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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Mar 13. 2016

그 땅을 위해 살고 죽다

선교지를 향하기보다 선교지를 위한 선교사

나 어릴 때만 해도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도덕적이고 착한'이라는 형용사가 저절로 앞에 달라붙었고, 선교사라고 하면 '아이고 대단하네'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교회 다닌다는 말은, 선교사라는 단어는 그 색이 달라졌다. 선교라는 단어는 제국주의와 거의 동의어가 된 듯하다. 선교사라는 말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기 위해서라면 아무 데라도 가고, 어떤 사람들의 어떤 문화라도 기꺼이 해치는 무자비하고 몰상식한 사람들'로 정의 내려지는 시대가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사는 '제국주의가 그 나라에 쳐들어가기 전 미리 집어넣어 위화감과 거부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쓰는 존재'로 정의 내려지는 것 같다. 사실 과히 틀린 평가는 아니다. 본국에서 선교 지원금을 받아 선교지의 '미개한 현지인들'을 하인으로 부리며 드레스를 차려 입고 티 타임을 누리는 선교사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반 체제적이 되어야 했고,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동료가 퍼붓는 욕을 먹기도 했다. 그래도 자기 신념을 꼿꼿하게 지켰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빛난다. 이 글은 그 신념, 가치에 대한 묵묵한 신념을 다룬 글이다.



바르톨로메 라스 카사스


1492년은 '역사적인' 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해니까. 사실 그는 자기가 본 땅이 인도라고 굳게 믿는 실수도 했지만, 그 땅에 우연히 발을 내딛었다는 그 '방문'을 '발견'이라고 믿기도 했다. 아무튼 그 항해록은 필사되어 현대까지 잘 전해졌는데, 이는 콜럼버스의 아들 손에서 항해록 필사본을 받아 잘 필사해 두었던 라스 카사스 덕분이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남미에서는 제법 알려진 이름이다.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도시도 있다. 남아메리카 독립 영웅인 시몬 볼리바르가 몇 번이나 좌절되면서도 끝없이 독립 국가를 꿈꿀 때 그 수도 이름을 라스 카사스라고 붙이고 싶어하기도 했다. 자기들을 정복하러 온 스페인 출신에다가 직업은 선교사. 그럼에도 대체 무엇이 볼리바르의 그 뜨거운 가슴에 라스 카사스라는 이름을 박아 넣었을까?


콜럼버스, '인도'를 '발견'했다고 믿었던 그 순간.

이제는 비밀도 아니지만 콜럼버스라는 이름은 남미에서 악명이다. 애초에 그 항해는 인도의 향신료로 부귀영화를 누려 보려던 스페인 왕실과 콜럼버스 본인 야망의 합작품이었다. 콜럼버스가 남미에 발을 디딘 순간, 그는 인도의 황금빛 꿈이 와장창 깨진 그 자리에서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보았다. 원주민들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침입자들은 꿈이 깨진 '보상'을 받고 싶어 했고, 그 '보상'은 원주민 노동력과 생명으로 받아냈다. 아주 톡톡히.


라스 카사스도 처음부터 원주민들 마음 깊이 박힐 삶을 살았던 건 아니다. 군종 사제로 일했던 그는 다양한 '탐험'에 참여해 남아메리카 곳곳을 누볐다. 원주민들을 노예로 '지급'받는 삶, 즉 엔코미엔다에 익숙했다. 엔코미엔다란 마치 중세 봉건 제도처럼 원주민들을 '보호'하는 대신 그들의 노동력을 취할 수 있는 제도라 하는데, 사실상 노예 제도였다. 게다가 남아메리카는 따가운 햇살 아래 농사짓는 것 외에도 자원이 많고 할 일도 많은 땅이었다. 광산도 있었고 드넓은 숲도 있었다. 원주민들은 돌아올 몫 하나 없는 개척과 개발을 피땀 흘려 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회심'을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일 테니 그 회심이 무엇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후 그의 태도가, 그의 삶이 변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원주민들에 대한 대우를 좀 더 잘 해줄 수 있도록 호소했다. 그 활동은 이후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조사하고 보고서를 쓰고 계획을 세우고 발표하고 편지를 쓰고 책을 쓰는 날들이었다.


