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현대사를 움켜쥔 가문이 있다
근대 이후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왕조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췄지만, 여전히 한 나라의 정치계를 쥐락펴락하는 힘을 가진 가문들은 있다. 정치 명문가라고 해야 할까. 미국의 케네디 가문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인도의 현대사 또한 자와할랄 네루를 필두로 한 네루-간디 가문이 꽉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와할랄 네루에 대해서 자세히는 몰라도 <세계사 편력>의 저자이자 인도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특히 3.1 운동을 높이 평가했다고 그 책의 한 꼭지를 인용하는 내용이 고등학교 교과서나 문제집에 종종 나오곤 했다. 그러나 네루는 그렇게만 기억하고 넘어가기엔 너무나 큰 인물이다. 자와할랄 네루는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도 독립운동을 이끌고 독립 이후의 인도와 제3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친 걸출한 인물이니까.
그는 카슈미르 지방의 브라만 가문 출신이다. 원래는 하급 관료직을 맡던 가문이었지만 제국주의가 들어섰을 때 자와할랄 네루의 아버지는 발 빠르게 법률 교육을 받아 알라하바드의 고등 법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가문은 이내 지역에서 손꼽히는 부자 반열에 들어섰고 생활도 자연 영국풍이 되었다. 알라하바드가 있던 인도 북부는 아직 이런 영국풍을 비판할 정도의 분위기가 들어서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는 북부인들의 민족의식이 옅다기보다는 아직 문화 충격 단계에 있었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자와할랄 네루도 자연스레 그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그는 자연히 자신을 인도인과 영국인의 중간 존재 정도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 개념이 이후로도 아주 오래 네루의 의식 저변에 있었던 것 같다. 이후 그는 자신을 "인도를 지배한 마지막 영국인"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자기 속내를 터놓는 대상도 인도인 독립운동가들보다는 친영파 혹은 정말 영국인이었다. 특히 영국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마운트배튼 부부와는 막역한 사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네루가 무척 아꼈던 여동생 비제이락슈미도 이러한 인식은 마찬가지였는데, 여동생은 네루처럼 영국 유학을 한 건 아니지만 영국인 여성에게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영어가 능숙했다. 네루는 비제이락슈미를 많이 아꼈고 평생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으며 나중에 독립 후 외교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대사로 그를 임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문끼리의 정략으로 결혼한 네루의 아내 카말라에 대해서는 남매의 태도가 동일했다. 힌두에 기반을 둔 사람이고 영어도 못한다는 이유로 비제이락슈미는 카말라를 무척 업신여겼으며, 네루가 카말라를 아껴 주었다는 기록도 찾아보기 어렵다. 카말라는 힌두교의 덕목을 잘 따랐고 평생 지고지순하게 네루의 아내 자리를 지켰지만 네루 본인으로부터는 결혼식 그 순간부터 줄곧 외면 당했다. 유럽에서 여성 인권이라는 화두를 접하고 이에 관심을 가졌다는 기록이 있어 흥미롭지만, 그런 행보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네루 가문에서 예쁨 받는 존재도 아니었기에 네루의 정치사에 이름조차 잘 나오지 않을 정도니까.
