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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n 29. 2017

행복의 바탕색

영화: 라라랜드 (2016, 다미엔 차젤레 감독)


  어릴 적에 과자 종합 선물 세트라는 게 있었다. 명절 때 식용유 세트며 과일 박스 옆에 나란히 쌓여 어린 마음 설레게 하던 그것. 사실 실용적으로 따지면 합리적 소비는 아니었다. 그보다 좋아하는 과자만 쏙쏙 골라담아 사는 게 훨씬 나았다. 그 안에 꼭 내가 좋아하는 과자만 있을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그러나 요즘도 비슷한 개념으로 럭키박스라는 기획이 있는 걸 보면 우리는 개인의 호불호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종합 선물 세트를 아마도 꽤나 좋아하는 것 같다. 그 구성조차 실속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라라랜드도 내겐 그런 영화였다. 영화가 시작한 지 5분 만에 나는 행복해졌다. 자동차에서 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며 지금 내가 현실이 아닌 영화를 보고 있다는 걸 너무나 선명하게 느꼈다. 마치 휴가지에 도착해서 "아, 나 진짜 여행 왔어"를 실감하는 순간과 정확하게 똑같은 기분이었다.


  캘리포니아 햇살만큼이나 환하게, 광고의 등장인물만큼이나 이를 많이 드러내고 미소를 짓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 작위적이라면 작위적인 행복의 표정이 어쩐지 너무나 좋았다. 작위적으로 말해줄 때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많이 있으니까. 아마 열 가지 안팎의 색으로 정리해 팔레트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몇몇 색깔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도 좋았다. 색채가 우리 기분을 조물조물 만질 수 있구나, 놀랍지도 않은 문장을 새삼 반복해 깨닫는다.


  라라랜드는 "지금 네가 보는 건 무대고 가상이야" 라고 계속해서 말을 걸어온다. 모든 장면이 그런 건 아니지만 꽤 많은 장면이 그렇다. 색깔과 구도가 반듯하게 배치된 미쟝센, 쉴 틈 없이 사람을 설레게 하는 곡들, 중간중간 <트루먼 쇼> 세트장 같은 느낌마저 드는 배경, 바비 인형처럼 웃고 있는 사람들... 잔디가 잘 정리된 정원에 스프링쿨러로 물을 뿌리는 것 같이 시원한 기분이다.


트루먼쇼 배경 같은 기분. 심지어 옆에 로마 병정 같은 사람들도 지나간다.
심지어 극중에서도 영화 배경이었다. 저 이야기를 나누고 걸어가다 보면 또 영화를 찍고 있다.


  무엇보다도 라라랜드라는 영화 속에 별도의 무대나 세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이 내겐 무척 인상적이었다. 내 생각엔 주인공 두 사람이 한껏 꿈 꾸고 있을 때나 그 꿈으로 서로를 사랑할 때 두 사람을 둘러싼 배경이 꼭 영화 세트장 같았다는 느낌이다. 두 사람이 모처럼 만난 저녁 식탁에서 갈등을 빚을 때, 세바스찬이 밴드 사진 촬영을 하던 때, 미아의 고향 집에 찾아가서 둘이 이야기할 때, 낮에 천문대를 찾아갔을 때는 영화 속의 무대를 보는 느낌이 아닌, 그냥 보통 영화 앵글로 보는 느낌이었다.



  연출도 그렇다. 어떤 장면은 옛날 흑백영화 같고 어떤 장면은 연극 무대를 보는 기분이며 어떤 장면은 뮤지컬 같다. 이를테면 주연 배우 둘이 키스하면 그 부분을 중심으로 원형 페이드아웃 하는 것이라든지. 자연히 오래 전에 본 다른 작품들이 줄줄이 땅콩처럼 같이 엮여 떠오른다. 휴양지로 떠난 날 밤에 깔깔거리며 지난 여행을 같이 추억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아질 뿐이다.



