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산업화의 그늘

노동자 전태일

by 써니사이드업
당시의 봉제공장 재현.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스틸 컷 (출처: 네이버 영화 포스터)

1970년대 초에 한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아래 산업화를 빠른 속도로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 값싼 노동력이 무차별적으로 동원되었고, 특히 봉제업 같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는 열다섯, 열여섯 된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밤늦도록 바느질을 멈추지 않았어요. 하루 14시간, 길게는 16시간까지 일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받는 임금은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쳤지요. 좁은 작업장은 먼지와 섬유 조각으로 늘 가득했고, 환기조차 되지 않아 노동자들은 하나 둘 건강을 잃어갔습니다. 산업화의 성과 뒤에는 이렇게 외면당한 노동자들의 현실이 있었던 거예요.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도 그런 현실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의 고통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한 여공이 기침을 하다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고는 병원에 데려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해고가 두려워 “제발 말하지 말아 달라”라고 부탁했고, 결국 병든 몸으로 공장에서 쫓겨났어요. 그 순간 전태일은 “이 사회는 돈을 사람보다 더 중시하는구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분노를 안으로 삼키며 근로기준법 책자를 구해 직접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법으로 보장된 권리를 알려주려 애썼지요. 노동 환경을 개선해 달라며 여러 차례 정부 기관에 진정을 넣기도 했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정부와 기업은 “산업화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노동자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했고, 언론 역시 이 문제를 크게 다루지 않았어요. 전태일은 점점 더 막다른 길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스틸 컷 (출처: 네이버 영화 포스터)

결국 1970년 11월 13일에 그는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스물두 살의 짧은 생이었지만, 그 순간은 한국 사회 전체에 지울 수 없는 충격을 남겼습니다.


전태일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일기와 유언, 그리고 동료들에게 남긴 편지는 빠르게 퍼져 나가며 “노동에도 인간의 존엄이 있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전했습니다. 이후 청계천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작은 모임들이 생겨나 노동조합 결성과 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졌지요. 대학생들 또한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노동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노동 운동과 민주화 운동이 연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창신동 봉제마을 전경 2015년 (출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 공공누리 제1유형)

한편 1980년대에 노동조합이 많이 늘어나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퍼지자, 방직공장 사업주들은 제작공정을 세밀히 나눈 후, 각 공정을 하청업체에게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5명 정도의 영세한 봉제공장이 많이 생겨나고 이 작은 봉제공장은 임대료가 싼 동대문 인근의 창신동 주택가로 들어가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창신동에는 봉제공장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가장 많을 때는 약 3000개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주류적 해석에 의하면, 1970년대는 ‘산업화’와 ‘전태일’로 대표된다고 합니다. 그는 성장의 빛나는 성과 뒤에 가려져 있던 인간의 존엄을 자기 몸을 태워 세상에 알린 사람이었지요. 전태일 이후 한국 사회는 노동 현실을 외면한 채 경제 성장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태일 동상. 종로5가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 있다. (출처: Wikimedia - CCA-Share Alike 4.0 アナキズム研究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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