아무튼 그렇게 10대 중반에 들어선 네루는 영국 유학길에 올랐고 그의 사춘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 즉 그가 어른이 되어 가는 내내 거기서 보냈다. 그러면서 특히 페이비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이후 그가 비폭력주의자였던 간디와는 달리 세속주의적인 노선을 따르며 독립 직후의 인도라는 국가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일 만큼 진보적인 족적을 남기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노선은 달랐을지언정 네루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는 간디의 영향이었다. 또한 노선이 달랐다 한들 완전히 반대되는 발걸음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 간디의 비폭력주의 운동을 함께 한 시간이 꽤 길다. 아무래도 영향을 많이 받은 상대였고 각자의 약점이 상대의 강점이었던 점을 십분 살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던 듯하다. 게다가 간디는 네루에게 정치적인 힘을 실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독립 이후의 인도는 그야말로 네루의 판, 네루의 세계였다. (간디는 독립 1년 만에 힌두 극우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새로운 인도를 만들어 보려는 네루의 노력은 대체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색깔을 지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행보로는 1948년의 카스트 제도 헌법상 폐지를 들 수 있는데, 당연히 브라만을 비롯한 상위 카스트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샀다. 즉각적인 인식 변화로는 당연히 이어지지 못했지만 그래도 인도사에 길이 남을 순간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하위 행정 법들이 헌법을 잘 따라갔느냐에 대한 의문이다. 불과 작년에도 공식적으로 끊어 온 카스트 증명서를 똑똑히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제정했듯 네루 또한 11월 14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기도 했다. 어린이날이 되면 아이들이 도처에서 “차차 네루(=엉클 네루)”를 입내 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치적인 발걸음뿐 아니라 좀 더 가볍고 친근한 영역까지, 그는 다양한 분야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꼭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닌데, 그는 힌두 극우주의자들을 제외하는 등 대체로 인도를 다원주의적인 나라로 만든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슬렘 지도자들과 권력을 나누고 싶어 하지는 않은 사람이기도 했다. 인도-파키스탄 분리가 그의 책임이라곤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책임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또한 제3세계라는 새로운 단위가 세계사에 떠오른 것도 그의 영향이지만, 동시에 그의 범아시아 동맹에 대한 믿음은 철저한 판단에 기반했다기보다 맹목적인 측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이후 중국과의 영토 분쟁에서 뼈아픈 패배를 낳게 된다. 계획 경제와 국유화 등 국가 주도적인 경제 개혁을 해 나간 사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 개혁이나 부정부패 척결 등 필수적이어야 할 부분에 미온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이 없는 이 세상에, 자와할랄 네루 정도면 꽤나 좋은 정치인 아니겠는가. 그는 혼자 판을 깔다시피하는 상황- 즉 독재자가 되기 쉬운 환경에서도 독재자가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스스로가 독재자가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며 경계했다. 현대 인도에서도 여전히 문제인 힌두 국수주의에 빠져들어 '인도는 힌두교만의 국가’를 외치지도 않았다. 그는 제법 훌륭한 정치인이었다. 이 후광을 입고 자라난 인디라 간디를 볼 때, 이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
인디라 간디는 자와할랄 네루와 정략결혼 상대였던 카말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자와할랄 네루는 이 딸을 무척 아끼고 염려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스스로가 빠질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경계했던 꼼꼼한 성찰이 돋보이는 네루와 달리, 인디라 간디는 그런 아버지의 염려를 받을 만한 딸이었다.
인디라 간디는 1917년에 태어났고 유년기에는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즈음에는 독립운동이 한창이어서 아버지가 집에 자주 들어올 수 있는 상황도 못 되었기 때문이다. 인디라는 어머니와 함께 유럽과 인도의 곳곳을 전전하며 살았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정치 인생을 달렸던 이후를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하지만, 인디라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후광보다 어머니의 굴레가 더 컸다. 명망가 네루 가문은 카말라와 인디라를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칭송 받는 아버지와 무시 당하는 어머니, 그 사이의 자신. 인디라의 주요 정서들은 아마 그렇게 형성된 것 같다. 네루는 이를 걱정했고, 인디라가 자기에 집중된 시선을 갖기보다 널리 눈을 들어 다양한 세상을 보도록 계속해서 권했다. 딸을 위해 쓴 <세계사 편력> 또한 바로 이 상황에서 나온 글이었다.
