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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ug 11. 2016

정한(情恨), 의리

우리가 이 영화를 본 이유: 덕혜옹주(2016, 허진호 감독)

※ 직접적인 내용 스포일러는 없지만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적었으므로 간접적으로 스포일러가 됩니다. 그리고 덕혜옹주 일대기가 적혀 있으므로 사실상 역사도 스포입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걸러 읽으시기를. :-)



'비극'의 흰 얼굴을 본 적이 있느냐?
그 손님의 얼굴은 실로 미(美)하니라
_ 정지용, <비극>


몇 년 전부터 인터넷에 잊을 만하면 덕혜옹주에 대한 글이 한 번씩 올라오더니 소설로 나오고 영화로도 나왔다. 비극이 판 치던 시대에 어디 비극 없는 생이 있었겠냐만은 덕혜옹주 이야기가 유독 시선을 끄는 건 마치 그 이야기가 비극의 상징처럼 느껴지기 때문인 듯하다. 악역과 조력자, 아름다움과 슬픔이 더없이 조화를 이루는 이야기인데, 문제는 이게 실화라는 데 있다. 잉크와 종이의 이야기였다면 클리셰라 느껴졌을 만큼 딱 아귀가 맞겠지만 이건 뼈와 살을 가진 인간의 이야기였다는 데 있다.



아내도 잃고 나라도 잃은 왕이란 얼마나 서글픈 존재인가. 그즈음 태어난 덕혜옹주는 고종에게 있어 유일한 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고종에게 덕혜옹주는 법도보다 위에 있는 존재였고,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의 삶을 삼킨 시대가 옹주라고 예외를 둘 리 없었다. 나라와 아버지를 앗아간 땅, 영친왕이 이미 끌려간 그 땅으로 덕혜옹주 또한 끌려가야 했다.


국권을 빼앗긴 옹주가 그 적국에서 사는 날들이 녹록했을 리 없다. 덕혜옹주는 늘 보온병을 갖고 다녔는데 친구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독살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고도 한다. 공공연한 비밀처럼 고종 독살설을 수군거리던 시절이니 이상하지 않지만 가엾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살았을까. 그 와중에 순종(덕혜옹주에게는 오빠)과 어머니 양 귀인마저 세상을 떠난다. 그 내내 덕혜옹주는 적국의 심장에 있었다.


어릴 때는 사랑받는 막내딸이었다가 너무 갑자기 삶이 위협 일색으로 차 버려서였을까, 덕혜옹주는 서서히 정신을 놓기 시작한다. 그러다 덕혜옹주는 대마도의 번주였던 소 다케유키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본인이 선택한 결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 생활 자체에서 옹주의 삶을 이루는 다른 축에 비해 크게 비극의 냄새가 나지는 않는다. 사실 관계라는 게 당사자가 아니면 잘 알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덕혜옹주에 대한 자료 자체가 워낙 없다시피 하다 보니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다. 덕혜옹주를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남편부터 학대하는 남편까지 양극화된 소문과 추측이 난무하지만 아무튼 소 다케유키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준수한 외모 탓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덕혜옹주는 이미 조현병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1946년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으로 옮기는데, 일제 패망과 함께 귀족 신분을 박탈당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졌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소 다케유키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새로운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영영 찾을 수 없는 조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정신병원에서 기약 없이 잊힌 나날들이 시작된다. 그러다 서울신문 김을한 기자(영화에서는 김장한으로 나오는데, 사실 이 김장한이 어릴 때 덕혜옹주와 혼인을 할 뻔했던 사이인 것까지는 사실이다.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영화적 상상력과 그 형인 김을한의 노력을 합쳐 만들어낸 캐릭터이다.)가 덕혜옹주 귀국을 위해 애쓰면서 1962년 가까스로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그전까지는 잊히지 않았더라도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승만 정부가 왕정복고와 관련한 움직임이 있을까 부담스러워 귀국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비록 정신도 온전치 않았고 이미 젊은 날은 모두 소진한 지친 걸음이었지만, 이전에 모시던 옹주를 위해 공항까지 마중 나온 유모와 궁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고궁을 보고,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영화는 이러한 덕혜옹주의 삶과 주변 인물(실존 인물과 허구 인물 포함)을 잘 버무려냈다. 이덕혜라는 개인의 비극을 이야기하지만 강요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도 같이 전해져 온다. 개인적으로는 배우들의 호연 덕이 크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 라인업이면 영화가 안드로메다라도 보러 갈 것 같다.)

