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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Jul 22. 2023

몇 번이고 내가 서는 문의 이름은

나는 문득 시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제 어떤 종류의 소설은 읽을 수 없게 되었고 누군가 번역 소설이 더 읽기 편하다고 했던 말을 나는 이제야 이해한다. 너무 좋아하던 소설가의 신간을 한 달 넘게 펼치지 못했다. 처음 책을 받고 읽었던 몇 페이지가 다시 책장을 열지 못하게 막는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다정한 문장들을 더는 참지 못하겠다.

몇 달 내리 나는 직장인의 정수가 되었다. 누군가는 나를 칭찬해 주었고 나도 나를 다독였지만 나는 그런 나에 만족하지는 못했다. 틈틈이 시를 읽었다. 시가 너무 좋을 땐 시를 쓰는 상상을 했다. 시가 나의 균형을 간신히 유지해 주었다. 그렇지만 내가 바라는 건 간신히, 겨우, 균형을 유지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환이 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직장인인 나에서 쓰는 나로의 전환이 애쓰지 않고도 가능하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쓰다가도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결국 그 일엔 실패한 것 같다.

이런 고민은 입구일까? 더 깊이 삶으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 이 단계를 지나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그게 어떤 단계일지 가늠되지는 않는다. 포기일지 초월일지, 포괄일지 모르겠다. 여기까지 온 지금까지의 나는 현실을 눈 아래 두고 깔보는 이상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현실에 발 붙이고 사는 일의 위대함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는 이 태도가 옳은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끔 이 시기를 통과한 누군가에게 정답을 묻고 싶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나의 방식이 아니고, 누군가의 답이 나의 답이 될 수 없으니까 나는 무엇이든 몸소 부딪혀 보자고 결심한다. 그런 결심은 소중한 게 살아보자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해 보자, 가 보자. 나에게 이 말들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담고 있어서 더없이 아름답다. 현재도 미래도 있어, 누군가에겐 이미 없는 현재와 미래가 우리에겐 있다. 그렇다면 나는 또다시 무엇이든 될 수 있어서, 수많은 고민 속에서도 결국 낙관의 카드를 쥐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건 남편이 주고 간 유산.

당신에게 없는 현재와 미래가 내겐 있어. 나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걸 쥔 것 같아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낙관이라는 문 앞에 서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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