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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Dec 12. 2016

너희는 어디까지 진짜였을까

영화: 립 반 윙클의 신부(2016, 이와이 슌지 감독)



그가, 돌아왔다.


  모든 '첫'이라는 수식어를 가장 처음답게, 아름답거나 거친 그 서툶의 세계를 그려내던 그가 돌아왔다. 그동안도 꾸준히 애니메이션이나 다큐멘터리 작품을 해 왔지만 이런 장편 영화는 실로 오랜만이다. 해서 많은 이와이 팬들에게 특별한 개봉이었다. 내게 있어서도 특별했는데, 그의 영화를 처음 개봉한 때에 맞추어 영화관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세계를 뒤늦게 알고 집에서 보거나 재개봉하는 영화를 본 적밖에 없었으니까.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러브레터> 말미에서 이미 도서부 아이들의 손으로 차곡차곡 정리되던 도서 카드는 바코드로 대체됐다고 말하기도 뭣할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말이다. <러브레터>와 같은 해에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제작한 <귀를 기울이면>에서도 도서 카드를 바코드로 전환하는 장면이 나오니, 도서 카드에 첫사랑의 이름을 쓰며 뒷면에 그 아이의 그림을 끄적끄적 그려 보는 감성 같은 건 그 시절에도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대신 카카오톡을 보낼까 말까 고민하고, 숫자 1이 없어졌는지 아닌지에 마음을 졸이는 첫사랑이 올망졸망 피어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였나, 이와이 슌지도 SNS의 세계로 들어왔다. <러브레터>에서는 자전거 불빛 아래 시험지를 맞춰 보며 서로의 눈을 보던 사람들이,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키보드 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이제는 SNS를 QR 코드로 찍어 연결한다. 그리고 그 변화만큼, 우리는 서로를 더 알 수 없어졌다. 그의 영화도 그렇다. 얼굴로 대사로 속내를 보여주던 <러브레터>와 달리, 행동과 인터넷상의 말에 자신을 조각조각 섞어 표현하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속 아이들과 달리, <립 반 윙클의 신부> 주인공들은 얼굴과 대사와 행동과 인터넷상의 말들을 모두 보여줌에도 나는 이들이 어디까지 진짜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2시간 버전으로 개봉된 <립 반 윙클의 신부>뿐 아니라 '스페셜 에디션'으로 개봉된 3시간 분량의 풀 버전을 다 보신 분이 아니면 스포일러를 당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영화 내용 중간중간 저의 감상과 저의 해석이 같이 있습니다. 공식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오피셜 자료를 검색해 오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 남겨 두어요.



  주인공 나나미가 SNS로 남자 친구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른 SNS에 일기를 쓰듯 나나미는 한 문장씩 적어 내려간다. 인터넷 쇼핑을 하듯 너무나 쉽게 손에 넣었다고, 남자 친구에게 있어서도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겠느냐고. 그리고 관계가 진행되고 결혼 준비를 하면서 느끼는 우울도 모두 적어 넣는다. 이혼한 부모님, 없다시피 한 친척의 수.


  그 울적한 글에 SNS 친구이신 남바렐 님이 댓글을 단다. 그 자리를 아르바이트생으로 메울 수 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안다고. 혹하는 심정이었지만, 친척들과 교류가 많고 다복해 보이는 가정 출신의 남자 친구가 '교류하는 친척이 별로 없어'라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라 나나미는 마음이 불편하다. 결국 조금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남바렐을 통해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을 아무로라고 소개한다. 아무로의 대사는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의미심장한 구석이 많다. 그는 한 말의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긴 하지만, 나는 그가 한 말 중 거짓보다 사실이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00% 거짓보다, 70% 진실에 30% 거짓을 섞은 것이 더 리얼리티 높은 거짓을 구현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의미로 보았을 때 그는 정말 사실적으로 거짓을 만들어내는 인물인 것 같다.


