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뒤에 숨긴 당당한 그림자
많은 작가들이 필명을 쓴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 몇 가지로 나뉜다. 평론가들이나 대중이 '내 이름' 없이 글을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그럴 때도 있고, 그동안 쓰던 장르와 너무 다르거나 장르 자체에 편견이 있는 장르라서 자기 이름을 걸고 쓰기 곤란해서 그럴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자신에 싫증이 나서 '두 번째 삶' 같은 느낌으로 필명을 골랐다가 본의 아니게 한 사람이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상을 두 번이나 받은 작가도 있다. <자기 앞의 생>으로 공쿠르 상을 수상한 에밀 아자르는 <하늘의 뿌리>로 이미 공쿠르 상을 수상한 로맹 가리였다.
재미있는 점은 대체 에밀 아자르가 누군지 밝혀내려는 언론과 평론가들이 한참 헛다리를 짚었으며, 로맹 가리는 집에 앉아 신문으로 그 과정을 유유히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로맹 가리는 끝난 작가다. 그가 그런 글을 썼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한 사람도 있었고, 어느 유명 작가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 정도는 돼야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로맹 가리는 이미 로맹 가리라는 이름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고정관념을 가졌다는 걸 다시 확인하면서, 그럼에도 자기 작품을 진지하게 살펴보고 아자르가 자신이라는 걸 밝혀낼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여러 권의 소설을 펴냈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투명인간을 내세워 모든 걸 지켜보며 통쾌해한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작가들이 필명을 사용한다. 애초에 데뷔할 때부터 가명을 필명 삼아 데뷔하는 작가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아는 많은 이름들이 의외로 본명이 아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유독 특이한 가명들이 있다. 100%를 보여주지는 못해도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 이름인데, 아예 자기를 숨기려고 만든 가명의 경우가 그렇다. 시대의 흐름에 좀 더 도도하게 버티고 서기 위해 이름과 함께 자신의 성별을 감춰 둔 여자들이 있었다.
문학사에서 엘리엇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흔히들 <황무지>의 T.S. 엘리엇을 떠올린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로 유명한 시다. 원래 난해한 시, 이해가 안 돼야 정상인 시인데 우리에게는 다양한 의미로 변주되며 4월이 아플 때마다 더듬거린 바로 그 구절이다.
조지 엘리엇은 조지George라는 남성 이름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엘리엇과는 상관이 없다. T.S. 엘리엇은 20세기 시인이고, 조지 엘리엇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빛낸 소설가였다.
빅토리아 시대. 마치 <두 도시 이야기>를 여는 문구만큼이나 복잡하고도 화려했던, 웅장하고도 초라했던 시대다. 오스카 와일드의 시대였고 올리버 트위스트의 시대였으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 시대를 살기 위해 조지 엘리엇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여자의 본명은 메리 앤 에번스, 전형적이고 흔한 여성의 이름으로 고분고분하고 유순한 중세 여성들에게 많이들 붙었을 이름이었다. 조지 엘리엇은 뻔한 로맨스 소설로 대리 만족을 하는 시시한 여류 작가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모습이 여성 작가에 대한 당대의 편견이었다. 여성 작가라면 현실적인 면이 하나 없어도 지나치게 낭만적인 묘사가 있으면 그만이며 연애에만 목을 매 징징대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고 여기고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조지 엘리엇은 여성 작가에 대한 편견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 필명을 사용했고, 실제로 그런 편견에 편승해 통속적인 글을 펴내는 여성 작가들에 대해서는 경멸을 표했다.
조지 엘리엇은 복음주의 영향 아래서 자란 소녀였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실증주의와 과학의 영향을 깊게 받으면서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둘 다 깊이 보는 작가가 되었다. 지적이고 관찰력이 좋았던 엘리엇은 유명 잡지의 부편집장 자리를 맡아 일을 하기도 했고, <미들 마치>를 비롯한 작품들을 통해 빼놓을 수 없는 문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인간 내면의 심리 묘사는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잘 풀어내는 작가라는 평을 받는다.
<미들 마치>나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애덤 비드>, <사일러스 마너> 등 제법 많은 작품을 썼지만, 당대에는 작품보다 유부남과 동거한 여자로 더 유명했다. 엘리엇과 동거한 조지 루이스는 유부남이었으며 당시 이름 짜하게 날린 문학 비평가였다.
