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를 걷어낸 유미주의자의 고뇌
어린 시절에는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읽은 동화들이 때로는 잔인하거나 괴상한 경우도 있다. 한편 어린 나이에도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기분을 맛본 동화들이 있는데, 내겐 <행복한 왕자>도 그랬다. 비록 그는 동상이었지만 아무튼 극중에서 생각도 하고 말도 했으므로, 제비에게 심부름을 시켜 가난한 이들에게 전달한 루비와 금붙이가 어린 내 눈에는 눈을 뽑고 피부를 벗겨내어 주는 것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다 내어주고 헐벗은 왕자 동상과 그 옆에 얼어 죽은 제비가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 이야기가 교훈적이기보다 아름답다고 느낀 건 제비가 왕자의 보석을 전달한 사람 중에는 가난과 병마로 짓눌린 사람들뿐 아니라 작가가 되겠다는 푸른 꿈을 꾸는 젊은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나는 '원작자의 의도'를 크게 훼손한 것 같지는 않다. <행복한 왕자>를 쓴 사람은 그 교훈적인 느낌과는 달리, 아름다움과 예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니까.
오스카 와일드. 워낙 개성 있고 독특한 인물이어서 그런지, 그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만약 오스카 와일드를 실제로 만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한 번씩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아마 이 사람이 보기에 나는 한심한 종자일 듯하고, 그래서 우리는 결코 친해질 수 없을 거라고. 그러나 그에 대해 더 알아가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의 인생이 180도 꺾였기 때문이다. 아마 그 심연에 있던 그를 만난다면 나는 그를 동정하고, 그가 최고의 예술가라고 말해 주었을 것만 같다. 내가 아는 온갖 잡다한 문학 지식을 다 동원해 긴긴 찬사를 건넸을 것만 같다. (그러나 웬만하면 그가 알 일이 없는 현대 문학과 동양 문학만 입에 담으리라... 고전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에게 까이긴 싫으니까.) 아름답고 정교한 예술 그 자체를 지향한 그가 기꺼이 그 찬사를 받아 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제법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널을 뛰고 있냐면, 상대가 오스카 와일드라면 이런 상상도 안 될 거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살았지만 예술의 세계를 헤엄치는 사람이었다. 감옥에서 인생 가장 괴로운 날을 보내던 시간에도 그의 편지에는 베르길리우스니 달빛이니 하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억지로 쥐어짜 낸 미사여구가 아니라 그게 그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태생부터 문학과 가까운 곳에 놓여 있었다. 오스카의 어머니인 제인 프란체스카 엘지는 '스페란자'라는 필명의 시인이었고,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서 자국의 민담을 모아 엮는 작업에도 열심이었다. 아버지인 윌리엄 와일드는 근방에서 알아주는 의사였는데, 동시에 세상을 향한 관심 또한 열어 둔 사람이었다. 무료 진료소를 열어 사람들을 두루 만난 데다가 그의 저서 목록을 보면 고고학과 민속학까지 등장한다. 펜이 가까울 수밖에 없는 가정이었을 것이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와 문학, 다양한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지식의 조합. 그 가정에서 자란 오스카는 고전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노력형보다는 타고난 감각이 뛰어난 천재형에 가까운 학생이랄까.
큰 키에 치렁치렁 기른 머리, 화려한 차림새, 고전 문학에 대한 탄탄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위트와 촌철살인, 미학을 위한 미학을 주장하는 예술의 수호자 같은 모습. 그의 존재감은 어디서나 톡톡했다. 자연히 금방 유명인사가 되어 바삐 강연을 다니고 그의 희곡도 제법 성공도 거두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행복한 왕자>라는 동화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고 그를 좀 더 안다면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라는 소설을 읽었겠지만, 그가 주로 성공을 거둔 분야는 희곡이었다. 사실 유명한 건 그의 작품들보다 그의 존재감 자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는 빅토리아 시대였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급진적인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제국주의가 미친 듯이 그 손아귀를 뻗치고, 산업 혁명도 절정에 이르렀고, 투표권의 범위가 속속 바뀐 시기였다. 뭐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급박하고 다양하게 변했기 때문에, 문학 사조도 따로 무슨 주의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보다 빅토리아 시대라고 분류하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표현하면 혼돈의 시기였고, 앞에서는 예의범절을 갖춘 얼굴로 웃고 뒤에서는 말도 안 되는 비방을 해도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안개를 다 뚫을 만큼 강한 섬광이었던 오스카 와일드의 삶은 누가 봐도 성공한 인생이었다. 프랑스나 독일도 아니고 미국까지 미학 강연을 떠났다는 사실은 이를 잘 드러내 준다. 이때 세관에 신고할 게 없느냐는 질문에 신고할 것이라고는 '내 천재성'밖에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감과 호기로움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고, 그럴 법도 했다. 아내 콘스탄스와 슬하에 두 아들을 둔 성공한 극작가. 앙드레 지드를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과 소통할 수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 사회적으로 아무 무리가 없어 보이는 '행복한 왕자'였다.