  왜 '인물이다'가 아니라 '인물인 것 같다'냐면, 이 영화는 무엇이 진짜고 거짓인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대사로, 친절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다소 신뢰하기 위험한 인물 이리라고 추측해볼 뿐. 그는 계속해서 나나미를 싹싹하게 도와주지만 둘 사이 감정의 교류는 느껴지지 않는다. 추후 읽은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무로는 현대 사회의 서비스 집합체 같은 캐릭터라고 한다.


  시나리오 수업을 몇 주나마 들을 때 선생님께서 그러셨더랬다. 영화는 스토리 라인이 아니라 감정을 전하는 것이므로, 영상으로 전할 것을 다 전하고도 전하지 못하는 것만을 대사로 담는 거라고. 로맨틱 코미디를 비롯해 대사를 치고받는 게 주를 이루는 몇몇 장르를 제외하면, 대사는 최소화해야 하고 고로 응축해야 한다고. 그런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로는 생각할수록 의문스러운 캐릭터다.


  아무튼 나나미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는 두 개의 이름을 소개한다. 아무로라는 이름, 그리고 이치카와 세이조라는 이름. 게다가 이치카와 세이조라는 이름은 자기가 배우로서 쓰는 이름이고, 원래 그 이름을 가진 배우가 있는데 자기가 그 이름을 쓰고 있다고 한다. 이름이 둘인 것도 얼떨떨한데, 이름은 무한대로 만들 수 있는 거라고 으쓱거리기까지 한다. 어떻든 '남바렐의 친구니까'라는 이유로 대폭 할인까지 해 주는 아무로에게 나나미는 상당히 의지를 했고, 그가 데려온 가짜 친척들(문자 그대로 프로 참석러들...)을 대동하고 무사히 결혼식까지 치른다.


  나나미로서는 상당히 큰 결정이었다. 소심한 편인 나나미가 자기의 감정을 여과 없이 말하는 곳은 SNS뿐이다. 기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지만 목소리가 작아 아이들의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고, 마이크를 올려놓으며 조롱하는 아이들에게 어쩌지도 못하고 그 마이크를 그냥 받아 들고 삼키듯 수업을 진행한다. 정상적인 지도 편달이 어려울 수준인 기간제 교사를 학교 측은 마다했고, 상견례 때 시어머니가 말했던 '가사를 돌보고 아이도 가지려면 집에 있어야 하지 않겠니?'라는 조언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나미는 일을 그만뒀다고 말한다. 남자 친구는 고민이 많았겠네, 하지만 딱히 나나미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주거나 품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결혼식 당일,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나미 앞에서 남자 친구는 SNS 이야기를 꺼낸다. 나나미가 올렸던 글을 그대로 읽으며, 내 약혼자가 이런 글을 올렸으면 나 같으면 파혼이라고 웃는다. 알고 꺼낸 말이었을까?



  아슬아슬하게 시작된 신혼 생활은 진행마저 아슬아슬하다. 청소를 하다 발견한 금색 귀고리는 아무리 봐도 여자의 것이어서, 나나미는 SNS 이야기를 꺼낸 이후로 부쩍 차가워진 것 같은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며 아무로를 찾아간다. 아무로는 흔쾌히 일을 맡으며 또 '남바렐의 친구니까' 할인을 해 준다. 그러는 동안 나나미의 집에 누군가 찾아온다. 남편이 만나는 불륜 상대의 애인이라는 남자가. 그는 이 일을 마무리짓자며 나나미를 불러서는 이 일을 덮는 대신 나나미의 몸으로 보상을 받겠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고, 호텔에 설치된 몰래카메라 앵글에 잡힌 나나미는 겁에 질린 얼굴로 아무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윽고 나타난 아무로에게, 방금까지 나나미를 덮쳐 버릴 듯 무섭게 말하던 남자는 '아 살았다, 이제 어쩌나 했잖아' 하고 '남바렐 당신 정말 나쁜 사람이야' 하고는 도망치듯 가 버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나미는 아무로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렇게 끝난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족 행사가 있던 날 밤, 하루 종일 유독 냉랭하게 느껴지던 시어머니가 조용히 나나미를 부른다. 그리고 호텔에서 외간 남자와 있는 나나미의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며, 부모님의 이혼을 숨기고 가짜 하객을 부른 것까지 이야기하며 나나미를 쫓아낸다. 외도는 내가 아니라 남편이 했다고 말하지만, 시어머니는 그런 나나미에게 치를 떨며 택시에 태워 나나미를 보낸다. 다음 날 남편과의 짧은 통화로 결혼 생활은 끝이 난다.


