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깼는데 거실이 너무 환한 거야, 불 켜진 것과는 전혀 다르게 환하더라고. 그래서 나와봤더니 밖에 눈이 쌓여 있는 거지. 다행히 쌀가루눈이라 금방 치울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나 역시도 진눈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오전 출근을 해야 하는 토요일. 눈이 올 거라는 예보는 있었지만 이처럼 기습적으로 새벽에 내릴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었기에 가족들 모두가 조금씩은 허둥거렸다.
아침 식사 준비를 끝냈을 즈음, 남편이 장갑을 벗으며 들어왔다.
"앞집 형님은 송풍기로 눈을 날리면 내가 뒤에서 빗자루로 정리하다가 나 먼저 왔어. 출근해야 해서 먼저 가야겠다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왔지 뭐"
우리 가족이 사는 전원주택은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산꼭대기 막다른 길 끝, 오른쪽에 집이 세채, 왼쪽에 집이 두채 있는데 우리 집은 왼쪽에 있는 집 중 제일 꼭대기 집이다. 산꼭대기 집인 만큼 당연히 마을버스는 없다. 자동차를 이용하더라도 큰길에서부터 한참을 올라가야 하고 마지막 300m는 롤러코스터의 오르막 구간을 연상시킬 만큼 경사도가 가파르다.
운전면허는 있지만 운전을 무서워하는 나의 체감상 경사도는 45도인데, 남편은 20도 정도 될 거라고 한다. 경사도가 45 도면 운전해서 올라갈 수 없다나.....
전원주택 선택요령에 관한 글이나 영상을 보면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한 집은 피하라고 당부한다. 왜 그렇게 말들 하는 것인지 현재 산꼭대기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직접 얘기해 보려 한다.
1. 눈이 오면 반드시 치워야 한다.
평지에 있는 남향의 전원주택에 살 때는 눈이 와도 전혀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큰 도로는 관공서에서 체계적으로 치워주었고 마당이나 주차장의 눈은 그대로 두어도 따듯한 햇살에 저절로 녹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꼭대기까지 오르는 길은 관공서에서 치워주지 않는다. 각 가정에서 눈을 치우지 않으면 너무 가파른 길이라 차를 운전해 내려갈 수도, 올라올 수도 없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엔 아내분께서 출퇴근을 하셔야 하는 이유로 주로 앞집 아저씨께서 매번 눈을 치우셨다고 한다. 우리가 이사 온 후론 남편과 앞집 아저씨께서 교대로 눈 치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산꼭대기부터 눈을 날려가며 길을 만드는 작업, 눈길이어도 차가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길까지 내려가며 송풍기로 눈을 날리는 작업을 하는데 1시간~2시간이 걸린다. 남편 출근 시간 전에 눈이 오면 남편이 눈을 치우고, 남편이 출근한 이후에 눈이 오면 앞집 아저씨께서 그 작업을 하시곤 한다.
이 산꼭대기 집으로 이사 왔을 때 앞집 이웃분들께 인사하는 자리에서 들었던 얘기가 있었다. 겨울이면 아이젠을 가족수대로 차에 싣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부에 있을 때 눈이 내리고 만약 아무도 눈을 치우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경사도가 낮은 곳까진 차로 올라온 다음 어디든 주차를 하고 나머지 길은 아이젠을 신고 걸어 올라와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런 일이 겨울 중 몇 번이나 생기냐고 여쭤봤을 때 한 두 번이었다는 대답을 들었었다. 실제로 작년 겨울, 앞집 아주머니께서 퇴근하신 이후라 앞집 아저씨께서 눈을 치울 이유가 없어진 시간부터 눈이 내렸다. 그 눈이 소복이 쌓이는 바람에 밤늦게 퇴근해야 했던 남편이 퇴근을 포기하고 외박을 했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눈을 치우지 않으면 고립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데 그 상황에 출근을 미룬다거나 퇴근 후 외박을 하는 것처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면 산꼭대기 집에선 절대 살 수 없다.
2. 인터넷 쇼핑이 불편해진다.