독립 운동가로 나오는 김대명은 극중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눈빛, 그 행동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사진에서 튀어나온 줄 알았다. 상당히 복잡한 감정이었을 텐데도, 분량 대비 존재감이 낭낭하다..
사실 영친왕 얼굴은 몰랐는데 끝나고 보고 놀랐다. 하지만 내 기준 싱크로율 끝판왕은 순종이었음.
존재감이 하드캐리.. 박해일과 정상훈이 만나 얼싸안는 장면은 전개상 의미 있는 장면은 아닌데도 눈물이 났다.
독립 운동가이지만 맹목적이지 않은, 인간적이지만 목표를 향해서는 더없이 뚜렷한.
우리 엄마는 라미란이 스크린에서 숨만 쉬어도 따라 웃고 울었다. 매력이 어마어마하다.
박해일 눈빛만 가지고도 소논문 하나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윤제문이 씩 웃을 때마다 아주머니들의 탄식 소리가... 끈덕진 생명력인데, 그게 영화적이라기보다 현실적이어서 슬프다.
울지 않을 때도 젖어 보이는 눈. 시대의 격한 흐름 위에서 개인의 감정을 차곡차곡 전해준다.



영화는 영친왕 망명 작전이라는 가상의 작전과 덕혜옹주의 주체적인 노력이 돋보인 연설 장면 등을 넣어 덕혜옹주의 이야기에 '비극' 외의 다른 면을 첨가하려 애썼다. 사실 역사 왜곡 논란도 이것 때문에 일었던 건데, 나는 개인적으로 덕혜옹주의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면보다는 부끄러워하고 죄스러워하는 면이 보인 것 같아서 싫지 않았다. 기실 황녀의 비극도 비극이지만 황녀가 비극을 겪을 때 남들은 어땠겠는가. 덕혜가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는 장면들도 그런 모습에 반응하는 것이었고, 그런 자신이 한 게 없는 것 같다고 죄스러워하는 모습을 대사에서도 몇 번이나 언급한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덕혜옹주가 미화됐다기보다는 자칫 덕혜의 비극에만 집중될 수 있는 이야기를 덕혜라는 개인의 감정에 오롯이 집중하면서도 시대의 아픔을 얼핏 스쳐 보여준 것 같아 좋았다. 덕혜가 연설을 할 때도 그 앞의 여자아이는 손가락이 잘린 자리에서 피도 채 닦이지 않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기침을 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이건 '의리'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윤제문이 연기한 한택수는 사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굉장히 전형적인 인물상이다. 같이 본 내 동생은 악역을 너무 한택수가 혼자 몰아서 다 했다며, 좀 더 다양한 악역 상을 보여줬어도 좋았을 거라고 아쉬워했는데 그 말에도 부분 동감하지만 나는 이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친일 매국노 이완용에겐 친러파였던 전적이 있으며, 수많은 친일파들이 해방과 동시에 친미파로 돌아섰다. 이 사람들이 뭐 일본의 사상이 자기와 맞아서, 러시아의 문화가 좋아서, 미국의 경제 체제가 자기 스타일이어서 그 나라의 앞에 섰겠나. 이 사람들에겐 그냥 의리가 없던 거다. 지켜야 할 것이 없기에 그렇게 주체 없이 하늘하늘 떠 다니며 제 잇속을 밝혔던 거다. 그들은 의리가 없기에 정당성이 없고, 정당성이 없기에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기에 통제하고자 한다. 아무리 총칼을 휘둘러도 이들에겐 서슬 퍼런 카리스마가 나올 수 없다. 추악한 잔인함은 나올 수 있을지언정.


반면 그렇지 않은 인물들이 있었다. 어린 덕혜가 기모노를 입고 궁을 떠날 때, 눈물 줄줄 흘리면서 절을 하던 궁녀들이 그랬다. 먼지바람 맞으며 주저앉아 끅끅 울고 각자의 모진 풍랑을 다 맞고 나중에 공항에서 한복 차려 입고 덕혜옹주를 맞았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정말 그랬다. 끝까지 덕혜옹주를 찾아내겠다던 장한이, 끝까지 곁에서 모시겠다던 복순이,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폭탄을 던지던 무명의 독립 운동가가, 있는 힘껏 가진 걸 다 바쳐 노력하고도 죄송하다며 흐느껴 울던 복동이 다 그랬다.



민족의 정한이라는 건, 아리랑을 부르며 울컥하던 노동자들처럼 개인의 기구함에 대한 감정도 있지만 공통된 정서를 묶어 보자면 거기 의리라는 것도 제법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걸, 처음으로 생각했다.