물론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리엇을 꽃뱀이라는 이미지 안에 가두고 그 한 가지 면만 본다면 곤란하다. 자유연애를 외치던 루이스의 아내는 이미 루이스의 친구와 동거 중이었고 종교 규율상 두 사람은 이혼이 불가능했다. 엘리엇은 단순히 유부남을 꼬드겨낸 악녀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 착란 상태까지 갔던 루이스의 아내가 낳은 아이들까지 자신이 부양했다.
그러나 이런 점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이름 꽤나 날린 사람과의 스캔들이 조용히 이해될 시대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동거는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엘리엇은 이 일로 친오빠와 의절했다.
엘리엇에게 루이스는 문학적 원동력이기도 했다. 엘리엇이 창작을 시작한 것도 루이스의 격려로 인해서였고, 작품 활동으로 벌어들인 엄청난 수입도 루이스가 관리해 주었으며, 창작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것도 루이스가 죽었을 때였다.
루이스를 잃고 아주 오래 괴로워하며 두문불출하던 엘리엇은 자신을 찾아온 20살 연하의 존 크로스와 함께 문학을 읽으며 상실의 아픔을 토로하며 지냈다. 그에게 재산 관리 등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결국 사랑에 빠졌다. 이 결혼으로 친오빠와의 관계는 회복되었지만, 사회적 파장은 이전 못지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엘리엇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루이스가 묻힌 묘지에 함께 누웠다.
엘리엇의 삶이 당대 전형적인 여성상과 비교해 볼 때 파란만장하긴 했지만, 확고한 작가로서의 명성보다 그 삶에 더 시선이 간다면 우리는 과연 엘리엇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혹자는 방탕하고 드센 여성의 대명사로, 혹자는 여성 해방 운동의 혁명가로 그 이름을 해석한다. 어느 쪽이든 엘리엇의 문학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이름을 감추고 소설을 썼지만 과연 조지 엘리엇은 이름 뒤에 온전히 숨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당대의 손가락은 조지라는 이름을 깨고 그 안의 메리 앤 에번스를 끄집어 낼만큼 단단했던 건 아닐까? 어쩌면 21세기를 사는 우리조차도 여전히 그런 건 아닐까?
내 기준 '서간 문학 계의 아이돌' 조르주 상드지만, 사실 상드에 관한 가장 유명한 수식어는 '쇼팽의 연인' 혹은 '사랑의 여신'이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피아노실에서 계륜미가 주걸륜에게 쇼팽이 사랑한 여자라고 말한 초상화가 바로 조르주 상드 그림이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지 않냐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주걸륜에게 계륜미가 '하지만 10년도 충분히 긴 시간이야' 하고 이야기하면서, 시간의 틈을 스치고 만난 연인의 안타까움을 아련하게 내비친 아련한 장면이었지만, 조르주 상드는 아련함보다는 늘 기세 등등한 당당함에 가까운 이미지로 읽혔다. 당대에도, 지금도.
상드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랐지만, 어머니와의 유대 관계가 차갑거나 없다시피 한 수준은 아니었다. 16살에 지방 귀족과 함께 시작한 결혼 생활 내내, 그리고 그 시절이 별거의 형태로 어영부영 끝날 때도 상드는 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사실 상드는 어머니뿐 아니라 우정이나 애정으로 엮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어마어마하게 썼다. 26권에 달하는 편지는 서간 문학계에서 손꼽히는 작품으로, 국내에도 번역된 책이 나와 있다.
엘리엇에 비해서 상드는 좀 더 문학적으로 감정적이어서 그런지, 보다 정열적인 이미지로 많이 묘사된다. 남장 차림으로 다른 문인들을 만나고 문학 활동을 했는데, 이런 면을 단순한 기행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많지만 당시 유럽 문단에 '여류 작가'라는 개념 자체가 보편적이지 않던 시절이었음을 조금 더 감안해야 한다. 여성이 자유로운 시대는 분명 아니었다. 상드가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남장을 하는 등 당시의 여성상으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을 한 것도 어쩌면 시대에 대한 반대급부인지 모른다.
아무튼 문학도 삶도 낭만파였던 상드의 인생은 지방 귀족의 성채에서 고고하게 앉아 차만 홀짝거리며 살기에는 너무나 자유분방했다. 물론 차도 마셨을 테고 아이도 키웠지만, 그것'만'이 전부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상드는 6살 연하인 쇼팽을 어머니처럼 감싸 주는 연애를 했다. 섬세한 면이 있던 피아노의 시인을 따스하게 감싸 주기도, 호되게 붙잡아 주기도 하는 존재였다. 마치 화염과 물방울처럼 달랐던 두 사람은 결국 헤어졌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면서 쇼팽이 쓴 곡들과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오래 남았다. 쇼팽 말고도 상드의 연인이었던 사람 중에 유명인사가 꽤 많은데, 시인 뮈세도 그중 하나이다.
