서도 비판한 시스템이 설령 그런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더라도 쓸려가지 않고 버티려고 싸우는 사람이 이 사회 곳곳에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또 아이들,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생후 몇 달만에, 고작 대여섯 살에,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아이들이, 세상의 어른들에게 너무나 쉽게 학대받고 매 맞고 방치되고 성폭행을 당하고 숨을 거두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마음이 아프다. 하나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생명인 아이들을 생각하면 월터의 말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100개가 있어도 우리 사회가 유토피아가 되진 않겠지. 그러나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현실의 모자이크를 더듬더듬 만져 보면서, 그 너머 현실에서 어렵게 시선을 떨구며 덜덜 떠는 손을 잡아야 한다. 그렇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지만 포기는 하고 싶지 않은 영역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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