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문 (강)권하는 사회에 대한 항변

[글쓰기 특강 / 문장의 기술] 크리티카의 인문학 에세이 中

by 이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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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문 권하는 사회


직업상 다른 사람들의 글을 검토하고 수정할 일이 무척 많은데, 그때 자주 지적하는 것 중 하나가 ‘어색한 장문’(長文, a long sentence)이다. 물론 장문 자체는 절대 문제가 아니다. 장문도 단문만큼 글짓기의 필수 요소다. 조금 과장하면 잘 쓴 장문 하나는 5개의 단문 부럽지 않을 효과가 있다. ‘잘못 쓴 장문’, 그래서 읽는 이에게 혼란을 초래하는 어색한 문장이 문제인 것이다. 최근 글쓰기를 강의하는 많은 사람들이나 시중의 글쓰기 책 대부분이 단문(短文, a short sentence)을 쓰라고 강조하는데, 개인적으로 난 단문 쓰기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글쓰기 연습에 좋은 조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문만큼 장문도 글의 논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중요하다. 고로 이 장(章)은 <단문 (강)권하는 사회>에 대한 항변이기도 하다.



단문과 장문의 상보성


단문으로만 이뤄진 글은 보는 이가 읽기 쉽고 그만큼 글쓴이의 뜻을 전달하기 쉬울지 몰라도, 글의 흐름이 밋밋해진다. 짧은 것들만 붙어있어서 글에 리듬이 없어진다. 자연스레 글 자체의 ‘멋’도 사라진다. 또 어떤 내용은 단문이 아닌 장문으로 쓸 때 필자의 의도가 잘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데 그 메시지가 수개의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개념들을 일거에 조합하여 제시하는 게 훨씬 독자의 이해를 돕고 글의 흐름도 살릴 수 있는 경우들이 바로 그런 때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각 개념들을 분절해서 여러 단문들로 이어 붙이듯이 쓰는 게 가능하지만, 자못 유치해보일 공산이 크다. 마치 교양 있는 대학생이라면 조금 신경 써서 한 문장으로도 충분히 말할 수 있는 내용을, 조금 띄엄띄엄 또박또박 여러 번 나눠 말하는 초등학생의 발언처럼 말이다. 아래는 전직 기자였고, 이제는 소설가로 저명한 김훈 작가가 2015년 1월 1일 중앙일보에 기고한 새해 특별 칼럼 중 초두 부분이다.(참고로 글 자체가 세월호 사태와 관련한 작가 나름의 評이라 그런지, 소재가 엄중한 만큼 글의 시작부터 어조에 무게감이 상당하다.)

「나는 본래 어둡고 오활하여, 폐구(閉口)로 겨우 일신을 지탱하고 있다. 더구나 궁벽한 갯가에 엎드린 지 오래니 세상사를 입 벌려 말할 만한 식견이 있을 리 없고, 이러한 말조차 아니함만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단문을 즐겨 쓰기로 유명한 김훈 작가조차도 위처럼 장문을 쓰고는 한다. 특히 위 예시는 중문(重文)과 복문(複文)들로 구성돼있다.(사실 ‘중문’, ‘복문’과 같은 명칭과 구체적인 의의는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동안만큼은 정확히 몰라도 무방하다. 일단 단문과 구별되는 장문 개념으로서, 장문의 종류들이라고 이해하면 충분하다.) 원래 외국 만약 조금 억지를 부려서 위 문장들을 단문으로만 고쳐본다면 어떨까.(미리 동의를 얻지 않고 명문으로 감히 사고실험을 행한 점, 원작자인 김훈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모쪼록 원글이 갖는 장문의 가치를 재강조하기 위한 차원으로 널리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본래 어둡다. 그리고 오활하다. 그래서 폐구(閉口)로 겨우 일신을 지탱하고 있다. 더구나 궁벽한 갯가에 엎드린 지 오래다. 세상사를 입 벌려 말할 만한 식견이 있을 리 없다. 이러한 말조차 아니함만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뜻이야 본래 글과 같지만 묘하게 투박한 느낌이 든다. 신기한 건 문장들이 짧은 데도 되레 읽기가 힘들다. 문구와 문장 간에 강약 조절이 사라진 탓이다. 인간은 감각의 동물이고, 음악을 즐기는 존재이기에 리듬을 상실한 글은 머릿 속에 잘 각인되지도 않는다. 형식상 ‘멋’과 ‘맛’이 없어져버리니까 내용상 의미 전달에도 문제가 생긴다. 받아들이는 이가 메시지를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다. 따라서 단문 그 자체는 실용적일 수 있지만, 단문만 지나치게 많으면 글의 본래 효능을 잃는다는 점에서 덜 실용적이다. 반면 장문은 요건이 까다로운 만큼 쓰는 데 에너지 소비가 많지만, 적재적소에 쓰면 독자를 사로잡는데 그보다 효율적인 기술도 없다. 위 칼럼 외에도 김훈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가 결코 단문으로만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절한 시기와 공간에 장문을 집어넣는다. 그래서 그의 글에 흡입력이 있고, 매력이 있는 것이다.