그 노력이 어떤 구체적이고 큼직한 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우선 남아메리카에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돈을 뽑아내고 싶었던 대지주들이 쉬이 그런 변화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현지인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당시 지주들에게 라스 카사스는 매국노 같이 미운 존재였다. 게다가 운도 나빴다.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왕이 그 글을 읽기도 전에 급사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선구자는 언제나 외롭다. 그 이유가 한둘은 아니겠지만 자기가 그토록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에게조차 이해받을 수 없다는 점도 큰 괴로움이다. 라스 카사스는 누구에게도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현지인들에게는 그의 생각과 노력보다 사제복과 국적이 먼저 눈에 들어왔을 테니까. 지친 라스 카사스는 조용하고 담담하게 '살았다'. 신학 공부를 하고 아메리카 곳곳에서 선교사로 지냈다는 그 고요한 기간에 대해서는 그저 상상할 수 있을 뿐이지만,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대신 밤마다 보고 들은 풍경을 삭이는 삶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 장터에서 본 그 현지인의 절망 덮인 얼굴, 거기서 들려온 조롱의 목소리, 잔인한 채찍 소리, 눈물조차 사라진 눈망울,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세어 보며 울부짖는 그런 삶 말이다.


그리고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1542년이 되었을 때 그는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오랜 고민과 자료 조사로 탄탄하게 다진 이야기를 카를 5세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카를 5세에게는 지주들의 힘이 왕권을 위협하지 않을 정도로 조절해야 하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으니, 라스 카사스의 주장은 그에 훌륭한 명분이었다. 이때 발표된 법령은 지금부터 노예를 더 늘리는 행위를 금지하고, 주인이 죽으면 노예는 모두 자유인이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결과 라스 카사스는 끝까지 심각한 반발을 당하고 목숨을 위협받다가 결국에는 아메리카를 떠나야만 했다. 스페인으로 돌아와서도 편한 삶을 누리지는 못했다. 계속해서 논쟁하고 책을 썼지만 또 계속해서 공격당했다. 역시나 이단 논쟁에까지 휩싸였고, 어디서도 보호받지 못했다. 카를 5세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명분을 위해 라스 카사스의 의견을 수렴한 법령을 반포한 것이었으므로 지주들의 반항이 너무 커지는 건 원치 않았다.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세상을 변화시켜 이름을 빛내는 게 성공이라면 라스 카사스의 삶은 분명 성공이라 보기 어렵다. 게다가 연구와 보고서 작성, 저술, 왕을 만나는 것 정도로 볼 수 있는 그의 활동도 21세기를 사는 우리 눈에는 조금 소극적인 느낌이 든다. 게다가 아메리카 원주민 대신 아프리카 흑인들을 데려오자는 논의를 편 적도 있는데 이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그의 치명적 실수다. 나중에 흑인들이 배에 짐짝처럼 가득 실려 다니는 세상을 보며 그 본인도 너무나 마음 아파했다고 하니, 나쁜 의도로 그랬다기보다는 시야각이 넓지 못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진정 빛나는 건 칸트의 말마따나 양심이다. 최소한 그는 그 시대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산이 아닌 양심으로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괴로워했다. 모두가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이 전쟁이 과연 정의로운 일인지, 모두가 동물 취급하는 이들 또한 신이 창조한 사람이 아닌지, 모두가 축복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노예제는 죄악이 아닌지 하는 무수한 질문이 그 괴로움의 흔적이었다. 몇 백 년이 지나고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그 시절의 역사는 지층처럼 남아 여전히 현대 국제 사회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그림자를 다 지울 만큼의 빛은 못 되었지만, 그래도 빛이 되고자 아등바등 애를 썼던 그 고민들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나마 고맙다.



윌리엄 캐리


인도는 참 많은 선교사들이 거쳐 간 땅이다. 사실 그중 처음은 예수의 제자 도마였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을 때 제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다가 나중에 허리의 창 자국,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예수 앞에 엎드렸다고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다. 정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후 도마가 간 곳이 인도의 마드라스, 즉 오늘날의 첸나이였다고 한다. 그는 노예로 끌려가 궁을 짓는 일을 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전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첸나이에는 성 토마스 관련 유적도 오래된 교회도 많다. 아무튼 그 도마 이후로 많은 선교사들이 인도 땅을 밟았다.


그 모든 선교사가 다 위대한 선교사들은 아니었다. 이미 언급했듯 선교 지원금으로 인도 사람들을 하인 부리듯 하며 더위를 탓하고 티 파티를 벌인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그리고 지금 소개할 윌리엄 캐리도 '위대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답답할 정도로 끈기 있는 인물이었을 뿐이다. 절대 포기하지 않은 사람, 그뿐이다.


