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소녀의 첫 에세이 집필기
폭풍이 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종이배.
어느 날 종이배는 더 이상 수면에 떠 있을 수 없을 만큼 젖어서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폭풍은 잦아들었습니다.
일렁거리며 내려간 종이배는 점점 펼쳐지더니 더 이상 배 모양이 아니라 그냥 종이가 되었어요.
바다 밑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오직 고요만 있었습니다.
파도도 없고 폭풍도 없었지요.
마침내 종이는 바다로 녹아들어 스스로 바다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종이배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다가 보였습니다.
폭풍이 치는 수면이 아니라 그 아래 있는 고요한 해저.
그것이 진짜 나라는 앎.
그 앎과 함께 저 스스로 껍질을 둘렀던 작은 세계는 깨졌어요.
익숙했던 세상은 갑자기 새롭고 낯선 세상으로 변했습니다.
새로운 세상 탐사는 나 자신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것이 글쓰기로 이어졌습니다.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든 무작정 꺼내 놓는 글쓰기였어요.
혹시 누가 볼까 봐 일기도 솔직하게 쓰지 못했던 제가 처음으로 솔직해졌습니다.
처음으로 나라는 인간에 대해 궁금해졌달까요.
분노와 억울함, 원망과 같은 타인을 향한 감정이 쏟아져 나오더니 한편으로는 자책과 후회 같은 저 자신에 대한 감정이 드러나더군요.
글을 쓰면서 눈물이 주체 못 할 정도로 흐른 적도 많았습니다.
쌓여 있는 줄도 몰랐던 묵은 감정들이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떠나가는 걸 저는 마치 남의 일을 보듯이 지켜보았습니다.
왔다가 가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점차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되자 현실이 조금씩 변하더군요.
전에는 집에 있으면 누워 있고만 싶었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청소하고 싶어 지더라고요.
그래서 수십 년 묵은 쓰레기를 얼마나 많이 내다 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신기하더군요.
마음에 공간이 생기니까 물리적인 공간도 비우고 싶어지는 게 말입니다.
더 신기한 일도 일어났어요.
서로 상처만 주던 가족 사이가 서서히 따뜻해지고 있었으니까요.
드디어 따뜻한 글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즐거운 기억을 붙잡아 남길 수 있게 되었지요.
기나긴 우울의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어린 시절의 저와 젊은 날의 제가 좋아했던 걸 다시 찾아냈습니다.
지난날 내 아이들과 함께,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과 함께 즐거웠던 기억도 소환할 수 있었지요.
그 기억을 모으니 방향이 뚜렷하더군요.
누군가의 성공을 바라며 응원하는 삶.
덕질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던 삶이 저에게 있었더라고요.
쓰고 보니 덕질 에세이가 된 저의 원고는 작년 여름 내내 출판사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거절이라도 좋으니 답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그냥 묵묵 부답인 출판사가 답을 준 출판사보다 많았어요.
꼭 책으로 만들어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겠다고 저 자신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은 갈수록 조급해지는데 다시 한번 저의 빠순이 DNA가 저를 돕더군요.
올라~ 쏠라~ (Hola~ Solar~) 노래와 함께 한 방송사의 대형 오디션 프로그램이 시작되었고 저는 꿈을 펼치기 위해 피땀 눈물을 쏟는 연습생들의 모습에 (항상 그랬듯 또) 마음을 뺏겨버렸지요.
이미 실패를 겪은 연습생들을 더 열심히 응원했습니다.
인생이 계속 실패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다시 일어나 문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들은 그 시절의 저보다 훨씬 어른이었습니다.
한 번도 꿈을 좇아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보지 않았으면서 힘들다 죽겠다 소리만 하던 저는 어린애였고요.
오디션은 끝났습니다.
제가 응원했던 친구들은 알파 드라이브원이라는 이름의 아이돌이 되었고요.
그 친구들보다 나이는 억만 배 많아도 제 인생 오디션도 이제야 끝났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출판사도 찾았거든요.
<덕질,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가 나오면 저도 곧 데뷔입니다.
더 이상 종이배로 살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린 아줌마는 올라~ 쏠라~ 계속 가보려 합니다.
계속해 계속해 위로
터져버린 내 안의 불꽃
불확실한 세계를 읽어
'Cause we got the
We got the
We got the
FORMULA
<FORMULA> 알파 드라이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