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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꽃

되돌아온 나의 선물

by Sunny Sea

새벽녘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잠결에 스쳐 지나가는 거실 한편, TV 위에 놓인 익숙한 물건이 문득 내 시선을 붙잡았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보랏빛 비누꽃 화분이었다. 2021년 어버이날, 내가 시어머니께 드린 선물이다.


꽃을 좋아하시는 시어머니를 위해 생화를 선물할까 고민했지만, 이미 어머니는 화분을 여러 개 가지고 계셨다.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찾다가 직접 꽃가게를 방문한 날이었다. 생화를 사기 위해 꽃집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진열대에 놓여 있는 비누꽃 화분을 보게 되었다. 처음엔 향기와 모습 모두 진짜 꽃과 너무나 똑같아서 비누꽃이라는 걸 믿기 어려웠다. 점원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직접 손으로 만져본 뒤, 이렇게 영원히 시들지 않고 향기를 간직할 수 있는 꽃도 있구나 하며 놀라움을 느꼈다. 시어머니께 드리기에 딱 좋겠다는 생각에 고민 없이 선택했다. 그렇게 내 손에 들려 어머니께 선물된 비누꽃 화분은 어머니가 혼자 사시는 집 TV 앞에 오랫동안 자리 잡았다.




꽃 선물 이야기를 하니 30여 년 전 처음 교직 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당시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하루는 교무실 내 책상 위에 놓인 빨간 장미꽃 한 송이가 눈에 띄었다. 생화였다. 누군가의 위로와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놀랍게도 그 꽃은 며칠이 지나 시들어버리면 누군가가 새 꽃으로 바꿔 놓았다. 그 일이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나중에야 꽃을 가져다 놓은 학생이 누구였는지 알게 되었고, 그 아이가 자기 집 담장의 장미를 잘라와 나 몰래 매일 꽃병에 꽂아 주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생화의 강력한 힘을 느꼈다. 향기롭고 아름답지만, 영원히 머물 수 없는 그 짧은 생명이 내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주었는지 모른다. 만약 그때 사진을 찍어 두거나, 꽃잎을 프레스 플라워로 보관하거나,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면 지금 더 선명히 기억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그저 꿈만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다 내 눈앞의 비누꽃을 다시 본다. 시어머니는 최근 형님의 집으로 들어가시기로 결정하시고 짐 정리를 하셨다. 그때 어머니가 내게 이 비누꽃을 가리키며 "버리기 아까운데 네가 가져갈래?"라고 물으셨고, 나 역시 이 꽃이 아까워서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이 비누꽃은 어머니 댁에서 우리 집으로 돌아와 이제 내 눈앞에 있게 된 것이다.


생화는 아니지만 마치 영원한 생명을 얻은 듯 변치 않는 모습으로, 추억을 선명하게 되살려 준다. 물론 그때 받은 진짜 꽃의 감동과는 다를 수도 있다. 만약 그 학생이 이런 비누꽃을 선물했다면 어쩌면 나에게 그런 위로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원한 것은 인위적이지 않고 순수한 향기를 지녔으며, 그 기억은 오직 내 마음속에만 깊게 남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또한 내 시선은 비누꽃처럼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실물에 더 마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기억은 흐릿해지고 사라지지만, 눈앞에 있는 사물은 그 기억을 붙잡아준다. 누구와도 손쉽게 공유할 수 있고, 늘 시야 안에 두며 사람이나 추억을 기릴 수 있게 해 준다.


이와 같은 시각적인 기억의 보존과 전달은 비누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연인들이 교환하는 인형이나, 결혼식 때 나누는 반지, 졸업장이나 감사패 같은 모든 시각화된 기념물이 결국 그 역할을 한다. 시각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기억과 감정을 더욱 생생하게 지켜주고,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꽃은 시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꽃의 숙명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의 말처럼, 생명의 아름다움은 시들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 그러나 때로는 영원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더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비누꽃을 보며,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무는 이 작은 사물에 담긴 이야기와 기억들을 소중히 여긴다. 이 비누꽃이 있기에 내 마음속의 기억은 더욱 선명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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