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에서의 일기
* ‘오사카의 일기’는 2012년부터 2016년 사이 오사카 벤텐초에 살며 쓴 글입니다.
밤에 에어컨을 켜지 않고도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참 날씨가 꿈만 같다 하고 혼잣말을 했다. 얇은 커튼을 치고 다다미방에 앉아 있는데 바람이 부는지 커튼이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삶, 믿음, 사랑 같은 것보다 죽음, 의심, 이별 같은 것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행복할 때보다 괴로울 때 인생이 더 또렷이 보이는 것 같았다. 행복한 내가 보는 건 다 신기루처럼 느껴졌고, 그렇지 않은 순간 보이는 게 정확한 거라고, 그러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이 꼭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삶의 반대편에 죽음이 있거나 믿음의 반대말이 의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의 끝이 이별인 것만도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도 죽음도 믿음이나 의심, 사랑, 이별도 이 세계에 그저 있는 것이다. 좋은 것 나쁜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게 좋다는 걸 알았다. 죽음이나 의심, 이별에서 내가 무언가를 배웠다면 그것은 그전까지 내가 그것들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몰랐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더 많은 것들이 보였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삶과 믿음, 사랑이 충만한 이쪽에서 그렇지 않은 반대쪽으로 옮겨온 것 같아 서글펐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저 세계가 확장된 것일 뿐이었다.
몰랐던 일들을 겪으며 알게 된 것 하나는 고작 내일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게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세계 속에 우리는 놓여 있다. 예외가 없다는 것, 거기엔 나도 포함된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때는 사는 게 참 두렵다. 내가 붙들거나 움직일 수 있는 건 내 마음뿐인데 알 수 없는 인생보다도 알 수 없고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게 내 마음일 때도 참 많다.
인생에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있어서 어느 때 나는 행복의 그늘에 서 있기도 하고 슬픔의 그늘에 서 있기도 한다. 어떤 그늘은 너무 깊고 길어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든 나무들은 외롭기 때문에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그래서 그늘의 끝도 조금씩 맞물려 있다. 매일 눈을 뜨고 움직이며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어느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늘의 끝에도 닿게 된다.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았으면 싶은 그늘의 끝에도 이르게 마련이다. 다행인가 불행인가, 그저 인생이 그런 것 같다.
어젯밤엔 에어컨을 끄고도 편하게 잘 수 있었다. 베란다 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웠는데 열어둔 베란다 문으로 바람이 솔솔 불어와 스르르 잠들어버렸다. 일주일 전만 해도 나는 에어컨을 끈 채로 잠들 수 있게 될지 몰랐다. 우리는 흘러가고 있다. 이 세계와 함께 흘러가고 있어. 당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 지금, 슬픔의 그늘을 통과하고 있는 당신의 그늘이 너무 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여름과 가을이 맞물린 나무 밑에서 나는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