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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Dec 08. 2016

필요하다면 내 목숨이라도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2016, 홍지영 감독)


※ 스포일러 없는 리뷰입니다. 이 글에 나온 모든 내용은 시놉시스/예고편에 나온 부분들만 담겨 있습니다.



기욤 뮈소 소설 원작의 영화가 드디어 개봉을 한다. 9월 즈음 개봉을 기약하다 미루어진 터라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기다림이 길었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동명의 제목을 한 소설을 나는 고등학교 때인지 수능 끝난 때인지에 읽었다. 그냥 요새 핫하다는 프랑스 작가라서, 별생각 없이 주문한 책이었다.


프랑스 소설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일까. 예쁘게 데코레이션 된 케이크처럼, 혹은 와인처럼, 어딘가 매혹적이고 고급스러운 느낌이지만 어쩐지 매일 집어 들기엔 부담스럽다는 게 프랑스 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이다. 까뮈의 <이방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로맹 가리가 가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 등 국내에서 인지도가 상당한 프랑스 소설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선뜻 집어 들고 슥슥 읽게는 잘 되지 않는다.


그런 일반적 이미지를 보자면 기욤 뮈소는 분명 프랑스 소설에서 예외적인 인물이다. 배경도 프랑스보다 미국이 많고, 인물 묘사나 사건 전개 또한 프랑스 소설의 일반적인 방식보다는 할리우드의 그것에 더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가 처음이자 마지막 기욤 뮈소가 되었다.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냥 거르는 작가가 되었다. 다만 읽는 내내 마치 눈 앞에 할리우드 영화 한 편이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어서, 영화에 적합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니 기욤 뮈소 소설이 영화화된다고 해도 딱히 놀랍지는 않은데, 그게 한국 영화라는 건 좀 구미가 당겼다. 특히나 타임 슬립의 내용이니만큼 한국의 배경과 감성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영화는 2015년의 수현(김윤식)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알약 10개를 우연히 손에 넣으면서 시작된다. 과거의 수현(변요한)과 미래의 수현 모두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사실임을 알게 된 후, 평생을 기억하며 후회하고 있던 한 사건을 바꾸어 나가는 게 영화의 메인 스토리 라인이다.



이 중년의 사내가 미래의 자신임을 알고 나서도 대체 미래에서 여기까지 왜 왔는지, 과거의 수현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가 연아를 입에 담자 더더욱 그렇다. 바로 수현이 그토록 사랑했던 연아(채서진)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니. 그럼 거기에는 연아가 없단 말인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려는 미래의 수현을 채근해 수현은 곧 닥쳐올 미래에 대해 알게 되고, 두 사람인 듯 한 사람인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스틸컷 중 제일 좋아하는 사진.


자세한 내용은 영화로 확인하시면 되겠다. 책을 읽은 분도 많으실 테고. 개인적으로는 내용도 알고 작가 스타일도 안다고 생각해 큰 기대가 없었는데 영화가 생각보다 정말 좋았다.


첫 번째- 배우들의 연기에 허세가 없다.


내가 기욤 뮈소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그 특유의 허세이다. "나는 이렇게 멋지고 잘난 남자야. 비록 나는 중년이지만 너무나 중후하고 멋있지! 어느 정도냐면 내가 교수일 때는 한참 어린 여대생들조차 나를 흠모할 정도? 내가 누군가에게 조심스럽게 관심을 보일 때 주변 여자들이 질투하는 정도? 나는 옷을 화려하게 신경 써서 입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 옷은 다 멋지고, 낡은 가방을 들어도 세련됐고, 사랑에 상처가 있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기억에 쓸쓸한 분위기가 있는데 또 그게 멋지지!" 하는 느낌이어서.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자기애적인 투사가 너무 불편해서. 작가 본인을 내가 알지 못하지만, 보통 주인공급 캐릭터가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닌데 그냥 다들 날 좋아하는군, 나는 내가 괜찮은지 잘 모르겠는데 다들 내가 괜찮다고들 하는군' 하는 게 보이면 자기애적으로 느껴져서 거북스럽다. 비슷한 예로 나는 트와일라잇을, '나는 얼굴이 하얄 뿐 그냥 평범한 애야. 아주 평범하게 생겼을 뿐인데 남자애들은 다 날 좋아하고 여자애들은 다 날 질투하네?' 하는 느낌의 그 여주인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얼마나 담백한 배우들인가. <추격자>와 <검은 사제들>에서도 그랬지만, 직업이 무엇이어도 밤샘 근무와 철야에 절어 있는 얼굴을 너무나 잘 소화해 내는 배우 김윤석. 그리고 <육룡이 나르샤>에서나 그간 수없이 찍어온 독립영화들에서나 올곧은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번민할지언정 올곧은 눈을 끝끝내 버리지 않았던 배우 변요한. 두 사람의 연기 어디에도 허세는 없다. 수염이 거칠한 얼굴이나 꾸밈없는 복색을 보아도 애초에 허세의 설정은 없었다는 게 보인다.