  이 과정을 차후 아무로는 '이별 청부업자에게 당한 것'이라고 한 마디로 간단하게 정리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수많은 의문이 남는다. 정말 이별 청부업자라면 이별 청부업자는 호텔에서 상황을 정돈하던 아무로 본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의뢰인은 누구였을까? 남편이 SNS가 나나미 것이라는 걸 알고 만든 걸까? 아니면 정말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만든 걸까? 만약 남편이 아니면, 시어머니가 이 이혼을 만든 걸까? 남편과 나나미가 통화하는 내내 지푸라기를 만지던 표정은 뭔가 켕기는 표정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또 상견례 때 시어머니를 '마마~'라고 부르던 남편의 호칭도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 마마라고 못 부를 건 없지만 그래도 성별과 나이에 따른 호칭 경계가 뚜렷한 일본어에서 다 큰 성인 남자가 오까상도 아니고 굳이 왜 마마여야 했을까? 마마보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한 건 아니었을까? 그러면 시어머니가 이혼을 만들고 남편은 거기 동조한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따라온 걸까? 두 사람은 각자 어디까지 알았고, 어디까지 거짓말을 한 걸까?


  한 사람의 한 가지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한 경우의 수인데, 시어머니와 남편 두 사람, 남편의 불륜 가능성과 나나미 호텔 사건, 나나미의 SNS까지 조합해 보면 경우의 수는 계속해서 커진다. 그리고 그중 가장 무서운 경우의 수는, 남편도 시어머니도 그냥 나나미와 마찬가지로 가련한 피해자였을 뿐이고 이 일은 더 큰 그림을 위해 아무로가 나나미를 '택해' 끌어내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어떤 경우의 수가 진실이었든 간에 결론은 파국이었다. 그렇게 쫓겨나 갈 곳을 모르고 우는 나나미는 어느 작은 호텔에 들어가 몸을 뉘이고, 그곳에서 청소 일을 하면서 우선 급한 대로 생계를 꾸려 간다. 그 와중에도 기간제 교사 일을 관두고도 유일하게 계속해서 화상 강의로 가르치는 초등학생 카논의 과외만큼은 계속하고 있다. 카논에게는 선생님밖에 없다는, 카논이 선생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는 카논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으니까. 카논은 매가리 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선생님 지금 어디예요? 그 말은 나나미가 짐가방을 들고 울면서 아무로에게 하던 말과 닮아 있다. 2시간짜리 버전에서는 모두 삭제된 카논의 그 기운 없는 목소리는, 중간중간 꼭 나나미의 상황을 요약해 말하는 것만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아무로는 나나미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선해 준다. 사실 내겐 이 장면 또한 '어쩌면 이 모든 건 아무로의 큰 그림일지도 몰라' 하는 느낌이 짙었다. 이때 나나미가 "저 폐인 같죠?" 하고 물을 때 아무로는 "아뇨, 진짜 폐인 같은 친구들 몇 아는데 아직 완전히 괜찮아요"라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그는 배우일 뿐 아니라 감독 같다. 더 정확히는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여 연극을 꾸미는 사람 같다. 호텔의 그 남자도 아무로의 손에 의해 배우가 되었던 것이듯이.


