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고 아름답게

페르난두 페소아,<불안의 글>

by 박선희
사랑하는 이여, 나는 내 불안의 고요 속에서 버려진 집의 열린 문에 도달하듯이 이 기이한 책에 도달하였다. 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선물한다. 이 책이 아름다우며 무용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믿게 만들지 않는다. 아무것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재의 심연으로 흘러간다. 바람에 흩어져버리는 재는 열매를 맺지 못하며 해를 입히지도 않는다. 나는 이것을 내 영혼으로 썼다. 이것을 쓰면서, 쓰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오직 슬픔에 잠긴 나만을 생각했다. 오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당신만을 생각했다. 이 책이 부조리하므로,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 이 책이 무용하므로 나는 이것을 당신에게 건넨다. 당신에게 준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글>


모처럼 도서관에 갔다. 낡아가는 책 냄새가 떠다니는 오래된 도서관에서 이 책의 첫장을 펼쳐 읽는데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발끝까지 짜릿한데 대개 첫 페이지의 인상으로 결정되고 거의 틀리지 않는다. 이 책을 손에 들고 몇 권 더 빌리려고 다른 책들 사이를 걸어다녔는데 빨리 집에 가서 읽고 싶은 조바심에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

모든 페이지의 모서리를 접어두고 싶다. 아름답고 무용하고 부조리하므로 사랑한단다. 실은 요즘의 나는 진실로 무용한 사람인 것 같아 괴로웠는데 아름다우면 되겠다.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재로 흩어져 버려도 무해하니 괜찮다. 쓸모없어도 괜찮다. 쓸모와 무관하게 존재로 존재하고 싶다. 기왕이면 아름답게. 무용하고 아름답고 부조리하게 살기로 한다. 쓸모없어서 아름답고 부조리해서 사랑스러운 인간이 되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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