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후, 반짝이는 트리로 한껏 부풀었던 마음이 잠시 쪼그라드는듯 싶더니, 2022년 남은 날을 카운트다운하며 다시 상기된다. 년 단위로 시간을 나누는 건 인간이 발명한 개념이고, 그것에 몰입하는 게 유치하고 의미 없다 이야기하고 싶지만, 시간의 개념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년 단위로 살아가는 건 우주적인 일이니 토를 달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연말이라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 차분히 일상을 이어나가려 노력한다. 눈을 감는 동시에 잠들고, 잠깐 눈을 감았다 뜬 듯 깨어나는 어느 개운한 아침처럼. 꿈 없는 잠을 이루어낸 사람처럼. 2022년과 2023년의 이음새를 감각하지 못하는 무딘 사람으로 요 며칠을 보내고 싶다.
들뜨기 싫다. 2022년을 보내기 싫다. 아쉬움 때문이 아니다. 마음속에서 2022년을 보내는 것에 당위가 없다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죽음, 희박한 진실 속에서 남은 사람들의 현실이 붕괴되고, 공동체의 믿음이 훼손되었지만 그것을 회복시킬 힘이 있는 사람들 중 그것을 감각하는 사람이 드물다. 없는 것 같다. 당사자의 자리에 자신이 절대 설 리 없다는 낙관일까, 아니면 각자도생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피할 수 없는 죽음,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생존하려 했지만 자신의 근무지에서 살해된 사람. 사람은 약하다. 물리적으로 약한 존재다. 목숨은 하나인데 급소는 셀 수 없다. 죽이려 든다면 죽일 수 있다. 피해자와 같은 속성을 공유하는 이들은 무력감을 느꼈다. 분노보다 무력이 깊어질까 봐 뺨을 때려야 했다. 화내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게 분했다. 그 시간에 사랑을 하거나, 공부를 하고 싶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죽은 게 아니다. 자신의 근무지에서 자신의 전 동료에 의해 살해되었다. 어떤 죽음은, 그러니까 어떤 살인은 사회적이다. 개인의 행동이 아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 그 마음의 맥락은 사회가 조성한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그 죽음이 그저 불운이라고, 개인적인 것이라 말한다.
너무 쉬운 죽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간은 물리적으로 약한 존재다. 그리고 죽음은, 시발점은 그렇지 않을지 모르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물리적이다. 가령, 고속도로에서 날아온 철근이 내 어깨 위 3cm 시트에 꽂히면 나는 살고, 가슴에 꽂히면 죽는다. 그래서 그런 물리적인 가능성을 피해보고자 많은 장치들을 쓴다. 특히 위험도 높은 행위를 할 때에는 장치들이 촘촘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어서 죽은 사람들이 있다. 죽음 후에 사람들이 자료를 찾아서, 원래는 기계에 이런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편의를 위해, 비용을 아끼기 위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떼버린 것을 알아냈고, 그러니까 그 죽음은 그 장치 하나만 있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같지도 않은 이유 때문에 그걸 막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다들 그 이유들만 쫒게 만드는 사회라서 비통했다. 앞으로도 막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
차분히 연말을 보내기 위해 퇴근하고, 밥을 지어먹고, 집안일을 하고, 드라마를 좀 챙겨보다 공부를 하고, 마지막으로 요가를 했다. 바로 씻으러 들어가기에는 방바닥이 너무 따듯해서, 기껏 요가해놓고 허리에 안 좋다는 자세로 맨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 네이버 메인에서 한겨레 이태원 참사 기획 기사를 읽었다. 세월호 때도 이런 기사가 있었다. 참사 희생자의 일러스트와 그를 잃은 사람들의 기억으로 복원한 그의 삶을 조명한 기사들. 그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었는지, 어떤 순간과 감정들을 나누었는지 이야기한 후에 그의 죽음을 알게 된 순간을 이야기한다. 각각의 고유한 삶이지만 유족들은 한 가지 질문을 공유한다.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왜 죽었고, 왜 그들을 연고도 없는 먼 곳의 병원에서 그것도 수시간이 지난 후 발견할 수 있었는지. 그들은 알고자 한다.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서.
그 아래에는 보수 단체들이 이태원 참사 분향소를 둘러싸고 시위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다. 인터넷 뉴스에 달리는 댓글들. 2차 가해들은 댓글이라 가능한 것인 줄 알았다. 자신의 얼굴을 내보이고, 더군다나 그 말에 배일 것이 뻔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 그런 말들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
믿을 수 없는 일이 그치지 않고 일어났던 2022년. 현실이 조각조각 찢어져 바람에 날려가는 것 같았다. 아직 조각을 다 맞추지 못했는데 2023년이라니. 하지만 우주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아주 미세한 존재이듯 광활한 시간이란 개념 안에서 2022년과 2023년의 차이란 미미할 것이다. 그러니까 해가 바뀌었다고 2022년을 잊어버릴 생각은 없다. 2022년뿐만 아니다. 내가 태어나 살아온 순간들,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전 순간들까지. 내가 인지하고 있고, 찾아낼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두 나의 현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