꼭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워낙 많은 사람과 교분을 나누던 상드였기 때문에, 상드의 '친구 목록'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많다. 공쿠르 형제, 빅토르 위고, 칼 마르크스, 오노레 드 발자크 등 수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고 담론을 나누었다. 그중에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도 있는데, 들라크루아가 그린 상드 그림이 바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피아노실에 걸려 있던 그림이다.
상드의 편지가 서간 문학으로 손꼽히는 건 가장 먼저 상드의 문학적 탁월함 때문이지만, 편지를 주고받은 인사들 중에도 유명 인사가 워낙 많아서 편지를 받는 당사자가 아닌 우리에게도 비교적 흥미롭게 읽힐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드의 이름은 조르주는 영어의 조지와 철자가 같은(George) 이름인데 프랑스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 것이다. 상드라고 쓰기는 하지만 사실 그 철자는 Sand, 즉 d가 마지막 글자이므로 프랑스어 발음 원칙에 따라 'd'는 묵음 처리되어 실제 발음은 '상'에 가깝다. 조르주 상드의 본명은 '오로르 뒤팽'으로 오로르는 여명, 새벽빛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는 오로라를 프랑스어로 표기한 것 또한 '오로르'인데, 어쩐지 조르주 상드와 오로라는 닮은 면이 있는 것 같다. 커튼 자락처럼 포근하게 많은 사람을 덮기도, 너울 치면서 멀리 떠나가기도 했던 그 삶에서 연상되는 면이 있다. 상드가 오늘날을 살았다면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다. 오로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면 어땠을지.
한 집에 문학가가 하나도 둘도 아닌 셋이나 나온다면 그 집의 저녁상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 궁금하다. 그중에서 노랗게 빛나는 이야기보다는 회색 바람 같은 이야기가 오갔을 것 같은 집이 있다. 브론테의 집이다. 실제로 바람이 많이 부는 황량한 시골에 있다는 그 집에서, 놀라운 소설가 세 명이 태어났다.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앤 브론테가 그 주인공이다.
브론테 가문의 특징은 문학성과 예술성뿐이 아니었다. 요절 또한 그 집안의 특징처럼 자리 잡았다. 세 자매 모두 요절한 것뿐 아니라, 세 자매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으며 위로 있던 두 언니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마찬가지로 예술적인 두각을 드러내던 남동생(앤에게는 오빠) 브런웰마저 오래 살지 못했다. 아일랜드 출신 성공회 사제였던 아버지는 딸아이들을 사제관이나 기숙학교에 보냈고,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딱딱한 훈계와 규율로 점철되었다. 이 감수성 예민한 자매들은 기숙학교의 엄격한 규율에 치를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언니가 세상을 떠난 것 또한 기숙학교의 엄격한 규율 아래 스트레스를 받으며 보잘것없는 식사를 하다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으니 싫고도 남을 만하다.
같은 어린 시절과 짧은 삶 때문일까, 세 사람의 작품은 각각 달라도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있다. 황량하고 음울한 바람이 낮지만 강한 울림으로 불어오는 느낌. 길지 않았던 삶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함께 썼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세 자매 중 제일 큰 언니였던 샬럿 브론테는 학교를 마치고 가정교사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동생 에밀리와 함께 벨기에 유학 길에 떠나는데, 이때 사랑에 빠진 상대가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접어야 했다. 샬럿이 셋 중에서는 가장 나중에 사망했는데, 아버지를 제외한 온 가족의 죽음을 다 지켜본 후였고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임신중이었던 때였다. 언니들을 잃은 기숙학교의 끔찍한 실상, 가정교사 생활, 기혼자를 향한 애정 등 샬럿의 경험은 소설 <제인 에어>에 녹아들었다.
셋 중 둘째인 에밀리 브론테는 언니와 함께 벨기에 유학 길에 올라 둘이 학교를 하려고도 했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성공회 사제였던 아버지의 보조로 온 사제와 결혼했으나 결핵으로 사망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이 영화로도 제작된 <폭풍의 언덕>이다. 내일이 없는 듯 사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맹목적이고 정열적인 사랑, 음울하고 미스테리한 저택을 배경으로 한 매력적인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명작이지만 발표 당시에는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셋 중 가장 어린 앤 브론테는 그 언니들의 작품이 세계를 주름잡는 명작이 되어 버린 데 비하면 그 문학적 명성이 좀 덜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래도 언니들과 함께 지내며 쓴 <아그네스 그레이>로 명성을 얻었고, 그다음 해 발표한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은 BBC 드라마로도 제작된 바 있다.
