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Jul 23. 2017

속도와 속력의 차이

영화: 덩케르크 (2017,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 직접적인 내용 서술은 없지만, 역사가 스포일러다 보니 본의 아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감안하여 읽어 주세요.


  나는 전쟁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호러 영화만큼은 아니라 해도 갑작스러운 총소리나 긴장감에 흠칫 놀라는 걸 별로 즐기지 않기도 하고, 마치 내 생존이 위협받는 듯 급박한 감정에 나를 몰아넣는 두 시간이 피로하기도 해서다. 계몽적인 색깔이 짙다면 더더욱 사양이다. 그래서 덩케르크를 보게 된 건 예고편에서 성우가 긴장된 톤으로 외친 한 마디의 덕이 컸다. "이것은 전쟁영화가 아니다!"



  영화 <덩케르크>는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에 완전히 밀려 서부전선이 아작 난 상태였고, 영화 초입에서 소개하듯 덩케르크에는 수십만 명의 군인이 갇혀 있었다. 계속된 패배로 연합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독일군은 그들을 향한 포위망을 좁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가 된 군인들을 데리고 싸움을 벌이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 연합군은 군인들을 탈출시키는 작전을 펼쳐, 이를 저지하려는 독일군의 포격과 맞서 가며 치열한 생존극을 벌이게 되었다. 덩케르크에서 도버 해협만 건너면 바로 영국이었기에 빠른 작전 수행을 위해 영국은 연합국 측에 선박 요청을 했지만, 덩케르크에 있는 군인들을 무사히 수송하기엔 모자랐다. 결국 민간 선박을 징발하는데 이 과정에서 화물선부터 작은 어선들까지 몰려와 다 같은 깃발을 달고 기를 쓴 끝에 3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병력도 병력이었지만 바닥까지 떨어졌던 사기를 끌어올린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실제 해변 모습
해변에 있는 군인들의 일주일
소형 선박 '문스톤'호를 몰고 군인들을 위해 덩케르크로 뛰어든 이들의 하루
정한 연료만으로 독일군과 끝까지 싸워야 하는 전투기들의 한 시간 (+그리고 톰 하디의 존재감)


  영화는 토미라는 한 군인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시작해 토미의 동선을 중심으로 덩케르크 작전이 완료되기까지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이 준비하고 애쓰는 과정을 골고루 보여준다. 이를 위해 해변에서 배로 탈출 작전을 수행하는 군인들의 일주일, 그들을 돕기 위한 민간 선박이 바다 위에서 보내는 하루, 독일군의 포격에 맞서 하늘에서 정한 분량의 연료로 비행하는 전투기들의 한 시간을 조각조각 잘라 버무려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자가 선택하고 고민하며 결정하고 움직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간뿐 아니라 인물들도 그렇게 장기판 위의 말들처럼 그곳에 병치되어 제 역할을 다할 뿐, 서로 연결되고 소통하는 모습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기실 그것이 전쟁이란 생각이 든다.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부르며 우는 청년도 없고 애인과 마지막 키스를 나누는 장면도 없다. 개인의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주지 않고 신파조의 대사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등장인물들 사이의 끈끈한 전우애 같은 것도 없다. 큼직하게는 같지만 조금씩은 다른 가치를 가졌기에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전쟁의 상처에 마음이 딱딱하게 다쳐 버린, 관객 입장에서 쉬이 '악'으로 쓱 분류해 버리기 쉬운 인물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모습을 부정하거나 감추지도 않고, 그렇다고 억지로 합리화해 끌어안지도 안는다. 그냥 보여준다. 방금까지 무전을 주고받던 공군 전투기 파일럿들끼리도 서로의 손짓을 다 이해할 수 없으며, 폭격을 당해 전쟁의 상흔을 마음에 끌어안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품지 못했어도 그냥 입술 꾹 문 채 받아들인다.


  심지어 적군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절도 있는 독일군의 경례나 콧수염 붙은 딱딱한 얼굴 같은 건 구경할 수도 없다. 적은 비행기로 배로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한 적은 연합군의 반대말인 독일군이 아니라 생명의 반대말인 그 무엇이었다. 국적도 중요하고 사건도 소중하게 기억되겠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생명을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것이 자기 생명이든, 타인의 생명이든, 국가의 생명이든 간에. 그들은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충성과 성실함이 얼마나 아름답고 필요한 가치인지, 말하기도 새삼스러운 이 문장을 그들은 지켰다. 영화 소개 페이지는 편의상 주연과 조연을 나누어 놓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모두가 주연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각자의 모습을 세심하게 비춰 준다.