덕혜옹주는 분명 비극적 삶을 살았지만 덕혜옹주가 겪은 비극은 시대를 감안하면 놀랍지 않은 일이다. 덕혜옹주는 양 귀인이 언제 죽었는지 알고 흐느껴 울 수 있었지만, 제 가족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제 목숨마저 스러지는 사람이 허다했던 시대였다. 물론 그렇다고 덕혜옹주의 비극이 위로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왜 우리는 덕혜옹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덕혜옹주를 잊은 걸 안타까워하며 덕혜옹주의 소설과 영화에 반응하는가. 비극의 상징에 대한 우리의 의리다. 망해 버린 왕조일지언정 우리에겐 중심이었으므로,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건 단순히 덕혜옹주라는 한 인물 혹은 조선 왕조라는 한 왕조가 아니다. 우리의 우리 됨, 우리를 우리로 묶어주는 그 어떤 것(어떤 사람은 얼이라고도, 민족혼이라고도, 민족정신이라고도 부르는 뭐 그런 어떤 것)에 대한 의리이다.



어쩌면 덕혜의 나약함, 황실의 나약함이 느껴져 싫을 수도 있다. 덕혜는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주체적인 드라마를 쓴 인물도 아니었다. 시대의 격랑에 흐트러졌을 뿐이고 그건 그 시대 누구나 다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영화는 덕혜옹주를 통해 왕조를 정당화하지도, 다른 사람들의 비극을 눙쳐 버리지도 않는다. 그냥 이덕혜라는 인물 개인의 비극을 서서히 비춰 보여줄 뿐이다. 사실 나는 그 점이 좋았다. 모든 사람이 독립 운동가일 수는 없다. 어린 나이에 삶이 제게 사방에서 발톱을 드리운다면 약해지는 사람도 있고 같이 발톱을 세우는 사람도 있는 거다. 예전에 <육룡이 나르샤>에서 난세란 약자의 지옥이라는 대사에 공감한 적이 있는데, 꼭 사회적 약자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이 해당되겠지만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약자가 태어날 수 있는 거다. 영친왕도 덕혜옹주도 순종도 다른 누구라고 해도 다 마찬가지다. 후세의 우리가 아쉬움은 표할 수 있지만, 어차피 한 사람은 1인칭의 삶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이덕혜는 유관순이나 남자현이나 조마리아가 아닌 이덕혜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덕혜로 살 수 없었기에 한없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오늘 엄마와 동생과 나란히 앉아 눈물 닦아 가며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심각한 관크에 시달렸다. 아주머니들의 (주로 이야기가 비극적으로 흘러갈 때 안쓰러워하며 혀를 차신다든지 아니면 나쁜 놈이 나올 때 분노 반 안타까움 반의 리액션을 하신다든지 하는) 추임새까지는 그분들 나름의 의리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기껏 시간 내어 영화관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시는 분들은 잘 이해가 안 된다. 전개상 큰 의미 없는 장면에서도 울컥하고 있던 (일제 강점기 배경에 약한 감성의) 나로서는 매우 화가 났지만, 오늘은 좀 다른 풍경도 있었다.


노인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자식 뻘 되는 중년 아저씨의 부축을 받아 영화관으로 들어오셨다. 영화 초반에 큰 소리로 신음인지 한숨인지 둘 다인지 모를 소리를 내신 그분은, 공장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 하며 덕혜가 연설을 마무리할 때 스크린 위의 조선인 노동자들과 같이 박수를 치셨다. 그분이 살아온 세계를, 그분의 의리를 내가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박수 소리에 마음 한쪽이 뻐근해졌다.


그 내내 화려한 효과음까지 몇 번 울려가며 핸드폰으로 화투장이 화려하게 펼쳐진 게임을 하시던 중년 아저씨도 다른 의미도 다른 풍경이었다. 영화 보는 시간의 반절 정도는 핸드폰 불빛이 환했는데 반대편 열에 있던 나까지 거슬릴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아마 본인은 영화에 별 마음이 없지만 그 노인 분이 보고 싶어 하셔서 오신 게 아닐까 싶다. 의리라면 의리지만, 결국 민족 정한이라는 것도 내 마음이 어디 살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덕혜옹주는 이렇게 한 차례 광풍을 일으키고 또 잠잠히 역사의 한 페이지에 스밀 것이다. 사도세자 이야기를 하듯, 단종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이야기하듯, 지나간 왕조의 이야기 한 자락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의리는 남겠지. 우리가 우리인 한,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나와도 그 의리로 반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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