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이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라는 표현이 있는데 오늘이 딱 그 날씨인듯하다. 새벽에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지하철역으로 가는데 걸음이 저절로 빨라진다. 어제부터 기온이 급속도로 내려갔다.
3월 조카 결혼식에 입을 한복을 맞추러 동서들과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역으로 들어와서야 움츠린 어깨를 편안하게 늘어뜨릴 수 있었다. 수원역까지 3개 역 8분 걸리는 동안 자리에 앉아 어제 아니 오늘 새벽에 발행한 블로그 글에 이상이 없는지 재빠르게 훑어본다. 아니나 다를까 수정해야 할 문장투성이다. 몇 글자 손보기도 전에 수원역에 도착했다.
수원역은 계단이 많다. 약속 시간 7분 전까지 도착 예정이라 계획 속의 전철을 놓치면 안 되기에 빠른 걸음으로 환승 지점에 도착했다. 너무 빨리 움직였나 보다. 광운대행 열차가 오려면 7분이 남아서 빠른 하차 지점이라고 카카오 지하철 앱에서 알려준 4-2 승차 지점에 서서 다시 블로그 글 수정을 하였다.
손이 무척 시려웠다. 수원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서 승하차 지점이 사방 뚫려 있어서 찬 바람이 전신에 와 달라붙었다. 열차 안에서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재빨리 검은색 롱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한 시간 넘게 가야 하고 보아하니 빈자리에 앉아서 갈 확률이 100%인듯하여 안심이 되었다.
곧이어 열차가 오고 빈자리 중에 임산부 배려석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좌석에 앉으니 예열되어 있어 엉덩이가 따뜻했다. 온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오그라져 있던 심장 근육도 이완되는 듯했다.
블로그 앱을 열어 글을 수정하고 있는 게 다음 역에서 탄 군복 입은 사람이 내 옆자리 임산부 배려석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앉거니 파란색 모나미 볼펜을 든 손으로 책을 펼치더니 뭔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한다. 군복 자켓에 달린 모자를 푹 뒤집어써서 머리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글을 쓰는 손이 가녀리고 거무튀튀한 걸 보면 나이가 꽤 있는 여자인 듯 보인다.
펼쳐진 책은 영문 잡지였고 빈 여백에 번역을 하는 건지 자기 의견을 적는 건지 쉬지도 않고 볼펜을 움직여 써 내려간다.
금정역부터는 빈자리가 없어서 승객이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좌석을 먼저 차지할까 싶은 바쁜 발걸음으로 튀어 들어와 좌우를 살피더니 이내 한편으로 가서 선다.
도착역을 안내하는 방송이 한국어와 영어로 나오고 이어 임산부 배려석이 해당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는 방송도 이어 나왔지만 내 옆에 앉은 분은 놀라울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하여 쉴 틈 없이 지면 빽빽하게 적고 있었다. 지면 중에 글자가 없는 여백이 있으면 큰일이라도 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어깨너머로 슬쩍 내용을 보니 지면 가득 들어선 SCENE-STEALING MUSIC이라는 큰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음악 하는 사람일까 예술인일까 궁금해졌다. 소매 끝에 오래도록 길들여져 있음이 한눈에 판단되는 검은 때가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걸 보니 현역 군인은 아니고 내내 입고 다니기에 편리한 이유로 군복을 입고 다니시는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열정과 집중력으로 공부하는 분이라면 어느 분야든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실 텐데 그 지식을 어디에 사용하시는지가 궁금하다. 나도 뭔가 한 가지 정해서 저런 열정을 쏟아야겠다는 자극이 마음에 가해졌다.
영어교사인 나는 지금 영어 공부를 위해 저 정도의 공부를 하고 있지 않음에 마음이 뜨끔했다. 신도림역에 도착할 즈음에서야 공부를 마쳤는지 책을 집어넣고 국방색 군용 장갑을 주머니에서 꺼내 양손에 끼면서 혼잣말로 뭔가 중얼거리셨다. 목소리를 들으니 예상과 달리 남자분이셨다. 계속 뭔가 말씀하시는 폼이 이어폰을 끼고 누군가와 통화하는 듯했다. 영등포역에서 내 옆자리 임산부 배려석은 다시 분홍색 빈자리가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