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에세이 골라 읽는 법 / 多讀의 중요성

[글쓰기 특강 / 문장의 기술] 크리티카의 인문학 에세이 中

by 이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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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 → 다상 → 다작

글을 잘 쓰고 싶으면 무작정 뭔가를 갈겨대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 전에 ‘좋은 글’을 많이 보는 게 우선이다. 이젠 너무 많이 회자되어 상식처럼 되어버린 글쓰기 방법론 중에 <다독(多讀), 다상(多想), 다작(多作)>이 있다. 이 세 가지 중 굳이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다독 > 다상 > 다작’이다. 희대의 천재가 아닌 이상, 글은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본 것(또는 읽은 것)에서 나온다. ‘좋은 글’도 굳이 나누자면 2가지다. 사고력·내용이 좋은 글과 표현력·형식이 좋은 글이다. 우선 이 둘 중에서 ‘사고력·내용이 좋은 글’에 대해서만 얘기해보려 한다. 그리고 일단은 ‘좋은 수필, 에세이’에 대해서만 얘기할 것이다.(인문학 및 사회·자연과학과 관련한 좋은 글 얘기는 차후에 따로 쓰려고 한다.)


내용에 지성력을 갖춘 수필과 에세이를 읽자

요새는 프로든 아마추어든 수필 작가, 에세이 작가가 넘쳐난다. 서점에서 신간은 매주 홍수 나듯 뿜어 나오고,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포스트, 다음 브런치, 페이스북 그 외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인터넷 매체에서도 매일 매일 네티즌들의 글 공장은 가동된다. 나 역시 간혹 서점을 들르거나 웹 서핑을 하다보면 혜안을 얻는 수필·에세이들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글쓴이의 감상이나 사변을 토로한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수필·에세이도 자주 본다.

읽는 이에게 혜안을 주는 글과 감상·사변의 저장통에 불과한 글은 ‘내용의 지성력(知性力)’에서 차이가 있다. 내용의 지성력’은 배움에서 비롯된다. 누군가한테 배운 것이든 혼자 힘으로 익힌 것이든, 많은 것을 보고 읽은 작가는 특정 주제에 대해 글을 쓰더라도 그 주제를 본인이 과거에 배운 것들과 연계하여 ‘자기 생각’을 피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안을 입체적으로 논할 줄 안다. 사안을 다양한 측면으로 고민하는 능력도 생기다보니 자연스레 시각이나 관념도 비범해진다. 그래서 ‘사고력·내용이 좋은 글’에는 그저 그렇게 남들 다 하는 얘기를 또 하나 숟가락 얹듯 글을 쓰는 작가들과 질적으로 다른 감동 및 깨달음이 존재한다.


단순한 정보 제공 그 이상을 보여주는 글 읽기

-모든 ‘좋은 글’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좋은 수필, 에세이’는 단순한 정보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는 글이다. 그래서 단순히 감정의 저장통, 사변의 저장통이 아니다. 그 어느 수필·에세이에서도 볼 수 없던 그 글 특유의 통찰력이 배어들어있다. 그리고 그 통찰력은 “거인의 어깨”를 딛고 만들어진 것들이다. 과거 여러 선각자들의 지혜를 보고 읽어서 그를 발판 삼아 더 높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글이다.

예를 들어 <방콕 여행>에 대해 수필이나 에세이를 쓴다고 하자. 많은 이들이 아마도 ①값싼 물가, ②제법 현대화된 인프라, ③덥고 습한 기후, ④이색적이고 풍부한 먹거리, ⑤친절한 사람들, ⑥이유는 모르지만 아주 가끔 시내 안에서 벌어지는 소요 등등을 거론할 것이다.(여기에 자신이 찍은 사진들도 적당한 곳에 군데군데 첨부할 테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런 글은 단순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곳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사람이 평균 내외의 지적 수준만 갖고 있다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기록물’에 불과하다. 읽는 이가 모르던 정보를 알았다는 점에서는 유용한 글이지만, 독자가 그 글을 읽음으로써 ‘새로운 시각이나 관념’을 얻기는 힘들다.