오늘날에도 인도는 자기 색깔이 아주 확실하고 독특한 나라다. 지금 보아도 때때로 놀라운 그 일면이 18세기 서양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는 대충 상상이 간다. 특히 선교사들은 힌두교도들이 인신 제사를 드리기 위해 아이를 죽인다든지, 남편이 죽으면 과부가 되는 그 아내를 태워 죽인다든지 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신전에 버려지듯 보내진 아이들을 구해내는 걸 과업으로 삼았던 선교사도 있었고, 과부를 태워 죽이는 '사티'라는 풍습은 결국 일부 힌두교도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면서도 결국 폐지되었다. (라자 라모한 로이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이를 위해 무진장 노력했다.) 그러나 윌리엄 캐리의 이름은 이보다 훨씬 학술적인 단어들 위해 놓여 있다. 그는 인쇄술, 인도 현지 언어학, 농업과 원예술, 의학 등 다방면으로 현지에서 쓰일 연구를 멈추지 않은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인도 지방 언어 사전과 문법 책을 몇 권이나 편찬한 사람인데, 처음에는 성경 번역을 목적으로 인쇄소 사업을 시작했던 일이 점점 사회의 필요를 보면서 언어 연구와 사전 편찬까지 이어졌다.


'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 슬쩍 집어넣는 존재가 선교사'라는 우리 생각과 달리, 당시 동인도회사에서는 선교사들의 입국을 굉장히 꺼려했다. 종교 색깔이 강한 나라에서 포교 활동을 하다가 상업적인 이익이 줄어들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눈치가 상당했던지 윌리엄 캐리도 처음 입국한 지역에서 몇 년 지내다 덴마크령이었던 세람뿌르라는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 이사는 동인도회사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인도에 입국한지 몇 년 되지 않아 아이가 죽었고 그 충격으로 아내도 거의 삶을 놓아 버리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의 인도 생활이 녹록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픈 아내와 가정사를 '선교를 방해하는 존재'로 여기고 나 몰라라 하는 이분법적 싸이코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당장 눈앞의 성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우직한 면이 있던 듯하다. 선교비를 유용한 동료에 대해서도 몇 번이고 그를 다시 다독여 주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전기를 읽은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런 일이 한 번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 안에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데 찜통 같은 더위를 뚫고 동료 선교사를 찾아간 그가 티 파티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장면만큼은 어찌나 내 속이 다 뒤집어지던지 아직도 내 안에 매우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아무튼 그는 잃은 것은 잃은 것으로 두고, 계속 소처럼 제 길을 간다.


평생 그는 두 번이나 아내와 사별을 했으며 (세 번 결혼했다) 아이도 잃었고 동료도 잃었다. 교회를 큼직하게 세운 것도 세례자의 수가 많았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선교회와도 몇 번이나 갈등을 겪었다. 선교사라기보다 사회 활동가나 연구가라고 하면 더 어울릴 만큼,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정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사회 곳곳에 씨앗을 심는 일을 더 많이 했다. 대학 교수, 번역가, 언어학자, 원예학자, 인쇄공, 농부 등 그는 다양한 직업으로 살았고 그 열매를 나는 현지에서 보았다. 많은 인도 사람들이 윌리엄 캐리를 기억하고, 인도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윌리엄 캐리를 자랑스러워한다. 큰 집회나 행사가 있을 때는 가끔 플래카드에 여전히 빛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제2, 제3의 윌리엄 캐리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자는 훈계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말도 종종 들을 수 있다. 좋은 순환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지방어 몇 마디를 주섬주섬 배우다가 그를 존경스러워했던 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인도의 지방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주는 영어 책이 없었다. 그가 그 포석을 깐 사람이니까. 그는 언어학자도 아니었다. 영국의 한 구두 수선공이 여러 개의 언어, 그것도 자기에게 너무나 생소하고 다른 언어를 익히고 사전을 쓰고 성경을 번역할 수 있을 만큼 능통하려면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 것일까. 나도 이 사람들에게 닿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나는 심지어 언어를 전공하는 사람인데도 이렇게 어려운데 그는 대체 얼마나 이 땅을 사랑한 것일까 뭉클해졌던 적이 있다.


선교사는 교회만 세워야 하는가? 티켓을 배부하듯 세례만 베풀면 그만인가? 주일마다 설교문만 읊으면 끝인가? 아니다. 윌리엄 캐리는 삶으로 살아내는 우직함이 진짜임을 침묵으로 외친다. 심지어 유명하거나 폭발적이지도 않은 작고 소소한 매일의 힘을 보여주었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 꾸준히 공부한 시간이, 농장에서 현지인들과 같이 땀 흘리며 언어를 배울 수 있다고 기뻐했던 시간이, 아이를 잃고 서서히 세상을 놓아 버리던 아내의 손 굳게 잡아 주었을 시간이, 그를 선교사로 만들었다.