  그러다 보니 보는 내내 탄산수를 마시는 듯 별스럽지도 않게 기분이 좋았다. 색깔과 햇살과 노래, 미소와 춤과 사랑- 그야말로 우리의 삶을 다채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 아니던가. 회색 도시의 백색 소음에 둘러싸여 사는 우리에게, 아 그래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 삶의 127분을 이런 색깔로 물들이고 있어, 우리는 쉬고 있어, 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말해주는 영화라니 얼마나 좋은가. 마치 유원지에 놀러 온 기분이었다.


  첫 5분 동안 톡톡 튀는 설렘으로 받아들인 그 생각은 영화가 마칠 때까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극이 흘러가면서 다른 감정의 선을 차츰 덧입어갈 뿐이다. 이모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미아의 얼굴에서 다양한 감정이 흘러넘치고 나는 그 장면이 이 영화의 절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장면에서 내가 발견한 건 새로운 주제가 아니라 처음에 했던 그 생각이었다. 예술이, 사랑이 우리를 얼마나 숨 돌리게 하며 기쁘게 살게 하는가. 꿈 꾸는 바보들을 왜 우리는 필요로 하는가.


바로 이런 사람들.

  역사 속의 무수한 화가와 시인과 광대들을 기억해 본다. 때로는 천박하다 욕을 먹었고, 때로는 시대의 심볼이 되었으며, 때로는 억울한 뜬소문에 휩싸였고, 때로는 열렬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 대중을 위로하기도 대중과 기 싸움을 벌이기도 했던 이들.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지탄을 받기도 했던 이들. 누군가의 삶에 새로운 영향을 주는 한편으로 한 순간의 가십거리로 소비되며 사라져 가기도 했던 이들. 누군가는 전부라고 다른 누군가는 헛되다고 했던 그들의 모든 라라랜드.

(la la land; 꿈의 나라, 비현실적인 세계. 특히, 영화·TV 산업과 연관지어 Los Angeles, Hollywood, 남캘리포니아를 가리킴.)


  작위적이고 속물적이라 욕을 해도 좋다. 그렇다 한들 그 모든 라라랜드가 우리에게 순간의 반짝임을 선사해온 건 사실이니까. 거기에는 왜곡되고 무너진 구석들도 많이 있지만,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연예 뉴스에서 보던 얼굴과 이름을 신문의 사회면에서 읽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계가 우리에게 의미 없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연스럽고 고요하게 우리를 둘러싼 것들을 묵상하고 노동하는 수도원 느낌도 분명 행복이다. 그러나 자연의 색채를 하나하나 감쳐 물며 살 수 있는 행복이 현대 도시인에게는 사치에 가깝다. 소박해 보이지만, 그리고 본질만 가만히 담아 단순하지만, 그 행복이 현대 사회를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에서 소박하다고 실감하기 어렵다. 미친 듯이 내달려야만 하는 그런 분주함은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가하는 구조적 폭력이 아닐까? 이 폭력 속에서 모두가 이효리처럼 제주도에 집 짓는 행복을 누릴 수 없다면 각자 그 날 그 날 다른 행복한 기분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기분 좋아지는 색깔과 음악과 춤과 예술에 사랑, 그것들을 스포이드로 쪽쪽 뽑아내어 담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 라라랜드로 그런 반짝이는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라라랜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City of stars를 흥얼거리며 세바스찬이 지나간다. 전형적인 뮤지컬 영화처럼 지나가던 행인은 그가 모자를 받았다 돌려주고 손을 잡았다 내어주는 행위를 일련의 무용 동작처럼 군소리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고 나면 가만히 걷고 있던 두 사람은 어느새 미소를 지으며 낭만적인 춤을 추고 있다. 예술이 스치고 간 자리에 행복이 남는다. 미소 짓기도 하고 눈물 흘리기도 하면서 본 라라랜드의 하늘 색깔은 내게 행복의 바탕색처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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