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잘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예쁜 침대와 장난감보다 거실이나 서재에 빼곡히 꽂혀 있는 많은 책이 더 부러웠다.
학창 시절에도 동네에 있는 작은 서점과 레코드 가게는 가끔 머리를 식히러 가는 나만의 장소였다.
그때는 힐링이라는 표현을 몰랐지만, 그게 나의 힐링 포인트 중에 하나였나 보다.
그래도 다독을 해야겠다던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읽은 적은 별로 없었다. 그냥 수시로 읽어도 좋을 책을 가지고 다니는 정도라고 할까.
내게 다독에 불을 지핀 책은 다치나바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이다.
독서광인 그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30개월 만에 사퇴를 하고, 지적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거대한 다독의 바다로 빠져 든다.
한 가지 관심 분야가 정해지면 3~4미터의 책을 읽는다고 한다. '고양이 빌딩'은 그의 유명한 작업공간이다.
물론, 난 수집가는 아니기에 내가 있을 공간이 부족할 정도의 책으로 둘러싸여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독서를 해야겠다는 동기 유발을 일으킨 책이었다.
1년에 100권읽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0년을 목표로 읽고 또 읽었다. 그때는 IT부서에 있었기에 야근과 회식이 잦았다. 당시 차로 출퇴근을 했는데 왕복2시간가량이 소모되었다.
그래서 자가운전을 포기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왕복 2시간의 책 읽는 시간을 확보했다. 그러면 지하철에서만 일주일에 한 권의 책은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주말엔 동네 시립도서관에 갔다. 거기서 책을 빌리고 북카페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책을 읽곤 했다. 그러면 얼추 일주일에 두 권은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너무 두껍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책은 시간이 훨씬 걸리긴 했지만 그런 책들은 주로 장기적으로 읽을 책으로 분류했다.
이런 식으로 10여 년을 책 읽는 습관을 키우다 보니 천 권 이상의 책을 읽게 되었다.
천 권의 책은 읽으면 내가 뭔가로 변해있을 것 같았다. 나의 지위도 경제상황도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도.
그러나, 뭐지? 이 허전함은?
어느 날 딸하고 독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천 권의 독서에 대해 으스대며 얘기했더니 딸은 말했다.
"엄마, 내가 어디서 읽었는데 말이야. 책은 많이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책을 읽고 사람이 얼마나 변화했느냐가 중요하대. 근데 엄만 어디가 변했어?"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난 그냥 무턱대고 읽었다. 몇 권을 읽었느냐가 나에겐 그냥 하나의 성취감이었기에 읽기 편한 책을 골랐고, 또 비슷한 책을 고리고, 생각하고 음미하기보다 그냥 읽어나갔다.
좀 다른 스타일의 옷을 입고 싶어도 막상 쇼핑나가서 옷을 사가지고 오면 옷장 속에 옷들과 별다를 것 없이 비슷비슷한 옷을 사게 되는 경우가 있듯이. 뇌에 자극이 되지 않은 독서는 나를 변하게 할 수가 없다.
도서관은 휴식의 장소이면서 때론 숨고 싶은 장소이기도 했다.
난 권수에 급급해서 독서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나누지도 않고 혼자 주야장천 읽기만 한 것이다.
물론 다독은 중요하다. 다작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은 독서는 그저 책을 덮은 채로 차곡차곡 쌓아놓는 것밖에 안된다. 책을 펼치고 그 문구가 내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되려면 사유해 보고 토론해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다독이 나의 어딘가엔 좋은 영향으로 잔재해 있을 것이라고 위안을 삼아 본다. 지금이라도 독서의 눈을 떠서 나를 진정 나답게 하고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게 할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이젠 씀으로써 균형을 잡기로 한다.
Input이 있으면 Output도 있어야 하기에.
읽고, 쓰고, 대화를 나누는 모든 일상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써내려 가고 싶다. 따뜻한 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