  이번에 아무로가 나나미에게 주선해준 아르바이트 또한 이와 비슷하다. 나나미는 아무로의 손에 의해 배우가 되는 것이다. 나나미에겐 익숙한 하객 아르바이트였다. 그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나미의 아빠, 엄마, 언니, 남동생이 된다. 다섯 명은 당일 날 합을 맞춰 보는 배우들 치고는 상당히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뭉쳤고, 결혼식에서 음식을 먹으며 '저 신랑 글쎄 딴살림이 있대' 하는 이야기를 속살 거리기도 한다.



  이 타인의 결혼식은 이전의 나나미 결혼식과 많이 겹쳐 보인다. 케이크를 커팅할 때 앞으로 몰려와 아주 소중한 장면을 담듯 각자의 핸드폰 카메라로 찍는 사람들, 비슷비슷한 이벤트도. 그러다 보면 결혼식 때 작은 아이부터 중학생, 고등학생, 그리고 현재의 나나미와 남편으로 마이크를 이어받으며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을 했던 그 장면도 연출된 거짓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나나미의 엄마가 도시락을 싸 주었다는 건 진짜였을까? 철봉을 열심히 했다는 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이야기는 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 걸까? 그걸 보고 감격해하며 훌쩍거리던 두 어머니를 비롯해, 이 이야기 속 어느 캐릭터도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무튼 타인의 결혼식이 끝나고 나오는 길. 아빠와 엄마의 역할을 맡은 이들은 의외로 아직 미혼이고 언니 역을 맡은 이는 실제로 '시시껄렁한 여배우'라고 한다. 다섯 명은 한 잔 하러 가자며 왁자지껄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낸다. 정말 술 한 잔 들어간 때처럼 새삼스러운 소리들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았던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웃으며 헤어진다. 여태까지 나나미가 한 프레임에 잡혔던 그 어느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모습이었다. 언니 역할을 맡았던 마시로와 친해져 2차까지 달리고, 닉네임이 '립 반 윙클'인 마시로와 SNS 친구까지 맺고, 나나미는 기분 좋게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로는 나나미에게 또 좋은 일자리를 찾아내 준다. 주인이 없는 대저택의 가사 도우미로 들어가는 것. 게다가 같이 일하는 사람은 일전에 만났던 그 마시로. 비록 가사 도우미로서 하는 일은 없는 것 같지만. 어마어마하게 지저분한 집을 치우고 나나미는 성실하게 그 집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마시로는 밤새 술을 마시거나 일을 하고 뒤늦게 들어와 자고 있는 나나미에게 안기거나 심장 소리를 듣거나 하며 나나미에게 친근감을 표한다. 나나미는 여태껏 있었던 그 어떤 장소에서보다 편안하게 잠들고, 잠들다 깨고, 그런 마시로에게 인사하고 ㅏ시 잠들고 한다. 다만 특이한 건 그 집의 한 방에는 어항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항마다 독이 있는 생물들만 살고 있다. 해파리라든지 청자고둥이라든지.