아버지와 연이 깊은 마하트마 간디였으니 인디라에게도 마하트마 간디가 중요한 어른이긴 했지만 두 사람의 성이 같은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인디라 네루에게 '간디'라는 성을 준 건 페로제 간디라는 낯선 남자였다. 주변 모두가 반대한 결혼이었고, 그런 경우 흔히 그렇듯 인디라는 결혼을 매우 서둘렀다. 그 태도를 네루는 못마땅해했고 심지어 마하트마 간디는 인디라가 정욕에 눈이 멀었다며 금욕을 권하기까지 했다. (인디라는 무척 화를 냈다고 한다. 근데 나였어도 그런 말 들으면 화가 날 것 같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라지브와 산제이라는 두 아들이 남았다. 서투른 결정이 불러온 파국이었지만 두 사람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인디라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서로 맞추고 보듬어 가는 삶을 살지 못했다. 다만 여전히 아버지의 후광에서 발버둥 치는 딸의 삶이었을 뿐이었다. 페로제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는 않지만, 인간 관계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믿는 나로서는 페로제 또한 비슷하게 아직은 미성숙한 단계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인디라는 결국 페로제의 아내가 아닌 네루의 딸 자리에 섰다. 인디라에게는 그게 오히려 쉬웠다. 1964년 네루가 사망하고 2년 후 인디라는 곧장 총리가 되었다. 40년대에 독립을 맞은 국가들의 60년대란 아무리 잘해도 장밋빛이 되긴 어려운 것이기에, 네루의 적극적인 개혁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량난마저 찾아왔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입장을 대변하는 인도라는 나라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편할 리 없는 시절이었다. 자연히 사람들은 익숙한 후광에 기대고자 했다.
이때부터 네루는 끊임없이 경계했지만 인디라는 그렇지 않았던, 독재의 기질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국가 주도의 경제는 방만하게 굴러가고 있었고, 인디라의 야심은 사람들의 배고픔보다 해외 사업과 기술에 더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때 인디아의 국정 운영 방식은 국가 재산이 아주 쉽게 도둑맞을 수 있는 틀을 만들었고 지금은 거의 시스템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를 심판하기엔 인디라를 필두로 하는 국민회의당을 견제할 다른 권력이 너무나 미약했다. 인디라는 자기 측근들을 주변에 세우고 자기 위주의 정치를 해 나갔으며, 네루 가문이 인도의 지도자 가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왕이라는 생각과 무엇이 다른가. 국민회의당은 곧 인디라, 인디라의 조종을 받는 사람들, 인디라를 조종하려는 사람들의 당이었다. 네루가 그토록 걱정했던 딸의 자기중심성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인디라는 여전히 '네루의 딸' 후광으로 살고 있었다. 국민회의당이 1967년 총선 성적을 대차게 말아먹었을 때도 그랬다. 인디라는 하위 카스트나 모슬렘 등 사회적으로 중심에 있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빈곤 타파를 외쳤다. 이미 그 구호를 가차없이 버린 전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네루의 딸을 믿었다.
그리고 인디라는 그 믿음에 '녹색 혁명'으로 부응했다. 녹색 혁명은 인도의 식량 생산량을 파격적으로 올린 시기로, 사실 이 또한 아버지가 진작에 도입했던 새로운 종자 덕을 보긴 했지만 아무튼 인디라의 업적이기도 했기에 인디라의 지지층은 더욱 굳어졌다.
‘네루의 딸’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인디라 자신 또한 젊을 때부터 네루 어깨너머에서 배운 정치적 감각이 있긴 했다. 당시 파키스탄 내부 상황으로 인해 벵골계 난민들이 인도로 넘어오면서 경제가 더 어려워졌는데, 이를 계기로 '숙적'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냉전의 전운이 감돌던 시절이었으므로 문제는 더욱 커졌다. 미국이 파키스탄 쪽으로 기울고, 그걸 본 인디라는 자연히 소련 쪽으로 향했다. 이 전쟁에서 인도가 승리했고 인도는- 아니 인디라는 어부지리격으로 방글라데시 독립의 주역이 되었다.
인디라가 때로 보여준 과감한 결정들을 보면 그가 강인한 정치인이었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강인함이 규가 아닌 칼을 쥐었을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게다가 그 칼을 함께 나눌 독재자의 최측근이 있다면 더더욱.
