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식과 교양의 척도가 되는 인문학 글쓰기 연습

[글쓰기 특강 / 문장의 기술] 크리티카의 인문학 에세이 中

by 이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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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강의들로 배워놓은 당신의 지식·정보들, 과연 안녕하십니까


성인 교육 시장의 규모가 어느덧 2조원 대를 넘어섰다고 한다.(2017년 기준) 1인 다직업 시대, 평생교육 시대 등을 구호 삼아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혹은 학교에서 미흡하게 배울 수밖에 없었던 강의들이 실로 다채롭게 등장했다. 그 중 인문학 강좌들은 ‘인문학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로 불릴 만큼 급증했다.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사실 현재 교육 체제 하에서 학생들이 중·고교 시절동안 배우는 인문학 및 사회·자연과학 내용들은 분명 교양을 충실히 쌓기에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또 인문학과 사회·자연과학계의 최신 동향이나 업적들은 계속해서 갱신되기 때문에 학창 시절 이후에도 교양을 쌓는 일 역시 매번 갱신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차원에서 성인 사교육 시장이 이처럼 확장 일로에 있다는 점은 매우 장려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문학 강좌를 통해 쌓은 지식은 어떻게 지혜로 승화될 수 있을까. 강의를 들은 것만으로도 교양이 생성되는 것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럴 리 만무하다. 물론 강연을 듣기 전보다 강연을 듣고 난 후가 적어도 ‘단기 기억’ 측면에서 더욱 지식과 교양이 생겼음은 분명할 테다. 그러나 이런 단기 기억들이 실생활에서 필요할 때마다 적재적소에 응용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실제로 필자가 오랜 기간 학생들을 가르쳐본 바에 의해도 ‘배웠던 인문학’과 그를 ‘실제로 활용’하는 일은 분명히 별개다. 학생들 본인도 이러한 고충을 자주 토로한다. 분명 배웠던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왜 정작 내 주장의 근거로 그것들을 써먹으려고만 하면 기억이 잘 나질 않거나, 아주 일부만 엉성하게 이용할 수밖에 없는지에 관한 고충들이다.



글쓰기와 말하기로 (심화)복습이 필요한 인문학 공부


난 그 이유 중 하나로서, 강좌를 통해 배웠던 것을 스스로 글이나 말로 ‘연습하고 표현’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연습하고 표현한 결과물을 누군가가 ‘검토하고 다듬어 주는’ 사후지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때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강의와 책이 선풍적인 인기였다. 많은 이들이 관련 동영상을 시청했고, 책을 샀다. 당시 내 수강생들 중 편입을 준비하던 대학생들도, 심지어 대입을 준비하던 고등학생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그 대세에 동참했다. 대개 그해에 화제가 된 학자나 그의 사상은 당해 연도 논·구술 시험에 곧잘 출제되는 터라, 학생들이 ‘여러 사회 정의에 관한 이론’에 대해 나름의 지식·교양을 체화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간단한 에세이 숙제를 내준 적이 있다.

「투표를 하지 않는 행위 또는 기권 표를 행사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권리·의무를 져버리는 일인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만약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한번 이상 듣고 본 적이 있다면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잠깐이나마 고심해봤으면 한다. 바로 밑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읽기를 잠깐 멈추고 말이다. … 대답할 수 있겠는가?)


프랑스 대학입학 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 형식을 본떠서 손수 제작한 문제였다. 마이클 샌델이 본래 공동체주의자(혹은 공화주의자)로서 ‘시민이 덕을 발휘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공공선(公共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입장이고, 강연과 책을 통해서 이를 줄기차게 강조했던 탓에 이에 착안하여 필자가 문제를 만든 것이다. 또 그가 자신의 철학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정의란 무엇인가』의 상당 분량을 여타 사회 정의 이론인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간단히 얘기해서, 학생들 모두 『정의』에 관한 인문학을 최근 들어 공부해본 바가 있으니 그를 자기주장의 논거로 삼아 「정치적 無관심도 정치적 ‘관심’이 될 수 있느냐」를 한번 자신만의 글쓰기로 ‘연습하고 표현’해 볼 기회를 준 셈이다. 과제를 제출한 학생에게는 필자가 직접 첨삭을 통해 ‘검토하고 다듬어주겠다’고도 약속했다.