  '립 반 윙클' 마시로와 나나미는 서서히 친해지고, 나나미는 이내 마시로에 대해 또 그 집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시시껄렁한 여배우는 여배우였지만, AV 배우였다는 것. 몸이 아파도 일을 쉬려고 들지 않는다든지 어린아이처럼 구는데 그게 불안해 보인다는 것. 해파리가 늘어나서 더 둘 곳도 없다는 것. 그리고- 그리고 이 집주인이 마시로라는 것. 아무로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묻자 곤란해하던 아무로는 이내 친구가 되어줄 사람을 찾는 게 의뢰였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나나미는 마시로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같이 이사를 가자고 말한다. 립 반 윙클의 저택을, 함께 떠나자고. "자신을 더 소중히 여겨 주세요"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웨딩드레스 샵에 들어가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고, 뾰로롱~ 하고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허공에서 마임으로 반지를 끌어내 끼워 주고, 차를 운전해 마치 신혼여행을 온 사람들처럼 분위기 있는 술을 곁들이고 머리를 만져 주고 옷자락을 잡아주고, 춤을 추는 서로를 보며 웃는다. 영화에 나온 세 번의 결혼식 중 가장 소박하지만 가장 진실한 결혼식 장면이었다. 피아노에는 KAWAI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유명한 피아노 회사이기도 하지만, 우연히 마시로의 입버릇도 '카와이이'였다. 나나미를 볼 때도 드레스를 볼 때도, 좋아하는 것을 볼 때마다 유독 다른 인물에 비해 많이 하던 말. 흔한 말이라 별 의미 없는지도 모르지만, 마시로가 '카와이이-'라고 하던 모든 것들로 둘러싸인 그 결혼식의 밤, 마시로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마시로는 이 영화의 핵심과 같은 대사를 던진다.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들끼리도 친절하고, 모두가 잘해준다고. 그걸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이 돈이란 걸 내는 거라고. 그러나 자기 마음은 그 행복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작아서, 아주 적은 양의 행복만으로도 한계가 와 버린다고. 그보다 더 다정하면 분명 깨져 버리고 말 거라고.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나는 그 말이 반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그렇게 다정한 눈으로 보아주지 않았던 삶이어서 어색했을 뿐, 마시로는 나나미의 그 애정 어린 눈에 감격하고 기뻤던 걸 거라고. 그래서 그 말을 하는 마시로를 보는 내내 나도 계속 눈물이 차오르고 마음이 벅찼다.


  그 말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매우 역설적인 느낌이었다. 슈퍼 직원이 물건을 담아주는 것에도, 택배 아저씨가 물건을 가져다주는 것에도 감사함과 행복함을 느낄 만큼 행복을 아는 사람이, 자기 마음은 행복을 담기 너무 작다고 하는 것이. 그리고 다음 날 두 사람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누워 있고, 마시로의 죽겠다는 연락을 받고 온 아무로가 상조 회사 직원에게 사실을 그제야 밝힌다. 마시로의 의뢰는 암에 걸린 자신이 죽기 전, 친구가 아니라 같이 죽을 사람을 찾아 달라는 의뢰였다고. 이런 일을 하면 얼마가 떨어지냐는 상조 회사 직원의 질문, 이어지는 큰 숫자와 직원이 놀라는 그 사이로 나나미가 깨어난다. 나나미는 죽지 않았다. 다만 마시로의 손안에 청자고둥 하나가 쥐어져 있었을 뿐.


  전날 밤의 대사를 다시 떠올려 보면, 같이 죽을 사람을 찾아달라는 말이 실은 같이 살 사람을 찾아 헤매는 간절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누구든 진심으로 홀로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누군들 진심으로 죽음을 보고 싶을까? 병에 걸려 죽음이 가까워 올 그때, 역설적으로 생명의 불빛이 더욱 빛나게 느껴지는 때조차 홀로이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나나미가 살아 있음에 놀란 아무로는 놀란 와중에도 비명을 지르고 오열하는 나나미를 겨우 달래고, 이내 두 사람은 장례식을 준비한다. 가족과도 연락이 되지 않는 마시로의 장례식을 메운 사람은 대부분 AV업계 배우들이었고, 이내 함께 가족 연기를 했던 사람들도 도착한다. 어떤 사이냐는 물음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처해하며 엉거주춤 설명하는 '아빠'와 '엄마', '남동생'을 상조 회사 직원들은 가족으로 오인해 맨 앞줄 가족석에 앉힌다. 이전에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때도 느꼈지만,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가짜 가족이 아이러니하다.


  AV 배우들과 매니저도 앉아 공허함을 나눈다. 일전에 마시로가 했던 말, '사토나카 마시로' 연기를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뿐이라는 말을 들으며, 배우들 모두 여배우가 되지 않았으면 공허했을 거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ㅡ 말을 하는 그네들의 표정이 너무나 쓸쓸하고 공허하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연기는 삶과 동의어 인지도 모른다. 비록 AV일지언정 '사토나카 마시로'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는 말은 결국, 마시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마시로 자신 뿐이라는 말인지 모른다. 아무로도 마시로도 나나미와의 첫 만남에서 자신을 배우라고 소개하지만, 한 명은 이름 같은 거 무한으로 바꿀 수 있는 거라고 중첩된 가면을 썼고, 한 사람은 자신만이 자신의 연기를 할 수 있는 거라고 민낯을 보였다.