그 최측근은 인디라의 둘째 아들 산제이였다. 인디라가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정치인이었다면 산제이는 어머니의 굴레를 뒤집어쓴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에서 진작부터 후계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야심을 품고 정치인의 길만을 걸었던 어머니만도 못하게, 산제이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한량이었다. 자동차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차 생산을 하겠다며 정부에서 (즉 어머니에게서) 허가와 대출과 투자를 미친 듯이 받아냈다. 물론 이런 경우 결과는 빤하다. 회사는 대실패였지만 산제이의 통장은 차곡차곡 배를 불리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았다.
1975년은 인디라에게 여러 의미로 위기였다. 나라얀이라는 정치인이 간디 정신을 받든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정부 세력을, 즉 인디라에 반대하는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게다가 1971년 선거가 부정선거였음이 밝혀져 무효 처리되면서 인디라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그전부터 독재적 면모를 슬슬 풍기고 있던 인디라는 이제 아예 대놓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런 점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죽이 척척 맞았다.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을 착착 만들어 간 18개월이었다. 산제이가 어머니를 잘 받들며 '권좌를 물려받은' 느낌이 들자 인디라는 다시 또 오래전 '네루의 딸'로서 익힌 버릇을 꺼내 들었다. 빈곤층과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동정표를 산 것이다. 사람들은 또다시 네루의 딸을 믿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로 배신당했다.
1980년 동정표를 힘입어 재기에 성공한 인디라가 그들을 배신하려고 배신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인디라가 재기하기 무섭게 산제이가 사고로 죽었다. 게다가 상황도 심상치 않았다. 인디라와 산제이는 국민회의당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매우 치사하지만) 시크교 정당을 약화시키려고 시크교를 분열시키는 계략을 쓰고 있었다. 즉 시크교 내에서도 그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과격파 쪽을 후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과격파에서 입장을 달리해, 인디라와 산제이를 적으로 돌린 것이었다. 아들도 잃고 그 아들과 하던 일도 잃은 인디라는 미친 사람처럼 힌두교 사원을 찾아다니며 자기의 적들을 저주하고 자기를 보호해 달라는 기도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적'을 경계하는 일환으로 시크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언론에 뿌리기 시작했고, 이 인식의 씨앗이 인디라가 오랜 기간 동안 '독재'와 '소수 배척'으로 갈아 둔 밭에 뿌려져 급속도로 성장했다.
결국 인디라는 1984년 자신을 배반한 시크교 과격파를 짓밟는답시고 시크교의 성지 암리차르 황금사원을 건드렸다. 잡으려던 과격파 누구 한 명이 아닌 무고한 순례자와 시크교도들의 마음을 싸그리 밟은 셈이었다.
피는 피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인디라의 경호원으로 위장 취업한 시크교도 젊은이 두 명에게 살해당했다. 불안과 피해망상으로 얼룩져 과하게 피를 뿌리려다 오히려 그 피에 집어삼켜진, 비참하고 끔찍한 말년이었다. 자기 자신만 집어삼킨 것도 아니었다. 산자이의 청부 세력들이 동네 시크교도를 학살하며 곳곳을 돌아다녔고, 정부는 침묵했다. 이에 분노한 시크교도들이 또 반란을 일으키면서 사태는 갈수록 끔찍해졌다. 물론 인디라는 이미 죽은 후였지만 그래도 인디라의 이름은 이 일에서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인디라 간디는 그렇게 자기에게로 집중된, 그러기 위해 주변의 소수를 짓밟는 말년을 보냈다. 이 마음이 국민회의당의 반대 세력이었던 힌두주의자들의 구심점이 되었다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힌두교와 시크교를 갈라놓으면서 이웃이 이웃을 죽이는 분위기를 만들고 종교와 종족으로만 뭉쳐 서로를 배척하는 분위기를 잡은 것은 분명히 인디라 간디였다. 그 이후로 발생한 모든 종교 갈등과 분쟁마다 힌두주의는 중심에 서 있었고, 그 힌두주의를 급성장시킨 사람은 인디라 간디였으니까. 참으로 끔찍한 이 일의 시작은 인디라의 피해망상에 상당 부분 뿌리를 두고 있다.
