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시간, 다시 바라보는 자리

– 성경필사로 돌아오다

by Sunny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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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필사 노트를 집어 들었다. 날짜를 보니 꼭 10개월 만이다. 연구년을 시작하며 여러 일에 몰두하다 보니, 손으로 천천히 써 내려가는 시간에서 멀어져 있었다. 다시 노트를 펼치며, 나 자신을 점검하고 내년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약성경 필사를 이어가고 있는데, 오늘은 데살로니가후서를 마쳤다. 이 서신은 미래에 대한 기대에만 머물며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하지 말고, 일상에 충실할 것을 권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읽는 것과 달리 필사는 문장을 몸에 남긴다. 한 글자 한 글자 적다 보면, 그냥 지나쳤던 문장들이 뜻밖의 무게로 다가온다.


필사는 결혼한 해 9월부터 시작했다. 쉬었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해 왔고,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볼펜 잉크가 닳아 흐릿해질 때마다 새 볼펜으로 바꾸며 쓰는 이 단순한 행위가 생각보다 많은 집중을 요구한다. 잠시 다른 생각이 스치면 곧바로 글자가 틀려 수정테이프로 지우고 다시 써야 한다. 오늘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사소한 오류 하나가 오히려 집중을 되돌려놓는다.


지난 몇 해 동안, 개인적으로나 공동체 안에서 쉽지 않은 시간을 지나왔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태도로 사람과 일을 대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특히 ‘일’과 ‘책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문장이 있었다. 예전에는 이 말을 주로 나 자신에게만 적용해 왔다. 그러나 다시 읽으며, 이 문장이 타인을 향한 역할과 책임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제는 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 내 역할만 감당하면 충분하다는 태도에서 조금은 벗어나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경력과 경험이 쌓일수록, 주변을 살피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역할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나는 원래 남의 일에 깊이 개입하는 편이 아니다. 조언을 구하지 않으면 한 발 물러서는 쪽을 선택해 왔다. 그러나 그 태도가 언제나 최선은 아니라는 것도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어제 있었던 일이 그런 생각을 구체화시켰다.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을 사람을 추천하는 과정에서, 모두의 신뢰를 받았지만 스스로는 부담을 느끼는 한 분이 있었다. 본인의 상황을 이유로 사양하려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잠시 고민한 끝에 직접 통화를 나누었고, 지금의 자리와 이후의 성장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결국 그분은 부담과 두려움을 안고도 한 걸음을 내딛기로 결정했다.


그 선택을 지켜보며, 사람은 누군가의 신뢰와 한마디의 권면을 통해 생각보다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이미 충분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임에도, 스스로를 낮춰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옆에서 “당신은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돌아보면, 내가 지금까지 해온 많은 일의 바탕에는 공동체 안에서의 경험과 훈련이 있었다. 얼마 전 AI 디지털 강사로 활발히 활동 중인 조카의 이야기를 들었다. 정식 강의 경력은 많지 않았지만, 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오랜 시간 봉사하며 사람을 마주해 온 교육 현장의 경험이 강의 실습과 면접에서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결국 보이지 않는 훈련의 시간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나는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보다 ‘누구를 세울 수 있을까’를 더 자주 떠올린다. 교회든 학교든, 결국 사람을 키우는 일은 관심과 관찰, 그리고 충분한 대화에서 시작된다. 그러려면 나 자신이 너무 바쁘다는 핑계 뒤에 숨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함께 배워가는 중이다.


오늘은 데살로니가후서를 마치고 디모데전서 1장으로 넘어갈 준비를 해 두었다. 필사 노트는 290쪽까지 채웠다. 사용 중인 샬롬 필사 노트가 마음에 들어 같은 노트를 찾다 우여곡절 끝에 판매처를 알아냈다. 표지는 달라졌지만 같은 노트였다. 아직 쓸 페이지가 남아 있고, 곧 이사도 예정되어 있어 구입은 조금 미루기로 했다.


어제 완독한 《설국》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가운데, 차이콥스키의 현악 4중주 1번 2악장은 이 소설의 분위기와 유난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며 함께 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음악에 쉽게 빠져 손을 멈추는 편이라 오늘은 필사를 마친 뒤에야 일부러 이 곡을 틀었다. 짧지만 깊게 남는 음악처럼, 요즘의 나 역시 빠르지 않아도 오래 남는 시간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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