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특강 / 문장의 기술] 크리티카의 인문학 에세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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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필 ⇒ 달변
글 연습을 하면 글쓰기 실력은 -당연히- 늘겠지만, 그것 말고 또 다른 효과도 있다. 바로 말 실력도 느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수강생들이나 주변 사람들한테 종종 이렇게 충고한다. <달변가가 되고 싶다면 달필가부터 돼라.>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입담이 좋아지려면 글 연습보다는 말하기 자체를 연습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소수나 다수를 대상으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말하기 체험을 하는 것 말이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말하기 경험치가 높아질수록 본인의 담력, 상황과 상대를 살피는 능력, 발화 속도나 양을 완급 조절하는 법, 세련된 자세나 표정을 짓는 매너(manner) 등등도 발전한다. 그러나 글 연습을 병행하면 이 능력은 배가(倍加)된다. 왜냐하면 글 연습은 당신의 머릿속 콘텐츠와 가슴 속 콘텐츠를 더 양질의 것들로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더욱 논리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정리정돈해주기 때문이다.
글 연습이 말하기 실력의 밑거름이 되는 이유
필자가 전에 <내 지식과 교양의 척도가 되는 글쓰기 연습>이란 글에서 방증했듯이, 글을 쓰다보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던 주제들도 엉망진창 뒤죽박죽이라는 걸 깨닫는다. 분명히 전에 읽고 보고 들었던 내용들인데도 표현과 정리가 잘 안 된다. 일단 문어체보다 구어체들만 생각나고, 기껏 떠올린 개념어들은 당초 의도를 반영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때가 많다. 논지와 논거 사이의 구조는 체계성을 잃기 일쑤인데다, 사안을 다양하게 비판‧검토하지 못한 채 단편적인 사고만 보여주기 십상이다. 특히 제한 분량까지 지켜가며 글을 써야 하는 경우에는 이 증상들이 더 심해진다. 결국 글쓰기를 연습하는 이유는 이런 증상들을 없애기 위해서다. 이는 곧 글쓰기 연습이 어휘‧문장력 등과 같은 표현력과, 생각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사고력을 키워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로 연습할 때보다 더 어렵지만, 그만큼 효과는 훨씬 확실하다. 이렇게 글 연습으로 길러낸 표현력‧사고력은 글쓰기만이 아니라 말하기의 자원도 된다. 그러나 역은 아니다. 말하기로 길러낸 표현력‧사고력이 곧 글쓰기의 자원이 된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말하기 연습이 글 실력으로 치환되지 않는 이유
언뜻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도 있을 테다. 어차피 글이나 말 모두 언어행위라는 점에서 뇌를 쓰는 방식은 비슷할 텐데, 왜 글은 말에 도움이 되지만 말은 글에 도움 되는 바가 적은지 말이다. 이유는 글과 말에 층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말은 글보다 훨씬 수월하다.(역으로 글은 말보다 더 수준 높은 역량을 요한다.) 말은 글보다 제약사항들이 적어서 그렇다. 대표적인 근거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①말은 휘발성(揮發性)이 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녹음을 하지는 않는다. 듣는 사람들도 말하는 사람이 표현상 실수를 하거나, 내용의 전개‧구조 측면에서 조금 논리적으로 흠이 있더라도 으레 용인해준다. 그래서 말하는 이도 부담이 적다. 현장에서 어떤 식으로든 청자에게 뜻이 통하게끔 발화하면 그걸로 어느 정도 성공이다. 반면 글은 기록된다. 그것도 거의 영원히 남는다. 게다가 표현이 정확하지 않거나, 내용의 전개‧구조가 논리적이지 못하면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글쓰기는 부담이 심하다. 어떻게든 뜻만 통하면 된다는 식으로 쓰다보면 자칫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②말은 상대방의 반응을 보며 수정‧보충이 가능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눈짓, 몸짓 등 非언어적인 요소들도 도움이 된다. 상대방이 추가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즉시 그에 답해주면 그만이다. 따라서 사안에 대해 조금은 얕고 좁게 이해하고 있어도 만회할 기회가 있다. 순발력이 좋으면 대개 말재간도 좋은 까닭이 이것이다. 