더 끔찍한 것은 이 피해망상에 '타자'만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말년의 인디라는 1980년 산제이가 죽은 직후, 산제이의 아내였고 고작 스물세 살이었던 며느리 마네카를 쫓아내기까지 했다.
이 마네카 간디는 비록 백일 된 아들의 이름마저 빼앗은 (마네카는 아이의 할아버지이자 인디라의 남편이었던 페로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지만, 인디라는 그 이름을 바룬으로 바꾼다.) 시어머니에게 날벼락 맞듯 쫓겨나긴 하지만 네루-간디 가문에 시집 온 여자답게 정치적 생명력까지 쉬이 잃지는 않았다. 마네카는 새로운 정당을 창설해 지방에서부터 차곡차곡 권력을 쌓아 나갔다. 1984년 총선에서는 죽은 남편의 형인 라지브 간디와 같은 지역구에 출마해 맞붙었지만, 1984년이 인디라가 암살된 해였으므로 동정표를 산 라지브에게 패배했다. 그 후로 국민회의당이 아닌, 힌두주의 세력과 연합해 정치 생명을 이어 온 마네카는 현재 나렌드라 모디 수상이 이끄는 정부의 여성 아동 복지부 장관으로 일하고 있다. 라지브 간디의 아내이자 여전히 국민회의당의 당수로 있는 소니아 간디와는 여전히 편치 않은 사이다.
그렇다면 한때 마네카의 아주버님이었던, 마네카와 정치적으로 맞붙어야 했던 라지브와 그 아내 소니아는 또 어떤 사람들일까. 라지브 간디는 영국 유학 시절 만난 이탈리아 여자 소니아와 만나 결혼해 이슈가 되었을 뿐, 산제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용히 산 편이었다. 그러나 동생 산제이도 어머니도 모두 목숨을 잃은 후 라지브는 숨겨 두었던 네루-간디 가문의 정치적 수완을 펼쳤다. 할아버지와 어머니에 이어 또 이 가문에서 총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 생활은 길지 못했는데, 1991년 타밀나두 주에서 꽃다발을 들고 환영하던 소녀가 실은 반군이어서 폭탄을 폭발시켰고 라지브 간디는 이때 세상을 떴다.
타밀나두 주는 남부의 주로, 인도에서는 힌디어를 당연히 쓸 거라는 우리의 막연한 믿음을 타밀나두 주에서는 버려야 한다. (힌디를 사용하지 않는 지역은 타밀나두 외에도 많지만, 타밀나두에서는 그 정도가 아니라 그냥 힌디를 좋아하지 않는다.) 타밀 족은 인도 타밀나두 뿐 아니라 인도 스리랑카 지역에도 살고 있는데, 스리랑카에서는 다수인 싱할라 족과 소수인 타밀 족의 갈등 관계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정말 '오늘날'까지다. 작년에 내가 스리랑카에 갔을 때는 선거였고 모처럼 타밀 족이 승리한 날이었는데, 흥분한 사람들이 사고를 벌일 가능성이 있으니 외국인 관광객인 나는 조용히 집에 있으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런데 이 라지브 간디가 스리랑카 내전에 인도군을 참전시켰으니 타밀 족 입장에서는 철천지원수였던 것이다.
소니아는 그 후 한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 아무리 정치계를 주름잡는 가문이면 무얼 하나. 시어머니도 남편도 암살로 죽은 걸 옆에서 본 외국인 여자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그러나 소니아 또한 네루-간디 가문의 일원이었다. 1998년 정계에 입문, 국민회의당의 당수인 오늘날까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소니아는 인도 의회에 진출한 최초의 외국인이고, 그 딸인 프리양카 간디와 아들 라훌 간디 또한 정계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4대째 정치에서 일하는 가문이 된 셈이다. 소니아는 마네카가 쫓겨나던 시절 잠시 조카인 바룬을 맡아 기르기도 했는데 이 바룬 또한 정계에서 일하고 있다. 비록 마네카가 쫓겨났기 때문에 마네카와 바룬이 네루-간디 가문의 일원으로 꼽히고 있지는 않으며, 정치적으로 다른 당에 있기 때문에 한때 자신을 키운 큰엄마의 국적을 꼬투리 잡아 흠집 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긴 하지만.
