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꾼 건 내 마음 하나인데

다섯 번째 이야기

by 박유신

너희가 언제쯤 이 이야기를 읽게 될지 몰라서 글을 쓰는 시점이 언제인지 표시해 둔다.


지금은 오래 기다렸던 엄마의 첫 책이 세상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야.

엄마가 책을 낼 수 있다면 그 책은 소설일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밖에 에세이가 나오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온몸을 꽁꽁 싸맨 회색의 겨울 아줌마가 속을 보여주는 글을 쓰다니 이상한 일이잖아.

더구나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는데.

'이게 책이 되긴 하겠어?' 같은 생각이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데도 '아, 몰라. 되든 말든.' 이러면서 그냥 했다는 게 정말 이상하지 않니?

적어도 내가 아는 나는 되든 말든 그냥 뭔가를 했던 적이 대입 준비했던 고등학생 때 이후로 없거든.


정아, 현아.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지 않은 일을 익숙한 일처럼 하고 있는 너희 자신을 머지않아 꼭 발견하길 바란다.

예정된 순서인 걸 마치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모든 새로운 일들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떻게 그러냐고?

콕 집어서 이렇게 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엄마가 아직 그럴 만큼 말을 다루지 못해 그나마 익숙한 글로써 대신한다.




청소로 비워낸 공간은 이제 무엇이든 원하는 걸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 돼.

청소의 마법은 물리적인 영역을 넘거든.


내가 우리 집에서 마지막으로 치운 곳은 현이 방이었지.

너희 둘이 같이 썼던 공부방은 정이가 독립한 후로 현이만의 방이 되었고 언제부턴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지.

처음엔 그냥 사춘기라고만 생각했어.

그렇게 믿은 게 아니라 믿고 싶었던 것 같아.


내가 빛을 향해 마음을 돌리고 나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현이의 마음이 현이 방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게 보이더라.

몇 년씩 묵은 먼지와 머리카락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쌓여 있고, 현이가 기거하다시피 했던 이부자리 주위에는 입은 옷인지 안 입은 옷인지도 모를 옷들이 마구 섞여 있었지.

벌레가 돌아다녀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방인데도 현이는 한번 들어가면 나오고 싶어 하지 않았어.

그래도 매일, 움직이려 하지 않는 몸을 이끌고 학교에 다녔으니 제 딴에는 죽을힘을 다하고 있는 거였지.

그러고 있는 동안 엄마인 나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사실 나도 똑같았던 거야.


그게 전부 다 보이더라.

내게서 시작된 나쁜 병이 현이도 감염시켜 버렸다는 게.

자신이 피폐해지는 줄 알지 못하게 아주 조금씩 피폐해지다가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렇게 됐지 싶은 게 그 병의 특징이지.

삶의 어둠만을 보는 병.

아부자리 속 가상 세계로 숨는 병.

현실을 외면하는 병.


나는 울면서 현이 방을 처음 치웠지.

왜 자기 방에 들어왔었냐고 화를 낼지도 몰랐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방을 치워야 했어.

그래야 현이도 나처럼 새로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우울이 전염될 수 있었다면 희망도 그럴 수 있을 테니까.

현이가 새로 꿈을 꾸고, 새로 생겨난 공간에 현이의 꿈을 채울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 방을 치울 거였어.


현이가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된 지금, 어쩌면 이 시간을 우리는 갖지 못했을 수도 있었어.

내가 나를 바꾸고 현이가 현이를 바꾸지 않았다면 말이야.

아마 현이가 이걸 읽는다면 '뭐 별 일도 아니었는데'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게 정말 다행인 거야.

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경험은 빠져나왔을 때만이 별 일 아닌 게 되거든.


현실은 한순간에 바꿀 수 없지만 내 마음만은 한순간에 바꿀 수 있어.

그리고 그 마음에 계속해서 새로운 씨앗을 심어야 현실도 서서히 바뀔 수 있어.


씨앗을 심을 때는 미래를 예측하려 들지 마.

공연히 손만 느려지거든.

어떤 꽃이 필까, 어떤 나무가 될까, 그런 기대는 내려두고 그냥 씨앗 심는 재미에만 빠져보는 거야.