그는 누구였을까? 주연인데 관객은 그를 모른다.


  아무로는 장례식을 마치고 나나미와 함께 마시로의 어머니 집을 찾아간다. 마실 걸 내준다는 게 큰 컵에 소주를 콸콸 부어 내주고는 자기도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어머니는, 무뚝뚝한 얼굴로 마시로를 '버렸던 딸'이라 일컫는다. 집 벽 높은 곳에서는 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보이는 것이 걸려 있지만, 이런 얼굴로 낳은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어머니는 사진을 만져 보지만, 이미 두 사람은 너무 멀리 있게 되어 버렸다. 오래전 딸이 AV 배우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미친 듯이 때리고 돌아온 게 마지막이었다고 술기운을 빌듯 내뱉는다. 그리고 옷을 벗어던지며, 남들 앞에서 옷을 다 벗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비난했던 딸을 뒤늦게 이해해 보려고 한다. 결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사실 꼭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최소한 그때 보였어야 할 마음과 오열을 이제야 보인다.


  우리는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결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해하려고 애써 보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조차 품겠다는 의지가 있어야겠지만, 1인칭의 연기만을 펼칠 수 있는 우리 삶에서 타인은 언제나 2인칭 아니면 3인칭일 뿐이다. 2인칭이나 3인칭을 1인칭으로 여길 수는 있어도, 1인칭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 어머니가 마시로를 이해하기 위해 꼭 진작에 옷을 벗을 필요는 없었다. 다만 옷을 벗는 마시로조차 사랑한다는 표현을 해줬으면 좋았겠지만, 뚝뚝하고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어머니에게 그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의 울음은, 옷을 벗음은, 일종의 의식 같은 거였다. 늦었지만 한 걸음 움직여 보려는, 이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기에 늦었음에도 행하는 의식.


  그리고 숙련된 배우는 여기 양념을 치며 숟가락을 얹는다. 같이 오열을 하고 옷을 벗고 술을 마시며, 콧물까지 뚝뚝 흘릴 만큼 슬프게 우는 그의 얼굴은 과연 숙련된 배우답다. 너무 당황스러우리만큼 빠른 태세 전환이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보일 정도로.



  그리고 나나미는 홀로 이사를 한다. 새로운 작은 집, 햇볕이 잘 들고 창이 예쁜 집. 마시로가 중요시했던, '좋은 전망'이 있는 집이다. 비로소 나나미와 어울리는 집에 와 있다. 일전에 아무로와 이야기하며 와인 잔에 담아 눈높이를 맞춰 놓았던 베타 두 마리는, 이제 서로 다른 눈높이를 하고 옆에 나란히 있다. 마치 서로 볼 수 없는 곳에 있는 마시로와 나나미처럼. 새로운 집에는 의자도 두 개씩이다. 호텔에서도, 저택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카논과의 과외도 계속하고 있다. 선생님 또 이사했어요? 카논의 물음에 나중에 도쿄 오면 놀러 오라고 하는 나나미도 조금은 달라져 있다. 카논도 달라졌듯이.



  버려진 가구를 갖고 와 선물로 줄 테니 고르라고 하는 (역시나 평범치 않은) 아무로에게 그동안 감사했다고 인사하는 나나미는, '다음에 또 보자'는 아무로의 말과 달리 아마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 때 허공에서 뾰로롱~ 하며 서로에게 끼워주는 시늉을 했던 반지를, 나나미는 햇빛 아래 비추어 본다. (이 장면이 2시간 버전에서 왜 누락되었을까? 의문이다. 내 기준으로는 거의 결말이 바뀌다시피 하는 차이인데.)


