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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온 Mar 24. 2024

섣부른 판단

있는 그대로의 모습 받아들이기

저는 새벽에 동네 산책을 즐깁니다. 매일 같은 코스를 걷다 뛰다 하지만 생각과 마음 그리고 느낌은 늘 다르고 새롭습니다. 그 시간대에 자주 마주치는 모습들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롭고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주인이 가자는 대로 안 가고 제 멋대로인 강아지 2마리를 산책시키는 아줌마, 

몸이 한 쪽으로 기우는 할머니를 두 손으로 정성스레 부축하고 가는 모녀의 뒷모습, 

때가 되면 피고 지는 아름다운 꽃들, 

껄끄러웠던 상사와 너무 닮아서 볼 때마다 깜짝 놀라게 되는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머리에 띠를 두르고 열심히 마라톤 질주하는 젊은 남자, 

매일 봐서 그런지 이젠 나를 피하지도 않는 익숙한 길고양이 가족, 

아직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


그 중 예전에 일했던 상사와 너무 닮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껄끄러웠던 상사였기에 그분이 이사 왔나 하고, 흠칫 놀라기까지 한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할아버지?) 말입니다. 그 상사와는 무언가 삐거덕거리고 왠지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위 여러모로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상사였어요.


오늘도 여전히 주황색 티셔츠에 하얀 잠바를 입고 조교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나왔습니다. 울긋불긋한 피부색에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묵묵히 소리 없이 저와 마주쳤습니다. 진짜 닮았단 말이죠.


어느 날 저 건너편에서 그 아저씨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무언가 하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뭘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해서 지나가면서 슬쩍 쳐다보니 나뭇가지를 꺾어서 땅에 있는 지렁이를 화단으로 옮기고 있었어요. 누가 봐도 지렁이가 죽을까 봐 화단에 놓아주는 모습이었죠.


스님들이 지팡이에 방울을 달고 다니는 이유가 벌레나 뱀에게 미리 경고를 하여 살생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데. 그렇다면 저분도 엄청난 생명 존중 사상가인가?


저와 일했던 상사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은 이기적이고 독단적일 거라는 생각, 왠지 마주치면 기분이 이상하게 나빠지고 안 좋았던 기억을 소환하게 하는 인상이라 성격도 같을 거라고 판단하는 마음, 그런 선입견이 그 짧은 모습을 관찰한 후에 저도 모르게 스르륵 사라졌습니다.


"선입견"이란, 사전적 의미로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관념이나 관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사람들을 알지도 못하면서 이미 마음속에 가진 고정관념으로 바라보고 판단할까요?


지렁이 구출 장면(?) 이후로 껄끄러운 상사와 연상작용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오늘도 그 지렁이 보살님은 여전히 지렁이들을 구출하고 계십니다.

잘함과 잘못함의 개념 너머에
들판이 있다.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겠다.
영혼이 그 잔디에 누울 때,
세계는 너무 충만해서
말로표현할 수가 없다.
개념, 언어, 문구는
서로 어떠한 의미도 만들지 않는다.
- "영혼의 들녘", 루미 시인 -


섣부른 판단에도 의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 관계의 충만함을 가져다줍니다.


근데 혹시...


저 사람, 지렁이한테만 관대한 사람 아닐까요?


참말로, 내 생각은 고집이 셉니다.


<2023년 여름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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