어차피 모르는 일에 힘쓰기보다 지금 해야 할 일을 즐겁게 하는 방법부터 찾아야 더 실한 씨앗을 심게 되고 결국에는 나만의 정원이 생겨.

다른 사람의 속도도 신경 쓰지 마.

'이런다고 뭐가 되겠어?'같은 생각도 하지 말고.

그런 생각으로 하는 일은 힘만 더 들뿐 꿈을 향한 여정이 아니니까.

결코 싹이 트지 않는 흙이지.


청소를 해보니 알겠더구나.

하루 중에 아침이 왜 중요한지 말이야.

조금만 일찍 일어나서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잠깐이라도 가지면 그게 바로 청소 시간이더라고.

마음속 찌꺼기를 내보내는 하수구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는 환기의 시간 말이야.

스스로 하루를 경영하는 느낌이란 게 어떤 건지 좀 알 것 같더라.

허둥지둥 하루를 시작하고 정신없이 그날의 일에 떠밀려 다니기만 했었는데 말이지.


나는 그렇게 아침마다 마음의 방향을 정했단다.

'오늘도 눈이 떠지고 하루를 맞이할 수 있어 감사하다'라고 마음으로 인사했지.

내 인사를 듣는 대상은 없었지만 실체 없는 대상에게라도 꼭 인사했어야 할 만큼 진심으로 감사했단다.


그래서였을까.

서서히 뭔가 일이 수월하게 돌아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

현실이 바뀐다는 느낌을 처음 느낀 건 직장에서였단다.


작은 영어 학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원장보다 나이 많은 선생이 나였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만 좋았을 뿐, 학부모를 상대하는 일도, 학원 일도, 학원 자체도 신물이 났던 사람이기도 했고.

그런데 그 학원에서 일했던 5년 동안 있었던 일중에 제일 이상한 일이 이때 일어났어.


내게 두 번째 삶의 기회가 주어진 날이 5월 15일이었던 게 그저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고 했던 말 기억하니?

제대로 스승으로 살아보라는 뜻 같았달까.

정말 신이 나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더라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다 고맙고 사랑스럽고, 내가 즐거우니까 교실에서도 웃음이 넘쳐났지.

예전이었으면 스트레스받았을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지고 말이야.

내가 변했을 뿐인데 학원 전체 공기가 바뀐 느낌이었지.


더 신기한 일은 나와 결이 맞는 동료 선생님들이 연이어 들어온 거였어.

전에는 계속 소통이 잘 안 되는 강사들이 뜨내기처럼 왔다 갔다 해서 신경 쓰이고 성가신 부분이 많았거든.

옆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짜증 내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수업을 과정에 맞지 않게 독단적으로 하는 선생도 있었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다 나가고 야무지게 일도 잘하고 아이들하고도 잘 지내는 선생님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나는 수업을 하는 거야.

그곳에서 그런 분위기는 처음 느껴본 것이었어.




서로 비슷한 것끼리 끌어당기는 힘이 에너지의 속성이라던가?

이런 말을 나중에 어딘가 책에서 보긴 했지만 나는 항상 내 경험이 먼저였어.


감각이 달라졌던 날 이후로 나는 나 자신으로 일종의 실험 같은 걸 하고 있는 것 같아.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나면 그 경험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고, 그때마다 뭔가에 이끌리듯이 어떤 책을 읽게 되더라.

그러면 신기한 일이 벌어져.

궁금해하던 질문에 대한 , 때로는 궁금해한다는 사실조차 자각 못하던 의문에 대한 답발견하게 되는 거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부드러운 힘이 나를 안내하는 느낌.

그런 걸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했던듯해.


아직도 나는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결정하지 못했어.

이름을 붙이면 경계가 생기고 경계가 생기면 가두어지니까.

어떤 신의 이름으로도 나는 그걸 가두고 싶지 않고 억지로 실체가 있는 것처럼 형상화하고 싶지 않거든.


실체는 없으나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

그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신? 참나? 집단무의식? 깊은 곳의 정신?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걸로는 너희를 설득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되긴 해.


그럼 볼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큰 건 뭘까?

우주?


역시 인간의 언어란 한계가 분명한 것 같아.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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