  <러브레터>의 이츠키가, 자기도 모르게 주고받았던 애틋한 첫사랑을 뒤늦게 알고 그 후로 어떻게 살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 사랑이 이츠키 마음 한 구석의 불 밝힌 집 같았을 것이다. 나나미에게도 마시로와의 시간이 그런 불 밝힌 집 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나미는 아무로를 다시 보지 않고, 이제껏 얽혀 왔던 가족이나 이전의 세계와 결별한 채 이제야 정말로 온전히 자기 자신의 삶을 홀로 꾸려 내리라는 짐작이 그래서 든다.




  처음 2시간짜리 버전을 보고 나는 여러 번 변주되는 오래된 설화 하나를 떠올렸다. 왜 어디나 있는 그런 설화- 마을에 가뭄이나 전염병이나 뭐 변고가 생기고, 순결한 처녀를 동굴이나 호수나 바닷속의 지네인지 이무기인지 용인지 따위에게 제물로 바쳐야 하고, 당사자인 순결한 처녀는 착하지만 남들을 생각하느라 저의 삶을 박차고 나갈 생각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마을 사람들이나 제 아버지나 제 어머니나 정혼자나 아무튼 남들을 위해 가기로 하고, 그 대가로 공양미 300석이든 뭐든 마을에 풀어 주고 처녀를 데리고 가는 중간 상인들이 있는, 그런 흔한 이야기.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그 이야기의 변주라고 느꼈다. 중간 상인 아무로와, 순결한 처녀 나나미와, 그 나나미를 떼어 보낸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괴물이 있다던 동굴 안에서 만난, 이 극 안에서 유일하게 처녀를 생각하고 아껴 주는 존재였던 마시로. 괴물은 죽었고 처녀는 동굴을 나왔다. 그러나 처녀는 달라졌다. 소설 속의 립 반 윙클이 돌아온 현실 세계에서는 어느새 시간이 유수 같이 흘러 있던 것처럼, 처녀가 돌아온 세계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처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처녀는 자신을 동굴로 보낸 마을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쯤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도시 한복판에서, 없어지지 않은 한 사람으로 꿋꿋하게 살아갈 것이다. 아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SNS로 손쉽게 연결되고, 자신의 일부만 부각하여 내보이기도 쉬운 시대. 남들이 부각한 일면만 보며 그들의 전체를 파악한다고 믿기도 쉬운 시대다. 연예인의 SNS를 보며 그가 자주 가는 곳이나 자주 쓰는 말버릇 그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마저 안다 해도 내가 그 연예인을 안다고 말할 수 없듯이, 일상 공간 속 우리의 관계 또한 그런 측면이 갈수록 커지는 것 같다. 그리고 거기 만족한 채 그냥 살아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다. 아무로와 나나미의 관계처럼.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는 서로를 서로로 대하는 게 아니라 어떤 수단으로, 도구로 취급하는 일이다. 자신은 아니라고 믿고 싶겠지만 생각보다 우리는 쉽게 서로를 도구로 대한다.


  그러나 정말 서로의 삶에 관심이 있는 관계는 다르다. 서로의 부수적 조건을 채우고 채움 받는 수준도 아니고, 서로를 그저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도 아니다. 정말 서로가 서로의 목적이고 서로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도 속속들이 다정한 손길을 내미는 사이, 그런 사이를 위해 노력하는 마음 변치 않겠다는 약속이 결혼식이다. 그래서 마시로와 나나미는 결혼식을 올렸고, 나나미는 그 반지를 빼지 않았다.


  시대가 변하고 우리의 방법도 변했다. 더 이상 이와이 월드도 화이트와 블랙으로만 나뉘어 일갈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롭고 복잡다단한 세계를 품었다. 주연배우의 대사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불신이라기보다는 정말 어디까지가 의도된 것인지를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이와이 월드의 본질은 변치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닿는 것, 서로가 서로를 바라는 것. 서툰 처음이어도 좋을, 그 관계의 아름다움. 이와이 월드는 오늘도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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