하지만 ①왕권국가의 경제 재분배 체제, ②세계화의 명(明)과 암(暗), ③태국에 관한 지정학 및 지리학, ④음식이 갖는 질병 예방‧치료의 기능 ⑤오리엔탈리즘과 문명적 시각 ⑥민주화의 성패 요인 등등에 관해 뭔가 보고 읽은 바가 있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그저 그런 기록물이 아니라 통찰력이 배인 여행수필‧에세이를 보여줄 수 있다. 그는 거인의 어깨에 섰기 때문에 자기 견해를 피력할만한 힘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글을 읽은 독자는 태국과 방콕에 대해 비범한 시각과 관념을 얻게 된다. 정보를 얻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이런 글을 자주 읽어야 글쓰기 내공이 자라고, 이런 사람을 “거인의 어깨”로 삼을 줄 알아야 글의 수준이 상승한다.

이게 지성력을 갖춘 글의 힘이다. 꼭 상아탑 속 학자들의 글을 읽으란 뜻은 아니다. 외려 학자들의 글 중에서도 읽을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 꽤 많다. 반대로 온·오프라인 상의 숱한 아마추어 작가들을 무시하란 뜻도 아니다. 아마추어들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읽은 후에 울림을 느끼고 감동을 얻는 예들이 더러 있는 탓이다. 중요한 것은 그 글의 내용 자체가 <배움에 근간을 뒀느냐> 여부다. 사안을 입체적으로 훑고, 평범한 것도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하려고 노력한 흔적 말이다.


학술서가 아닌 수필·에세이에도 지성주의는 필요하다

학술서도 아닌 일개 수필·에세이에 지성력을 요한다는 게 설핏 억지 같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수필이나 에세이일수록 배움에 근간을 둔 글이어야 한다. 실제 일반인들이 자주 접하는 글은 학술서가 아니다. 요즘처럼 온라인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시쳇말로 “각을 잡고 봐야하는” 아날로그 글거리보다, 인터넷 바다에서 마우스나 손가락으로 항해를 하다가 “우연히 터치·클릭하게 되는” 디지털 글거리가 더 많기 때문이다. 터치나 클릭으로 볼 수 있는 글들은 대개 무료이고 정식으로 출간된 책보다 내용이 가볍고 분량이 적다.(요즘은 온라인상의 글을 쌓아뒀다가 그걸로 책을 출간하는 경우도 있어서 간혹 예외도 있겠다.) 그래서 저자가 가벼운 마음으로 부담감을 적게 갖고 쓴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수필이나 에세이에도 지성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터넷 글들은 재미삼아 한두 개씩 클릭하다보면 시간이 금세 간다. 또 하루 이틀 계속하다보면 흥미 위주의 글을 읽는 게 습관이 된다. 이때 그 글이 재미나 흥미는 있되, 혜안과 영감을 줄만한 것들이 아니면 자신의 글 실력도 무의식적으로 그 글의 수준과 비슷해진다. 어차피 시간은 금이고 집중할 수 있는 체력도 한계가 있다. 기왕 살면서 일정량 이상 읽어야 할 글이라면 본인에게 영양가 있는 것들을 보는 게 낫다.


붓 따라 쓰는 글에도 정도(正道)가 있다

수필·에세이는 자칫 사변이나 감정으로 치우치기 쉬운 장르다. 명칭도 ‘붓’(筆)을 ‘따라 가는’(隨) 글, 수필(隨筆) 아니겠는가. 그래서 한껏 센티(sentimental)하게 감정을 잡고 쓰거나, 젠체하며 철학 아닌 철학을 내세운 글도 대개 그러려니 하고 읽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게 함정이다. 수필‧에세이에도 학술서 버금가는 지성적 태도가 필요하다. 하다못해 그러려는 노력이라도 필요하다. 글을 읽는 사람 역시 한낱 정보만 던져주는 날것 그대로의 글보다, 어느 정도 공신력 있는 선각자들의 지혜에 덧붙여 작가 고유의 신선한 사고가 듬뿍 담긴 글을 선호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자세야말로 수필‧에세이를 직접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 스스로를 훌쩍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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