그러나 글은 수정‧보충 기회가 없다. 제스처 따위를 보여줄 수도 없다. 한번 제출‧공개하면 끝이다. 따라서 글쓴이가 사안에 대해 얼마나 깊고 다양하게 고찰했는지 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글의 수준은 작자의 순발력이 아니라 식견으로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말은 잘해도 글 수준이 형편없는 사람들은 많지만, 달필인 사람 중에 적어도 눌변인 사람은 드물다. 설령 말이 조금 어눌하더라도 글로 소통의 내공을 쌓은 사람은 내용에 뼈가 있고 살이 있다. 반대로 말이 휘황찬란해도 내용에 알맹이가 없는 사람들은 열에 아홉이 졸필들이다. 흡사 고급 수학을 공부한 사람은 중급 이하 수학들을 쉽게 풀 수 있듯이, 글공부는 언어행위에 필요한 형식과 내용들을 최고급으로 체화시키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Speaking은 글공부를 재현‧응용하는 단계다
오랜 시간 강의를 업 삼다 보니, 성인이든 고등학생이든 말 잘하는 수강생들을 참 많이 보게 된다. 또박또박 제법 빠른 속도로 이러쿵저러쿵 쉴 새 없이 그 많은 얘기들을 솜씨 좋게 풀어내는 걸 보면 감탄이 일 지경이다. 그러나 이들이 과연 면접‧구술시험도 잘 치느냐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특히 논의 주제가 일상에서 시사‧이슈로, 시사‧이슈에서 학문적인 것으로 심화될수록 그들의 장광설(長廣舌)은 짧고 좁은 혀, 즉 단협설(短狹舌)로 위축된다. 더 재밌는 일은 같은 주제로 글쓰기나 논술 시험을 치르게 하면 결과물은 더 가관이다. 말로 대답한 것만도 못한 서술, 단협설만도 못한 답안들을 제출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콘텐츠 부족이다. 논의 주제가 심오할수록 잔재주는 힘을 잃는다. 스킬(skill) 따위로는 장악할 수 없는 논의 영역이 있다. 이때는 대답하는 자의 지성 능력이 성패를 좌우한다. 학술 공부에 준하는 정도로 고차원적인 사고 훈련을 얼마나 했는지에 따라, 그리고 그에 걸맞은 개념어 사용을 얼마나 훈련했는지에 따라 지성 능력의 질(質)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런 훈련들은 말보다는 글로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효율적이다. 말하기는 글로 공부한 내용을 재현하고 응용하는 단계로 여겨야 한다. 글은 최고 난이도의 언어행위라는 점, 몇 번을 강조해도 성이 안찰만큼 중요한 문제다.
그 많던 국어 공부는 다 무얼 위했던 걸까
최근 대입 전형에서도 학생부 종합전형(줄임말로 이하 학종)이 강화됨에 따라 중등교육 중 글쓰기 관련 교육이 더욱 부실한 실정이다. 백번 양보해서 자기소개서(자소서)를 일종의 글쓰기 시험(?)이라고 인정해도, 그걸 두고 지성 능력을 요하는 글쓰기 시험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필자 역시 사범대 출신인데다, 교육계라면 교육계에 종사하는 입장에서 글쓰기를 경원(敬遠)하게 만드는 현 교육 정책이 심히 걱정된다. 언어 능력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인생의 황금시기에 저렇게 글 연습 한번 변변찮게 시키지 않고 대학으로 떠미는 것은 교육부의 직무유기라고 의심될 정도다. 그래서 다들 대학생이나 성인이 되고 나서 느지막이 사비를 털어 글쓰기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세금 내고, 학비 내고, 설상가상 자기 잔고까지 축내면서도 대부분의 국민들이 여전히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게 우리나라 교육의 현주소다. 「그 많던 국어 공부는 다 무얼 위했던 걸까」 어차피 대학에서도, 대학원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 일상의 소회를 토로할 때도, 결국 글쓰기는 필요하다. 결국에는 해야 할 일이라면 최대한 빨리 그 필요성을 자각하고 진지하게 임하는 게 현명하다.
글은 말에 향(香)을 입히고 품격(品格)을 준다
수준 높은 글공부가 말솜씨를 급상시키는 기적은 체험해본 이들이 안다. 교양 있는 시민은 일상 얘기만 하며 살 수 없다. 형이하학적인 담론들은 인간을 공허하게 만든다. 인간은 공허할수록 삶에 의미와 가치를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배운 바를 토대로 타인과 소통을 하는 것이다. 이때 말을 할 줄 아는 역량이 출중하다면 소통의 질도 높아질 것이다. 말은 입술로도 잘 할 수 있지만, 손과 뇌로 말에 향기와 품격을 더할 수 있다. 그리고 글을 쓰다보면 말을 할 때와는 다른 충만함도 느낄 수 있다. 모든 배움에는 유인동기가 필요하다. 글공부는 지겹고 힘들다. 그럴 땐 조금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효능을 따져보라. <말을 잘하고 싶은가. 잔재주를 넘어 말 실력에 격(格)과 향(香)을 갖추고 싶은가. 사람들이 당신 말에 경청하고 나아가 권위를 부여해줬으면 하는가.> 그렇다면 Speaking 훈련을 해라. 단, 반드시 글쓰기 훈련과 병행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