그러나 '행복한 왕자'의 몰락은 그 행복의 절정에 서 있을 때 왔다. 그 파멸의 시작점은 협박 사건으로 얽혀 만나게 된 알프레드 더글라스 경과의 동성애 관계였다. 공갈 협박에 시달리던 젊은 청년은 자신을 도와준 이 작가의 팬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에 순애보적인 아름다움은 별로 없었다. 더글라스는 낭비벽도 심했고, 오스카가 필요할 때는 서슴없이 오스카를 불러낸 반면 오스카에게 헌신적인 연인은 아니었다. 그 모든 낭비벽과 사치의 비용은 오스카 와일드가 지불했고, 물질적으로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그랬다. 만약 오스카 와일드가 현대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면 '꽃뱀이네! 당장 헤어지세요'라는 댓글로 도배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더글라스는 예술에 대한 동경은 갖고 있었지만 예술 그 자체로 예술을 지향하는 오스카 와일드의 기준에는 미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오래 이어질 만한 애틋함이나 잘 이어지는 요소가 전혀 없었다. 사회적으로도 위험 수위가 간당간당했다. 두 사람은 동성애 성향을 사회에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고 수시로 유곽에 드나들었다. 세간의 시선을 잡아끌고 이러쿵 저러쿵 말을 만들어내기 충분했다. 오스카도 몇 번이나 이 위험한 관계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붙드는 것도 더글라스였다. 협박에 가까운 구구절절한 전보를 보냈고, (전보의 태생적 성격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럼 오스카는 끌려왔다. 더글라스가 붙들 때마다 끌려 왔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오스카도 헤어질 생각만 하고 산 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을 때 오스카는 더글라스를 떠나기 위해 한동안 외국으로 나가기까지 했다.
큰 맘 먹었던 그때 어쩌면 헤어질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더글라스의 큰형이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려 자살하는 일이 일어났다. 공식적으로는 사냥 중 사고로 죽었다고 발표되었지만, 더글라스의 큰형이 동성애 관계로 골머리를 앓던 건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스카는 깊은 슬픔에 빠졌을 더글라스의 가족에게 연민을 느껴 더글라스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계속 그 관계를 이어 갔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고깝게 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더글라스의 아버지인 퀸즈베리 후작이었다. 그는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다부지고 성미가 다혈질인 사내였다. 오늘날에도 아마추어 복싱에 그의 이름을 딴 '퀸즈베리 룰'이 있을 만큼 복싱에 잔뼈가 굵은 인물이기도 했다. 복싱에는 이름을 남겼지만 그 아내나 자식들에게 다정한 인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아들 하나를 동성애 문제로 잃었다. 당시 동성 연애는 법적으로 금지된 일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 음지에서만 일어난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아무튼 원칙은 그랬다.
퀸즈베리 후작이 화가 난 이유는 금이야 옥이야 키운 제 아들을 채간 못된 놈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퀸즈베리 후작과 아들 더글라스의 관계는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엉망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증오했고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오스카 와일드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심연으로부터>를 보면 서로의 싸움에 자기를 이용하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을 몇 번이나 더글라스에게 주지시키는 오스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스카의 이 단호한 부탁을, 다른 부탁들처럼 더글라스는 매몰차게 무시해버렸다.
더글라스는 계속해서 아버지와 맞서 싸우고 싶어 했다. 그전부터 형의 죽음을 아버지 탓으로 돌리며 계속 전보를 보내고 있었다. (현대로 치면 키보드 워리어일지도 모르겠다.) 퀸즈베리 후작으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큰 아들도 이렇게 잃은 판에, 천둥벌거숭이처럼 보이는 셋째마저 이렇게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쥐어 패서라도 '아버지의 집'으로 끌고 오려는 일념, 그에 반해 권총을 들고서라도 오스카 와일드 옆에 있겠다는 고집. 두 독단은 결국 맞부딪쳤고 불똥은 오스카 와일드 혼자 맞았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변호사의 편지, 오스카를 향한 퀸즈베리 후작의 맹렬한 공세,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모욕... 이쯤 되면 오스카와의 연애를 고집하는 게 사랑이나 신의 같은 감정보다는 더글라스가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랬던 측면도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법정으로 간다. 퀸즈베리 후작은 오스카가 어린 소년들을 추행했다고 고발했고, 오스카 와일드는 명예훼손죄로 맞선다. 유곽에 드나들 때 만났던 하층민 출신 소년들이 일제히 증인으로 나와 오스카 와일드를 비방했다. 실제로 남색 관계였는지 아니면 퀸즈베리 후작에게 매수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확실한 건 상황이 오스카에게 아주 불리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오스카 와일드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도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 딱딱하게 놓여야 하는 법정의 언어 세계에서 치렁치렁하게 부유하는 오스카의 언어는 오히려 상대방이 공격할 여지를 주었다. 한 하인에게 키스했냐는 질문에도 그냥 아니라고만 하면 될 것을, '그는 아주 못생긴 사람이었다'고 덧붙이는 바람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도 했다.