산꼭대기 집이 아닌 다른 전원주택에 사는 동안엔 택배 때문에 한 번도 고민했던 적이 없다. 1년에 열 번 정도만 외출하는 집순이였기에 전원생활하는 9년 동안 거의 모든 장보기를 인터넷으로 하며 살았었다. 서울처럼 당일 주문해서 당일 받지는 못하더라도 뭐든 택배를 이용해 구입할 수 있었기에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 산꼭대기 집에 이사 온 직후, 이사 후 필요한 것들부터 꽃모종, 각종 식재료까지 거의 매일 택배가 올 정도로 인터넷 주문을 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마당에서 꽃모종을 심고 있는데 택배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는데 택배를 내려주시던 택배기사님께서 어렵게 말씀을 꺼내셨다. 음식물 택배일 경우엔 그때그때 배송하고 그 외 택배들은 한동안 모았다가 한꺼번에 가져와도 되겠느냐는 거였다.
이유는 이 동네까지 올라오는 길이 너무 가파르기 때문에 자주 다니다 보면 차에 무리가 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이사 오기 전까진 이 위쪽으로 택배를 배달하러 올 일이 거의 없었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렸고 택배기사님은 고마워하시며 가셨다. 한데, 그 얘기를 들은 이후론 무언가를 주문하는 게 상당히 신경 쓰였다. 일부러 필요한 것들을 한꺼번에 몰아서 주문을 해도 업체 사정에 따라 배송되어 오는 날이 달라지는 것까지 마음 쓰이고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택배 배송지를 남편의 사무실로 바꿨다. 남편의 사무실은 서울이기 때문에 새벽 배송도 가능해서 더 좋았다. 집에서 필요한 것들을 남편 사무실로 배송시키면 출근한 남편이 사무실 냉장고와 냉동실에 넣어뒀다가 퇴근할 때 다시 챙겨 오는 방법으로 난 여전히 인터넷 장보기를 한다. 인터넷 택배를 자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산꼭대기 집을 선택할 때 재고할 필요가 있다.
3. 집의 우편함은 장식이다.
산꼭대기 집에 이사한 후 빨간 우체통을 구입해 대문 옆 펜스에 달았다. 그런데 분명 이사 전에 주소이전 신고를 했음에도 몇 달 동안 이장님이 직접 넣어주시는 동네 소식지 외엔 그 어떤 우편물도 오지 않았다. 고지서 관련해 고객센터와 통화하고 납부할 금액을 직접 송금하기도 하고 왜 고지서가 오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었는데 그때마다 고지서는 발송되었다는 똑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게 답답해하던 어느 날, 남편이 색 바랜 고지서 한 뭉터기를 가져와 쏟아놓았다. 집으로 올라오다가 가파른 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차를 멈출 일이 있었는데 길가 전신주에 우편함이 여러 개 붙어있는 게 눈에 띄었다고 했다. 뭔가 이상해서 차에서 내려 자세히 봤더니 우편함마다 각 집의 주소가 적혀 있었고 우리 집 주소가 있는 우편함에 그 고지서들이 들어있었다고 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우체부 아저씨가 오토바이로 올라올 수 없기 때문에 길 중간에 우편함들을 달아놓은 것이겠구나 추측하며 고지서 분실의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산꼭대기 집 대문의 빨간 우편함은 장식이 되었다.
눈이 오면 출퇴근을 걱정하게 되고 심하면 집안에 고립되는 것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산꼭대기 집. 택배도 마음 놓고 주문할 수 없고 우편물도 직접 찾아와야 하는 산꼭대기 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 모두 산꼭대기 집이라 겪게 되는 그 어떤 불편함보다, 집에 머무는 순간순간마다 느끼게 되는 행복함이 너무 크다고 생각한다. 봄이면 벚꽃이 하염없이 흩날리고 여름이면 진한 초록빛이 사방으로 물들어가고 가을이면 그 어떤 명소보다 아름다운 단풍향연이 펼쳐지며 겨울이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설경 속으로 풍덩 빠질 수 있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경, 고즈넉한 자연을 집안에서, 마당에서 즐길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산꼭대기 집에 살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우리 가족은 산꼭대기 집의 단점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꼭대기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