짐 엘리엇


그는 그냥 대학생이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기독교적 가치로 자신을 가득 채운 젊은 청년일 뿐이었다. 비슷한 뜻을 품은 친구들이 있었고, 같은 방향을 그리며 한 걸음조차 조심스럽게 내딛었던 여자친구도 있었다. 미래가 유망하다면 유망한 청년이었다. 에콰도르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하던 청년은 여자친구와 결혼한 직후, 달콤한 안정감에 파묻히기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부족 사회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 사람들과 말 한마디 할 틈도 없이 죽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 명의 친구들은 마음을 굳게 정했고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고민하며 준비했다.


비행기를 이용해 부족 사람들을 위한 선물 꾸러미를 내려 보내 호감을 사고 서서히 다가가려던 그들의 작전은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부족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간 지 며칠이 되도록 연락이 없어 선교 본부에서 비행기를 보냈을 때, 비행기가 발견한 건 다섯 구의 시체였다. 주머니에 총이 있었지만 쏘지 않은 채로 죽어 있는 짐 엘리엇과 다른 청년들이었다.


'서구 사회'는 무척이나 분노했다. '야만인'들이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을 죽인 사건이므로 이 무슨 '낭비'냐고 외쳤다. 짐 엘리엇의 어린 아내 엘리자베스는 그 표현에 이의를 제기한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라는 그의 생각을 아내는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죽음은 낭비가 아니라고 단호히 말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는 아예 간호사 훈련을 받아 아직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데리고 떠난다. 짐 엘리엇을 죽인 그 부족에게로, 같은 날 남편을 잃은 다른 여자들과 함께.




그 부족의 방어 체계가 모든 외부인을 죽이는 것이었지만,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해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와 서서히 가까워진 부족은 나중에 엘리자베스가 누구 아내였는지 알았고, 그 부족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상당히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창 끝>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나는 이 이야기의 모든 등장인물이 다 눈물겹도록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모두 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가 멋있는 이유는 '야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그토록 사랑한 남편의 죽음을 탓하지 않고 그 부족 사람들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이다. 말이 쉽지 어디 간단한 일이었을까.



모든 외부인을 죽여 자기 부족을 보호하고자 했던,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헌신을 받아들이고 제 색을 바꾸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부족도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다. 엘리자베스가 정작 들어가 보니 부족은 성인 남자가 8명밖에 되지 않고 부족 전체가 수십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부족이었다고 한다. 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제 식구들을 지키기 위해 외부인을 무조건 죽인다는 방어 체계를 세울 만큼 그들도 그저 사랑하고자 했던 것이다.


짐 엘리엇과 엘리자베스 엘리엇의 이야기가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족민들이 개종했기 때문이 아니다. 설령 부족민들이 엘리자베스 엘리엇과 그 어린 딸까지 다 죽였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이야기를 눈물겹도록 멋지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들 모두가 보여준 사랑과 용서, 서로 품고 아끼는 마음, 그 때문에.




기독교라는 말보다 개독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 시대, 이 시대에도 나는 교회를 다닌다. 뉴스에 나오는 충격적인 사건들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 사건들을 옹호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부끄럽지 않아서가 아니다. 다만 내부자로서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존재, 그들의 가치를 둔 곳이 어딘지를 알기 때문이다.


이 글은 누군가를 전도하겠다고, 혹은 내 옹졸한 부끄러움을 합리화하겠다고 쓴 글이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자아 성찰이었다. 옳은 가치에 대해 고민하기를 두려워하며 그저 현실 앞에 눈을 감고 침묵하는 건 아닌지, 이 세상 내 자리에서 내 삶을 열심히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되어 교회에 갇혀 있는 건 아닌지, 교회와 숫자와 크기에 환호성을 지르느라 눈물로 보내야 할 침묵의 시간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부끄러운 소식들 앞에, 나는 부끄럽다.


10년이 넘는 시골 목회 생활 내내 할머님들께 한글과 색칠 공부도 가르치시고 같이 봉사 활동이나 꽃구경, 극장 나들이까지 늘 살뜰하게 모시는 우리 교회 목사님, 오늘도 윤동주와 부끄러움과 한국 사회에 대해 나와 많은 이야기를 같이 나눠 주신 사모님, 인도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 생판 남인 나를 어여삐 여겨 주시며 때로는 한국식 밥상으로 때로는 깊은 이해로 다독거려 주셨던 선교사님들을 생각하면 그 부끄러움은 무게를 더한다.


테제에는 안티테제가 필요하다. 선교사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세상이지만, 망언을 일삼는 자리뿐 아니라 세상의 아픔을 쓸어만지는 자리에도 그들은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안티테제가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끝없이 합을 이뤄 가는 거라고 믿는다. 바라건대 나도 거기 있길 빌 뿐이다. 옳은 것이 옳다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하며, 부끄러워도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역풍을 기꺼이 감당하는 자리에 서는 삶을 꿈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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