배웠음에도 글과 말로 제대로 써먹질 못하는 경우들


이 과제를 수행한 학생들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


①: 일단 문제 풀이 자체를 포기한 경우였다. 수강생 중 과반이 이에 해당되었다. 숙제를 제출하지 못한 많은 이들이 말하길, 뭔가 머릿속에 알 듯 말 듯 할 말이 떠오르는 것 같다가도 막상 글로 옮기려니까 어떻게 글을 시작하고 구성할지 엄두가 안 난다고들 했다. 애당초 이 문제가 ‘정의론’의 범주에 속하는지도 몰랐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②: 문제 자체가 『정의란 무엇인가』와 일절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공화주의·자유주의·공리주의 등과 같은 이론적 근거를 단 하나도 대지 않고 그저 본인이 평소 갖고 있던 관념과 입장만을 서술한 경우였다. 이 경우 이론 논거를 인용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글의 설득력이나 권위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③: 문제가 『정의란 무엇인가』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눈치 챘지만, 마이클 샌델 식의 공동체주의(공화주의)만을 지나치게 좇은 나머지 그 반대 입장이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와 제 3의 견해인 공리주의 등에 대해 비판하는 논거가 부실한 경우였다. 이 경우는 자기주장을 옹호해주는 이론적 근거만이 존재할 뿐, 그에 대해 딴지를 걸 수 있는 반대세력의 논리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위 세 가지 유형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배운 걸 제대로 못 써먹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위에서 말한 흠결들이 거의 없는 평균 이상 급의 답안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물론 반드시 특정 인문학 강연을 들었다거나 책을 공부했다고 해서, 인문학적인 질문들에 대해 대답할 때마다 공부했던 관련 내용들을 죄다 논거로 활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부 지식과는 별개로 그 질문에 대해 자기만의 고유한 견해가 있다면 그를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번 되물어보고 싶다.


Q1. 인문학 강좌를 듣거나 책을 보고 나서 곧장 자신만의 창발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일반인 중에서 몇이나 되겠는가. 또는 인문학 공부를 하기 전에 이미 고유한 견해를 갖고 있는 일반인은 얼마나 될까. 아마 해당 학계에서 장래가 무척 촉망되는 학자거나 -(이땐 이미 일반인이 아니다!)-, 그 정도의 자질을 가진 일반인이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자가 왜 한낱 성인 강좌를 들을까.


Q2. 설령 Q1이 가능하다 해도, 기존의 관련 이론들을 일종의 비판 논거, 즉 소극 논거로 쓰는 것은 무익(無益)한 일인가. 외려 논의를 정밀하게 만들고 그 외연을 확장해서 본인 글에 설득력과 권위를 갖게 하는 일환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본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해주는 논거들, 즉 적극 논거만 있는 글은 논리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반론에 대한 고려가 없고, 그 재반론도 없는 탓이다.


Q3. 안 쓸 거면 뭣 하러 배웠는가. 또, 못 써먹을 거면 뭣 하러 배웠는가.



글쓰기와 말하기는 당신의 가진 지식의 질(質)을 높이는 방법이다


정말 진부한 표현이지만 안할 도리가 없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인문학 강연을 많이 듣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게 아니다. 강의를 듣고 나서 그 지식이 증발되어버리는 것, 더 정확히는 증발되어버리게 ‘방임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한번 들었던 강연·강의를 반복해 들어서 복습 량을 늘리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러나 그렇게 같은 지식을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해 공부한다고 해서, 기상천외하게 변화를 거듭하는 온갖 인문학 질문들에 대항해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고 장담할 순 없다. 뇌 과학에 따르면 인간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입체적으로 체화한 정보를 더 길고 정확히 기억한다고 한다. 인문학 지식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기억했다면, 그 다음은 그것들을 손으로 쓰고 말로 내뱉으면서 기억의 질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바뀌고 지식·정보가 지혜 및 교양으로 발전한다. 수업을 듣고 책을 읽는 것이 수렴형 행위라면, 글쓰기와 말하기는 발산형 행위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당신이 가진 그 놈의 교양이라는 것도 증명되는 것이다. 인문학 강좌랑 인문학 책들을 백번 듣고 천 번을 봐도 현실에 맞는 문제의식으로 변형시켜 쓰거나 말할 줄 모르면 그 공부는 죽은 공부다. 부디 당신의 인문학 공부가 허사가 되지 않기를 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부터는 눈과 귀만이 아니라, 손과 입도 조금은 바지런을 떨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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