멋있는 배우들이지만, '나 되게 멋있지?' 하는 분위기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그저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을 향한 필사적인 외침만 있을 뿐. 필요하다면 목숨이라도 다 주겠다는, 사랑을 향한 절박함이 있을 뿐.



두 번째- 반짝반짝 영상미



이 영화의 극본과 감독을 맡은 홍지영 감독의 영화를 나는 딱 하나 보았다. 신민아 김태우 주지훈 주연의 <키친>. 별생각 없이 영화관에 갔다가 딱히 당기는 게 없어 시놉시스도 모르고 충동적으로 본 영화였고, 그런 영화는 대개 잊히기 마련이었는데, 이 영화는 햇빛이 넘실거리는 이미지로 기억 한 구석에 깊이 남아 있다. 신민아가 나가던 가게에 놓인 소품 하나하나도, 뇌리에 강하게 남은 청록색 원피스를 입고 갤러리에 갔다가 주지훈과 신민아가 처음 만나는 장면도, 신민아와 김태우가 사는 집의 구석구석도 햇빛이 가득가득 들어오고 놓인 소품 하나하나가 굉장히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아기자기하고 색감이 돋보이는 소품들, 그리고 광량이 많지만 부드럽게 들어오는 햇빛. 두 가지가 모여 감성적이지만 반짝거리는 색감을 만들어 낸다. 본 작품이 둘 뿐이라서 이렇게 색감과 햇빛을 이용해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홍지영 감독의 시그니처 같은 특징인지 아닌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사람과 사람의 감정이 맞닿아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이런 부드러운 영화에서 빛을 발하는 것임은 확실하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배경 중에 80년대가 나오기 때문에 더더욱, <키친>에서 그랬듯 강렬하고 원색도 많이 들어간 소품들이 빈티지한 색감으로 들어가 있다. 수현이 연아 손에 쥐어주는 놀이공원의 풍선들이 그렇고, 해변에서 춤추고 있는 아가씨들의 옷 색깔도 그렇고. 수현이 사는 집도 정원 구조가 특이하게 되어 있는데, 자연이 자연 그대로의 느낌보다는 약간 인위적인 느낌 안에서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놓여 있는 소품들을 많이 등장시키는 것 같다.



세 번째- 인생에서 연인만이 소중한 사랑은 아니기에


예고편을 보아도 연아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냥 연아 이야기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영화는 연인 간의 사랑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예고편에서부터 신 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하리라 예상되었던 태호(안세하/김상호)와의 관계도 그렇다. 같은 장소 다른 시대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도, 그 시간을 다 넘어서도 서로를 깊이 생각하던 우정도 영화의 서브 스토리 중 한 축을 이룬다.



서브 스토리의 또 다른 한 축은 딸 수아를 향한 아버지 수현의 마음이다. <어바웃 타임>에서도 보았고 이 영화의 예고편에서도 보았지만, 시간 여행은 잘못하면 그 사이에 태어난 소중한 아이를 잃을 수도 있는 일이다. 다른 시간과 다른 이해를 가진 한 사람은 이 모든 소중한 관계들을 최대한 어그러뜨리지 않으면서, 이들의 인생을 뒤얽지 않으면서 나아가려고 애를 쓴다.


웃는 게 너무 예쁘셔서... 한 장 더 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아와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우리 아빠가 보고 싶어졌다.



가족, 친구, 연인. 영화를 보면서, 혹은 보고 나오면서, 각자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이다. 개봉을 미룬 것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9월 추석 시즌에도 물론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왁자지껄 보기보다 추운 날씨에 차분하게 앉아 따뜻하게 보기 좋은 영화, 소중한 사람 손 잡고 함께 보면 좋을 영화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포스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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