결국 퀸즈베리 후작은 무죄로 풀려났고, 오스카 와일드에게는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오스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순순히 끌려가거나, 아니면 프랑스로 망명하거나. 망명한다고만 하면 정부도 얼마든지 눈 감아줄지 몰랐다. 빅토리아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는 감옥으로 끌려간다. 모든 명성과 부는 조롱으로 변했다. '같은 죄'를 지은 더글라스에게는 당연히 어떤 처벌도 내려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였다.
그리고 탄탄해 보이던 가정도 깨졌다.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콘스탄스는 와일드라는 성을 버리고 홀랜드라는 성으로 남은 평생을 살았다. 오스카는 옥중에서도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큰아들 시릴이라고 몇 번이나 아프게 이야기한다. 오스카는 끝끝내 남은 여생 아이들을 다시 보지 못했고 이에 무척 슬퍼했다. 시릴과 비비안도 와일드라는 성 대신 홀랜드라는 성으로 살다 죽었다. 그러나 콘스탄스는 영국을 떠나고 와일드를 떠났음에도 나중에 중요한 사람이 죽었을 때 직접 와서 알려주는 등 신의를 다한다. 회고록 하나 남기지 않고 꾹꾹 침묵한 사람이 충실하기까지 하다니, 더욱 슬픈 느낌이 든다.
오스카 와일드의 감옥 생활은 처참했다. 평생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이 호기롭고 당당한 유미주의자, '눈물 젖은 빵 같은 건 먹어보고 싶지도 않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이는 매일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괴로움 속에 지냈다. 그리고 답장이 오지 않을 편지를 계속해서 썼다. 더글라스를 향한 악 받친 편지였다. 내가 널 위해 쓴 돈이 얼마고, 내가 너를 위해 들인 정성이 얼만데, 네가 어떻게... 같은 느낌으로 시작된 악 받친 편지는 그러나 서서히 어조를 바꾸어 간다.
더글라스가 옥바라지를 잘했기 때문은 물론 아니었다. 신의 있는 친구들이 옥중의 오스카를 챙겨주는 동안 더글라스에게는 한 장의 소식도 날아오지 않았다. 더글라스는 그 와중에 오스카의 편지들을 출판할 계획을 하고, 자기 작품에 '오스카 와일드를 위하여' 따위를 운운하여 오스카 와일드를 펄쩍 뛰게 만들었을 뿐이다. <옥중기>로 추려내 출판되었고, 나중에 <심연으로부터>라는 제목으로 무삭제 출판된 그의 편지들을 읽어 보면 앞부분에서 그의 깊은 절망과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어조는 서서히 슬픔의 늪으로 들어간다. 계속해서 더글라스라는 이름에게로 편지를 쓰고 있지만 그 내용은 일기에 가깝던 글은 점차 자기 내면을 향해 간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 자신에 대한 생각, 그러다가는 그 슬픔 끝에서 급기야 그리스도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보통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살짝 보이는데, 오스카 와일드의 예수도 오스카 본인을 드러낸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시인들의 옆자리에 있다고 했다. 사랑은 상상력이고, 상상력은 빛이라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그는 진정한 개인주의자, 진정한 예술가였다고 했다. 가장 괴로운 날들, 가장 괴로운 자기 자신을 오롯이 들여다보며 그가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에는 자기 자신이 거울처럼 비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오스카 와일드야말로 상상력으로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는, 진정한 예술가가 아닌가 싶다.
출소 후 그는 프랑스로, 파리로 갔다. 영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종교에 귀의하고자 했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어 엉엉 울었다고 한다. 너무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다시 글을 쓸 수 있다면 이런 글을 쓰겠다고 생각해 둔 건 많았지만 다시는 글을 쓰지 못했다. 그는 결국 감옥에 있을 때 안 좋아진 몸에 병까지 얻어 출소한 지 3년 여만에 머물던 호텔 한 구석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스카 와일드를 만난다면. 아마 나는 그를 가까이하기는 좀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분명 그를 좋아했을 것 같다. 방탕으로 표현한 허세, 그 허세를 모두 걷어낸 유미주의자의 바닥에는 말끔하고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있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표현하는 그 순간- 어느 정도 더글라스에 대한 원한과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을 정리하고, 즉 상대방을 향한 칼과 자신을 향한 칼마저 치우고 난 그 자리도 여전히 심연이었다. 그는 여전히 감옥에 있었고 세상에서 지워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즐겨 꽂고 다녔다던 해바라기 한 송이가 심연에도 피어났다. 노랗고 밝은 힘이, 분명 그에게 있었다. 어린아이 같은 이 예술가를 혹시 만난다면, 꽃 한 송이 내밀며 그의 예술에 인사를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