세 사람은 같이 시집을 내기도 했고,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도 같은 시기에 나란히 썼다. 비단 레이스 드레스같이 부드럽고 유려한 작풍에 익숙하던 유럽에서, 오늘날 리메이크해도 그 긴장감이 전혀 줄어들지 않을 만큼 성큼성큼 몰아닥치는 플롯과 캐릭터, 전개 방식은 단연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소설이 너무 유명해져서 이름이 밝혀졌다. 세 사람이 단명하지 않았다면 이후로 어떤 폭풍 같은 작품들을 쏟아냈을까 생각하면 아쉽기까지 하다.
조지 엘리엇이나 조르주 상드와 마찬가지로 브론테 세 자매 또한 19세기를 살았다. (세 자매의 주 활동 시기는 1840년에서 50년대였다.) 지적이고 자유로웠던 조지 엘리엇조차 남자 이름을 필명으로 썼던 시대에, 시골에서 자라 가정교사를 하거나 학교를 다녔던 여자들이 제 이름으로 발표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 사람은 이니셜을 유지하는 선에서 필명을 만들었다. 샬럿 브론테(Charlot Brontë)는 커러 벨(Currer Bell),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ë)는 엘리스 벨(Ellis Bell), 앤 브론테(Anne Brontë)는 액턴 벨(Acton Bell)이었다.
특이한 점은 조지나 조르주(George)가 전형적이고 흔한 남자 이름이었던 반면, 세 사람이 사용한 이름은 이름(first name)으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이름이었다는 점이다. 세 이름 모두 성(姓)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름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그다지 흔치 않다. 커러라는 이름의 경우에는 성으로도 그렇게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여성은 확실히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흔하지도 않은 이름. 어떻게 보면 가장 확실하게 이름 뒤로 자신을 숨기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은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추리 소설을 냈는데, 오래지 않아 롤링의 작품이라는 게 밝혀지고 순식간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마케팅 전략인지, 아니면 이름으로부터 벗어나 문학적 도전을 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여성이기 때문에 편견에 갇힐까 봐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마치 어딘가 존재하는 세계를 보고 고스란히 담은 듯 촘촘하게 짠 세계관,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들, 판타지를 가득 담았지만 어딘가 현실과도 닮은 면이 많은 이야기로 이미 세계 최고 작가 반열에 오른 롤링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롤링이 해리 포터를 처음 세상에 내놓던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들네임 없는 '조앤 롤링'이라는 이름 대신 'J.K 롤링'이라는 이니셜만 썼다. 보통 이렇게 소년이 주인공인 성장 소설의 경우, 여자 작가의 이름일 때보다 남자 작가 이름일 때 남자아이들이 더 좋은 반응을 보인다는 출판사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름에도 편견을 갖는다. 그래서 연예인들이 예쁜 예명을 찾아 골머리를 앓고, 아이돌 그룹명을 만들 때도 몇 번이나 엎어 가며 다시 만드는 거겠지. 그러나 아직은, 이름에 갖는 편견보다 성별에 대해 갖는 편견이 더 강한 것 같다. 여류 작가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 애거서 크리스티와 박경리와 버지니아 울프와 은희경이 있는 시대지만 우리에게 그런 편견이 여전히 알게모르게 존재한다는 반증이다. '그 해리 포터'를 쓴 '그 롤링'조차 제 이름을 얇은 이니셜 한 글자 뒤에 가려야 했으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조지 엘리엇은 메리 앤 에반스라는 평이한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했을까? 조르주 상드는 오로르라는 자기 이름으로 활동했어도 조르주 상드만큼 유명해졌을까? 브론테 자매들은 <샬럿과 에밀리, 앤이 쓴 시집>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출판했어도 같은 평가를 받았을까? 분명 이 작가들이 자기 이름으로 낼 수 있는 환경은 되었겠으나, 그때 이들이 오늘날 갖고 있는 확고한 문학적 위치나 유명세, 그들을 따르는 스캔들에 대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같았을지는 잘 모르겠다.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를 세상에 내놓은 건 1997년이었으니 20년 사이 우리가 조금은 더 많이 변했으리라 생각하지만, 소설 표지뿐 아니라 수많은 곳에 알게 모르게 숨어 있는 존재들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들 모두, 이들의 문학이 편견을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