  전쟁을 원하고 바랐기 때문에 충성한 사람이 있겠는가. 가교에서 탈출을 기다리며 몸을 웅크리고 있기보다 집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난롯가에 몸을 웅크리고 있기를 원했을 것이다. 군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지로 배를 몰고 가기보다 전쟁 생각이라곤 꿈에도 않은 채 생업을 위해 배를 몰고 싶었을 것이다. 언제 나타날지 모를 적기를 경계하며 그들과 싸우기보다는 악천후를 경계하고 밤의 적막과 싸우는 비행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의 충성과 성실은 다시 말해 불가피한 상황에서 의지를 들여 내린 선택이고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충성과 성실을 보며 나는 오래전 배웠던 속도와 속력의 차이를 떠올렸다. 얼핏 보면 같은 단어 같지만 속도는 이동한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값, 즉 시간당 움직인 거리 자체를 말한다. 반면 속력은 처음 시점과 나중 시점 간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벡터 값으로 개념 자체가 이미 방향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후로 잊고 살았던 이 두 개념이 갑자기 생각난 이유는 아이히만이나 괴벨스 같은 이들도 '충성'하였으며 '성실'하였기 때문이다. 충성과 성실은 분명 빛나는 가치이다. 그러나 방향성이 없다면 파괴력을 가진 악의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가치들이다. 그 방향의 차이는 단순한 국적 차이가 아니다. 윗선의 결정으로 참전한, 선택권이 없던 이들의 국적보다도 이들이 보여준 지향점과 가치관이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온통 짙은 색의 전장에서 또 하나 빛나는 것이 있다면 영웅들이었다. 어업용 점퍼,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 낡은 코르덴 재킷 등을 입고 나타난 구원자들. 잼을 바른 빵과 찻잔과 담요를 나눠주는 영웅들. 어른들의 전쟁 결정에 아이들을 총알받이로 내모는 것을 가만 지켜볼 수 없다는 말을 하며 키를 잡은 선장, 그래서 바보라는 말을 들은 선장, 침몰하는 배에서 빠져나온 이들에게 끝의 끝까지 내민 손. 해군 사령관은 그들을 조국이라고 불렀다. 사지임을 알면서도 전장에 뛰어든 그 배의 이름인 문스톤, 월장석처럼 잔잔하고 고요하게 빛나는 가치이다.



  그리고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 덩케르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바다에서, 전시도 아닌 평시에 배 한 척이 침몰했다. 파란 바지를 입고 소방 호스를 들고 나타난 의인. 자신의 어선을 끌고 나타난 구원자들. 담요와 컵라면을 나눠주던 영웅들. 구명조끼를 양보하던 이들을 버리고 사라진 선장. 빛나는 가치가 빛을 잃으면 얼마나 끔찍한지, 그 배의 잔상은 우리에게 오래오래 내려앉아 사라지지 않는다. 그 배와 아무 상관없는 덩케르크의 바다에서 배가 침몰하고 물이 차오르면 검은 물에 여전히 갇혀 있는 마음 한 구석의 숨이 막혀왔다.


  그 시절 생텍쥐페리가 날다가 사라졌던 하늘도 이 영화에서 본 것처럼 광활했을 것이다. 총알이 빗발치고 한스 짐머가 골라 넣은 불안한 음악이 흐를 때도 바다에 햇빛은 지금과 같은 반짝임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제각기 다른 전쟁의 상처를 갖고 앞으로도 트라우마를 가질 이들은 대사도 거의 없고 이름으로 불리지도 않는, 지금 당장 거리에 걸어 다니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평범한 인간 군상이었다. 다시 말해 전시와 평시가 다른 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생명이라는 가치에 칼끝이 겨눠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칼끝을 거둬내려는 인간의 필사적인 투쟁이 눈에 드러난다는 것뿐이다.


  덩케르크나 흥남 철수 작전 같은 일들이 있고 몇십 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우리의 가치와 방향은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했던 믿음이 깨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필사적으로 생존을 위해, 탈출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존재이다. 각자 다른 상처를 갖고 다른 세계에서 왔으며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그럴 수 있는 존재들이다. 속력이 아닌 속도로 달려간다면. 우리의 역사는 속력이 아닌 속도 값을 서서히 올려가기를, 그렇게 월장석처럼 떠오르기를 바랄 뿐이다.



(+) 덧붙임. 이 영화를 나보다 먼저 보고 이리저리 찾아본 친구가 새로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영화가 르몽드지에서 그 사실성을 비판 받았다는 것이다. 찾아보니 정말로 "덩케르크 작전에서 마찬가지로 철수한 12만 명의 프랑스 군인들은 이 영화의 어디에 있는가?"로 시작하는 단락이 있다.



  전문 번역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우선 지금은 책갈피 삼아 하나만 끼워 둔다. 나는 이 영화에서 "위대한 영국"을 은근히 넣었다는 생각을 얼핏 하긴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수준이라고 느꼈다. 내가 보는 관점은 "위대한 영국"보다 "위대한 일상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작전을 같이 수행한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 영화가 당연히 불편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보면서도 존재감 없는 대사 곳곳에서 프랑스가 절하되는 느낌이 들긴 한다. 어느 정도 존재감이냐면... <빨간 머리 앤>을 읽으면 줄거리나 주요 사건과 무관한 아주 작은 구석구석에서 프랑스인을 무시하는 게 느껴지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 정도보다 더 가벼운 정도. 거의 없다시피 한 농도지만 글로 휘리릭 쓰는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 찍고 대사를 살릴지 말지 고민했을 영화 제작의 과정을 생각하면 그 옅은 존재감이 충분히 불쾌할 수 있다.


  그럴지언정 우리나라 인터넷상에서 이 논쟁이 뭐 그렇게 커질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야욕을 드러낼 때, 그리고 그를 오판한 이들이 유화 정책을 쓰며 유럽 내부에 집중하고 있을 때, 적시를 노려 아시아를 활개치고 다니던 미친 자들에게 진작 짓밟힌 나라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그냥 쟤들이 기분이 나빴대, 그럴 수 있겠다, 선에서 끝날 정도의 무게감이다.


  영화가 역사를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고 이 부분은 특히 우리나라 사극 제작할 때 새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영화가 역사를 이용한다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 역사도 영화를 이용할 수 있는 선까지는 말이다. 바로 알고 바로 보는 건 중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의 바탕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