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시작된 글쓰기가 뜬금 있더라

20세기 소녀의 첫 에세이 집필기

by 박유신

덕질 에세이를 써야지 처음부터 마음먹고 쓰기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저의 글쓰기는 정말 뜬금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어떤 책을 썼느냐 하는 이야기보다는 어떻게 글쓰기가 시작되었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보는 시선이 한순간에 바뀌었던 적이 있으신가요?

그것도 부분이 아니라 인식의 틀 자체가 통째 바뀐 경험 말입니다.

그 찰나의 깨어남으로 인해 다시는 어제와 똑같이 살 수 없게 되어버린 적은요?

이 질문에 '있다'라고 답하실 분들이 분명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계기가 궁금해요.

'역시 나만 그런 건 아니었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한 번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게요.

기존 인식의 틀이 깨어져나간 그 순간은 혹시 죽음이 곁에 바짝 다가와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가 아니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죽지, 너도 나도 언젠가는 죽지, 이런 식의 이론적 이해가 아니라 온 마음으로 절절하게 느껴버렸을 때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거나 내가 죽을 뻔했거나, 그 어떤 계기로든 간에 나의 현 위치와 죽음의 위치가 언제나 같다는 걸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알아버린 순간이 있지 않았나요?


저는 죽음이 미래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지요.

게다가 내가 선택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당겨 쓸 수 있는 선택지처럼 여기기도 했습니다.

'나 스스로 모든 걸 끝낼 수 있다'라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믿음을 갖고 있었죠.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세상과 비루하기 짝이 없는 나 자신.

저는 우주가 이렇게 딱 둘로 이루어져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고 싶은 이유는 당연하게도 세상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었죠.

(남들처럼) 잘 살고 싶은데 안 돼. 한다고 했지만 망했어.

살아서 뭐 해. 죽자.

제 사고 회로는 여기서만 뱅뱅 돌았지요.


그러다 죽음의 현 위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삶의 끝자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삶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요.

현대 의학에 감사하며 병원을 나서던 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 원망만 남겨두고 죽지는 말자.

시작도 안 해놓고 해 놓은 거 없다고 후회하면서 죽지 말자.

사람은 누구나 죽어. 어차피 죽는 거 잘 죽자.

그렇게 '잘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신기하게도 이때부터 세상이 전보다 따스하게 보이더군요.


저는 계속 고민했습니다.

근데 잘 죽는 건 뭐야? 행복하게 죽는 거 아닐까?

행복하게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 후회 없이 살면 되려나?

그럼 후회 없이 살아야 잘 죽을 수 있겠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을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면 행복한지 찾아서 하면?

그럼 난 뭘 좋아해?...

여기에서 막혔습니다.

여태 모르더라고요. 내가 뭘 좋아하는 지도.

난 왜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냐고 징징거릴 줄은 알면서 정작 이것과 저것을 내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모르고 살았더군요.


저 자신에 대한 탐구와 함께 새로운 독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의 독서는 제대로 된 독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어요.

자기 계발 책은 잔소리, 문학은 헛소리, 과학책은 '뭔 소리?', 철학책은 개소리 취급하며 한 번도 진심으로 책 속 메시지를 들으려 한 적이 없었더라고요.

책 속에서도 트집거리를 찾으려는 태도였으니 책 밖에서는 어땠을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나에 대해 궁금해하니까 책도 제대로 읽히고, 어떠한 왜곡도 없이 타인과 세상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저 자신을 보는 관점도 달라졌어요.

제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밖에서 저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광활한 우주에는 나를 포함한 무수한 생명체가 존재하고,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건 그저 나의 생각일 뿐 진짜로 무가치한 것은 없다고요.


저의 글쓰기는 내면을 관찰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시작한 건지 저절로 시작된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매일 아무 말을 아무렇게나 쓰면서 변화를 기록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요.


작가라니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네요.


그렇게 진짜 저를 만나러 나선 여정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방향만 있고 도착점은 없는 여정이라 길이 예상 못한 방향으로 꺾어 들어도 이제는 아무 두려움 없이 바라봅니다.

어딘가 또 새로운 곳으로 가겠구나.

재밌겠네.

이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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