모디 총리로 대표되는 BJP 쪽이 여당이 되면서 마네카도 장관이 되고 바룬도 역대 최연소 당 사무총장 자리에 오르며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국민회의당이 여당 자리를 빼앗긴다고 쉬이 세력이 약해지기엔 그들의 이름이 너무 오랜 기간 권력과 동일어로 쓰였다. 프리양카, 라훌 그리고 바룬의 활약을 앞으로 지켜봐야 하겠지만, 앞으로도 국민회의당과 BJP는 큰 이변이 없는 한 상당 기간 인도 중심 정치 세력으로 건재할 것이고 네루-간디 가문의 일원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자와할랄 네루부터 바룬 간디까지, 인도 현대 정치사를 키운 것은 8할이 네루-간디 가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각 개인의 무수한 노력이 있었다. 가문은 그들에게 후광도 더했지만 굴레도 입혔을 테니까. 그러나 그 노력의 가치만을 인정하며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 자리의 무게가 너무나 묵직하다. 거기에는 평생 학교 근처도 못 가보는 아이들의 고사리 손부터 마디마다 거센 세월의 인이 박인 가장의 손, 누군가의 폭력에 맞서 자기 머리를 감싸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사람의 피 묻은 손까지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바룬 간디의 모슬렘 혐오 발언이 구설수에 올랐다. BJP는, 아니 BJP뿐 아니라 바지랑 달과 RSS를 비롯한 극우 힌두주의자들의 논리는 그렇다. 이들은 여전히 소수를 배척하고 박해하며 서양에 질색한다. 모든 인도인들은 힌두교도여야 한다며 모슬렘 여자들을 모아다 놓고 강제 개종을 시키거나 기독교인 마을을 습격하기도 했다. 밸런타인데이가 에이즈의 주범이라는 팸플릿도 버젓이 돌아다니고, 이탈리아 출신인 소니아 간디가 바티칸의 첩자라는 소리까지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그렇게 이들이 그동안 뿌린 피는 헤아릴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 당시 한국어 트윗을 날려 국내에서 잠시 ‘호감’을 샀던 나렌드라 모디 수상 또한 이 논란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한때 구자라트에서 RSS의 주홍 깃발 아래 모슬렘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할 때 입을 다물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그렇게 암묵적 동의를 표한 인물이다.
그렇다고 국민회의당이 만능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80년대 말 힌두주의 세력을 다시 꺾고 지난 10년 넘게 이어져 온 국민회의당의 독주를 2014년 BJP가 막을 수 있었던 이유는 국민회의당의 고질병 부정부패였다. 오래 고인 물이라 썩은 물도 많다.
프리양카와 라훌, 바룬 또한 자기의 정치 생명 안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들 또한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와 작은어머니/큰어머니를 지켜보며 정치계의 권력 다툼을 피부로 느낀 이들이다. 분명 허투루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력의 방향이 어느 쪽을 향해 있는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당연히 인도 국민 모두를 대변하는 정치인 같은 건 나올 수 없겠지만, 그리고 정치 색과 이해 관계에 따라 네루의 후예를 지지한다고 나쁠 것도 없지만, 최소한 맹목적일 필요는 없다. 신진 정치인들이 제 목소리를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처럼 보이는 인도에서도 새로운 정치 세력들이 나아오고 있다. 그들이라고 다 옳은 건 절대 아니지만,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나라니만큼 다양한 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이들이 자리를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이 네루-간디 가문의 시작점이 된 네루가 생각한 사민주의도 지금 모습보다는 그에 더 가깝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