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강남개발의 서막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자, 서울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당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는 1917년에 놓인 한강 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 하나뿐이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자 군은 적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이 다리를 폭파했는데, 그 순간 수많은 시민이 강북에 고립된 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끔찍한 기억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습니다.
1965년이 되어 두 번째 다리인 양화대교가 세워졌지만, 이미 서울은 인구가 급격히 늘고 도시화가 거세게 진행 중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엔 ‘혹시 또다시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이 여전했죠. 바로 이 무렵에 세 번째 다리인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 건설이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도시 개발을 위한 사업이었지만, 사실은 유사시 민간인 대피로를 확보하려는 숨은 목적도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예산 부족 탓에 공사는 지지부진했고, 몇 년 동안 진척이 더디게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정체되어 있던 한남대교 공사에 결정적 전환점이 될 사건은 이미 그보다 앞선 시점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1964년 12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 서독 대통령은 전후 폐허에서 기적 같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로 ‘아우토반’을 자랑했죠. 그 고속도로 위를 달리던 경험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귀국 후 그는 한국에도 반드시 고속도로가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서울(지금의 서울 강북지역) 진입 지점은 한남대교로 계획되었어요. 그래서 답보 상태였던 다리 공사에 다시 속도가 붙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남대교는 1969년 12월에 완공되었고, 이어 1970년 7월에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428km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죠. 다리와 고속도로가 서로 맞물리며, 한국 산업화의 길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고, 고속도로를 지을 기술도 자본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단 만들고 나중에 보수하자”는 결정을 내렸고, 공사는 말 그대로 밀어붙이듯 진행되었습니다. 공사 기간은 ‘기적’이라 불릴 만큼 짧았지만, 대가도 컸습니다. 공사 중 숨진 노동자가 77명에 달했고, 이후 20년 동안 들어간 보수 비용은 초기 건설비의 네 배를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경부고속도로는 한국 산업화의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서울과 대구, 부산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으며 물자와 사람들이 빠르게 오갔지요. 하지만 개발이 영남 지역에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호남 지역에서는 깊은 박탈감이 쌓여갔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지역 갈등의 뿌리도 이 시기의 불균형한 개발에서 비롯된 면이 큽니다.
당시 정부는 고속도로 건설 자금도 턱없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고속도로와 연결되는 강남 지역의 땅을 ‘토지구획정리’ 방식으로 개발했습니다. 정비되지 않은 땅을 구역으로 묶어 구획을 나누고, 땅의 용도를 다시 정한 뒤 가치를 높여 민간에 분양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확보한 자금은 곧바로 개발 재원으로 쓰였습니다.
그 무렵 강남은 허허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역이었어요. 하지만 다리와 도로가 집중되고, 정부의 강력한 개발 의지가 더해지면서 강남은 ‘계획된 도시’로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구 증가가 강남 개발을 부추기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기폭제는 바로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었죠. 강남 개발의 서막은 그렇게, 겉으론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