가끔은 필살기처럼 장문 활용하기


이런 비유를 하면 다소 뜬금없겠지만 글쓰기라는 행위가 읽는 이를 글쓴이 의도대로 설복시키는 일종의 게임이라면, 글짓기를 귄투로 은유했을 때 단문만 쓰는 사람은 잽(jab)만으로 경기를 이기고 싶어 하는 자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잽만으로 경기에서 승리하기는 여간 녹록찮은 게 아니다. 시쳇말로 최소한 “큰 거 한두 방” 정도는 있어야 한다. 어퍼컷(uppercut)이나 훅(hook), 카운터펀치(counterpunch, counterblow) 같은 것 말이다. 그래야 경기를 확실히 이길 수 있고, 승부사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장문도 이와 같다. 잘못된 장문을 쓰는 게 문제이지, 반대로 잘 쓴 장문은 글의 품과 격을 높인다. 뜻을 전달하는 데 주효한 것은 당연지사다.



하드보일드 문체의 거장, 헤밍웨이


21세기 한국에서는 김훈 작가가 ‘단문의 대가’로 유명하다면, 시공을 조금 옮겨 20세기의 서양에서는 ‘하드보일드(hardboiled)’ 문체로 유명한 어니스트 헤밍웨이(Earnest Miller Hemingway)가 있었다. 하드보일드는 영어 표현 자체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본래 계란을 완숙하는 조리법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그게 문체나 글의 전반적인 스타일을 상징하는 용어로 전용(轉用)되었는데, 그때부터 「수식을 자제하고 냉철한 시각으로 사물과 관념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하는 예술계의 용어로 일반화되었다. 헤밍웨이는 소설가뿐만이 아니라 언론인도 겸했는데, 사실(fact) 보도에 집중해야하는 그의 직업 특성이 직간접적으로 그가 사실주의적인 하드보일드 문체를 갖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공교롭게도 소설가 김훈 역시 전직 기자 출신이다.) 헤밍웨이가 ‘단문의 대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표 사례로, 그가 단 3개의 문구(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만으로 소설을 완성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6개 단어만으로 일궈진 이 소설은 <누군가 아이를 잃었다!>는 화두를 형상화함으로써 읽는 이가 누가됐든 지간에 독자의 고유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실로 인류 역사상 가장 짧되, 가장 인상적인 스토리텔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문과 장문의 아름다운 동거를 위하여


그러나 -김훈 작가와 마찬가지로- 헤밍웨이 역시 결코 단문으로만 글을 짓지 않았다. 아래는 헤밍웨이가 글쓰기의 태도 및 기법과 관련하여 쓴 글들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물이다. 오히려 단문보다 중문(重文)·복문(複文) 등 장문이 많다. 심지어 마지막 단락은 아예 통째로 문장이 한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아래 인용문에서 헤밍웨이는 단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글의 논지는 단문을 강조하는데 정작 문장별 형식은 장문이 더 많다니, 일견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건 절대 역설이나 모순이 아니라 생각한다. 오히려 단문과 장문이 서로를 필요로한다는 그 상보성을 주장하기 위해 헤밍웨이가 부러 재주를 발휘한 대목으로 여기고 싶다. 일단 한번 읽어보자. 그리고 숨은 뜻을 추론하고 그의 재치에 감탄해보자.


「… 때때로 새로운 소설을 시작했는데 잘 나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벽난로 앞에 앉아서 작은 오렌지 껍질을 쥐어 짜 불길 언저리에 떨어뜨리며 푸른 불꽃이 타닥타닥 피어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곤 한다. 그리고 일어서서 파리의 지붕 너머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 그러면 마침내 진실한 문장을 하나 쓰게 되고 거기서부터 다시 글을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내가 알고 있거나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진실한 문장 하나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처음부터 장황한 글을 쓰거나, 뭔가를 과시하려는 것처럼 글을 쓰기 시작하면 복잡한 무늬와 장식들을 잘라내고 처음에 썼던 단순하고 진실한 평서문 하나로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헤밍웨이의 글쓰기』 中, 어니스트 헤밍웨이 著, 래리 W. 필립스 編著, 이혜경 옮김, 스마트 비즈니스 출판사)

이쯤 되면 어떤 ‘좋은’ 글의 경우에는 단문이 주역이 아니라 오히려 장문이 주(主, main)가 되고, 단문은 그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칠 수도 있음을 방증한다. 대신 위 발췌 글의 요지처럼, 장문의 미로에 빠졌을 때는 다시 단문으로 시작할 따름이다. 그런 차원에서 단문은 아리아드네의 실이고, 장문은 그 실의 확장판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단문과 장문은 어느 하나 소홀할 수 없는 필수 불가결한 상호 공존 관계다. 단문과 장문이 서로 어느 정도 비율로 공존할 때 이상적인지는 작가의 필력, 논의하는 소재, 해당 내용이 글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글의 시작부터 글의 끝까지 이어지는 글 군데군데의 흐름 및 호흡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결국 이거다. “긴 문장도 괜찮다. 긴 문장을 너무 적게 쓰려고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읽는 사람이 보통의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 그가 읽어서 요지를 파악하기에 벅차지 않을 정도의 정보량과 길이를 담아내면 족하다. ‘요지를 파악하기에 벅차지 않을 정도의 정보량과 길이를 담은 문자’, 그건 결코 어색한 장문도, 잘못 쓴 장문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담긴 정보의 질(質, qyuality), 내용의 진실성이다.” 위에서 인용한 헤밍웨이 역시 이 같은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위 글을 당신도 정독했다면 이제 한번 생각을 정리해보길 바란다. 단문과 장문의 아름다운 동거에 대해서 그리고 그 동거가 아름답기 위한 당신만의 방법들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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