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침투와 서울의 요새화

by 써니사이드업
침투 경로

1968년 1월 18일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북한군 특수부대원 31명이 군복을 입은 채 비무장지대를 넘어왔습니다. 이들은 꽁꽁 언 임진강을 몸을 낮추고 기어 건넜고,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이면 산 능선을 따라 이동했습니다. 그렇게 사흘을 남하한 끝에, 1월 20일 밤에는 마침내 서울 도심까지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청와대를 기습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입니다.


총격전이 벌어졌던 장소에는 총격전 당시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과 정종수 경사의 흉상이 새워져 있다. (출처: 써니사이드업)

침투조는 북한산 비봉을 지나 자하문 인근까지 내려왔습니다. 검문소에서는 자신들을 육군 부대원이라 속여 통과하려 했지만, 경찰이 신분 확인을 요구하면서 상황이 꼬이고 말았어요. 이어진 건 수류탄 폭발과 기관총 사격이었고, 서울 한복판이 순식간에 전쟁터로 바뀌었지요. 이 사건으로 경찰과 군인, 시민 등 26명이 목숨을 잃었고, 침투조 31명 가운데 30명이 사살되었으며 단 한 명만이 생포되었습니다. 이후 이 사건은 ‘1·21 사태’로 불리게 되었어요.

이 충격은 한국 사회 전반에 깊은 안보 불안을 심어주었고, 곧바로 사회 전체의 군사화, 요새화 조치로 이어졌습니다.

북악스카이웨이 개통 후 모습 1968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 공공누리 제1유형)

군 제도부터 크게 달라졌습니다. 육군 3 사관학교와 특수전사령부가 새로 생겼고, 군 복무 기간도 길어졌어요. 육군은 30개월에서 36개월로, 해·공군은 36개월에서 39개월로 늘어났죠. 예비군 제도가 도입되고, 전투경찰도 신설되었습니다. 남학생들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수업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고, 국민 모두가 신분증을 소지하도록 주민등록증 제도도 시작되었어요. 간첩을 식별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부암동 전경. 부암동은 1·21 사태 이후 본격적으로 주거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도시 공간도 빠르게 군사 전략적 관점에서 재편되었습니다. 청와대 방어를 위해 북악산에 북악 스카이웨이가 뚫렸고, 전시에 수십만 명이 대피할 수 있도록 남산 제1·2호 터널이 만들어졌습니다. 남산은 서울 방어의 거점으로 요새화되었고, 산 곳곳에 군사 시설이 들어섰어요. 그래서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지만 그 당시에 수도방위사령부, 보안사령부, 중앙정보부가 모두 남산에 있었습니다.


인왕산의 초소책방. 초소책방과 숲속쉼터는 1·21 사태 이후에 청와대 경비를 위해 만들어진 경찰과 군의 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출처: 네이버 지도 업체사진)

강남대로, 영동대로 같은 새로 놓인 대로는 군용기 이착륙이 가능할 만큼 넓게 설계되었고, 여의도에는 전시 활주로로 활용할 수 있는 광장(지금의 여의도 공원)이 생겼습니다. 북악산과 인왕산은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죠.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늘 ‘전시 상황’을 의식해야 했습니다. 안보 교육과 민방위 훈련은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학교에서는 정기적으로 대피 훈련이 이루어졌어요. 심지어 가정집에도 방독면과 비상식량을 비치하라는 지침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1·21 사태’는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를 군사적 논리로 재편하게 만든 분기점이었어요. 그날의 총성과 불빛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고, 이후 한국 사회의 도시 풍경과 일상적 긴장에도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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